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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해병대 해안소초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희생된 고 이승훈 중사, 고 이승렬 병장, 고 박치현 병장, 고 권승혁 상병의 합동영결식이 6일 오전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병원 연병장에서 해병대사령부 주관으로 열렸다. 운구행렬이 차량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동료 해병대원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강화도 해병대 해안소초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희생된 고 이승훈 중사, 고 이승렬 병장, 고 박치현 병장, 고 권승혁 상병의 합동영결식이 6일 오전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병원 연병장에서 해병대사령부 주관으로 열렸다. 운구행렬이 차량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동료 해병대원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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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을까 마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인 젊은 군인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다. 집에서 수천 리 떨어진 타향 목욕탕에서 목을 매고 죽어 갔다는 해병대 정 일병의 소식을 접하면서, 구타도 없고 일과 시간이 끝나면 부대 내 피시방과 노래방에서 자유롭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고 자랑하던 병영 TV프로는 한낱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제대한 남자들의 '뻥 반 진실 반'인 이야기 속에 '곡괭이 자루로 엉덩이가 피떡지도록 맞았다'는 전설은 6·25 전쟁 얼마 후 군 생활을 하신 우리 아버지 이야기였고 군부독재의 서슬이 살아있던 1980년대 말에 강원도 골짜기에서 군생활을 마친 나의 이야기였다. 20년이 지난 오늘도 그 전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하니 어느 부모가 군대 가는 아이에게 선뜻 손 내밀어 잘 갔다 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조용히 안 해, 고참들 자는 거 안보여"

크리스마스 이브 훈련소에 입대한 나는 한겨울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끝도 없을 것 같은 밤 기차를 타고 춘천역에 내렸다. 거기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인솔자와 탄 버스는 날이 어두워져서야 우리를 내려 주었고 더플백을 맨 네명의 동기들은 인솔자 선임병의 지시에 따라 군가도 부르고 높은 포복, 낮은 포복을 번갈아 하면서 정문에 들어섰다. 정신차릴 수 없는 몇 번의 행정절차를 마치고 내려온 내무반. 거기에는 80여 명의 고참(선임병)들이 점호를 마치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 신병"
"네, 이병 ○○○"

네 명의 신병들이 목이 터져라 대답한다.

"조용히 안 해. 고참들 자는 거 안보여."

어디선가 금방 잡아먹을 것 같은 고함이 날아왔다.

"나 제대 며칠 남은 것 같냐?"
"얘하고 나하고 누가 고참 같냐?"

소위 말년 병장들은 끝없이 말을 걸어 왔고 한쪽에서는 대답 작다고 한쪽에서는 시끄럽다고 신병들을 후갈겼다. 계급장도 없는 취침복장. 80여 명의 선임병 중 누구 더 계급이 높은지, 취침등이 켜진 시간에 부르면 목이 터져라 관등성명을 대야 하는지 누구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던 그날 밤. 27개월 군생활 자대 첫날밤은 참 당황스럽고 두려웠고 부자유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겨울이 끝나기 전 시작된 신병생활. 소위 식기당번이라고 지칭되는 상병 고참들이 신병의 교육을 담당했다. 아직 보직도 받지 못한 신병들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직속상관 관등성명부터 부대가, 고참 이름 등을 암기하는 것이었다. 사람이름을 외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얼굴도 본적 없는 사령관 별자리 이름부터 중대장 이름까지. 그리고 분대장에서부터 같은 이등병이지만 선임병 이름까지. 틀릴 때마다 머리박고 원산폭격, 쪼그려 뛰기. 성질 급한 선임병들은 주먹부터 날렸다.

부대 내에서 나보다 낮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를 보든 군기가 바짝 들어 '충성'이라는 고함과 함께 경례하는 것을 습관처럼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 같은 내무반이 아닌 다른 중대원들에게는 경례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또 부대에 출퇴근하던 방위병(단기사병)에게도 경례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똑같은 부대 마크를 달고 있는 사람들. 누구 우리 중대인지, 누가 방위병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

'충/성' 고함치듯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지나가 버리면 아차. 그러나 때가 늦었다. 지켜보던 선임병이 고참 얼굴도 모르고 방위병들에게 인사한다고 군수창고 뒤, 세면장 뒤 으슥한 곳으로 불렀다. 그런 날은 재수 좋으면 원산폭격. 고참 기분이라도 좋지 않은 날이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았다. 신병 생활 몇 달은 하루가 십 년 같았다. 그때 담배 한 개비 건네며 국방부 시계는 땅에 파묻어 놓아도 간다고 위로하던 선임병도 있었다.

'하느님과 동기동창'인 병장도 고달프긴 매한가지

강화군 길상면 해병대 2사단 해안초소에서 4일 오전 김아무개 상병이 동료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해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김아무개 상병 포함)하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흰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한 군인들이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사고 부대에 도착하고 있다.
 강화군 길상면 해병대 2사단 해안초소에서 4일 오전 김아무개 상병이 동료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해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김아무개 상병 포함)하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흰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한 군인들이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사고 부대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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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부대에서 큰 지적사항(장교들이나 선임하사 등에게 큰 문제로 지적받는 일)이 난 날이면 그야말로 찐하게 '한따까리' 하는 날이었다. '식사 끝나고 전원 집합. 열외 없음' 이런 지시사항이 전달된 날에는 저녁 식사도 다섯 숟가락 이상 뜰 수 없었다. 동작이 늦다고 식판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내무반에 80여 명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무릎선을 맞추고 앉아 있었다. 내무반장인 최고참 병장의 훈시가 있고 나면 상병들이 줄줄이 불려나가 맞았다. 일병, 이병들은 침상 걸치기(침상과 침상 사이에 몸을 걸치고 있는 것), 수통따까리(수통 뚜껑을 침상에 놓고 머리박기), 반합 따가리(야전 식기인 반합 뚜껑에 머리박기), 군번줄 손가락에 감고 깍지껴서 엎드려 뻗치기 등 수도 없는 얼차려가 반복되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얻어맞은 상병들은 분풀이하듯 일병, 이병들을 으슥한 곳으로 불러 모아 똑같은 얼차려와 구타를 반복했다. 일병은 이병을 불러모아 또 그렇게 하고… 그런 날은 하루 동안 침상에 잠들기 전까지 얼차려와 맞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날은 편안했다.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며칠은 평안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이병, 일병시절을 거쳐 상병 말호봉. 내무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 식기당번이 되었다. 맞던 군번에서 패는 군번이 된 것이다. 파묻어 놓은 국방부 시계가 부지런히 돌고 돌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는 혜택 아닌 혜택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식기당번이 되고 병장을 달아도 군대생활이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장교 중에는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사병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었다. 관물대(사물함) 뒤켠 먼지가 손에 묻어난다고 점호를 몇 번이나 다시 했다. 모포에 각이 안 잡혔다고 잠도 안 자고 몇 번이나 관물 정리를 다시 하기도 했다. 몇몇 장교들은 '왜 이렇게 내무반이 엉망이냐, 군기는 쏙 빠졌다'라는 말로 병장들을 갈구(?)었다.

그건 후임병들을 패서라고 군기를 잡고 한따까리 찐하게 해서라도 자기 생각한 대로 팡팡 잘 돌아가게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그런 날이면 병장이나 고참들은 싫든 좋든 후임병들을 괴롭히는 가해자가 되어야 했고 후임병들은 구타와 얼차려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강군' 꿈꾼다면 장군에서 이등병까지 인권교육 새로 하시라

20년 전 군대생활.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나 혼자 특별나게 어렵게 군대생활 한 것도 아니고 나만 못나서 맞아가며 군생활하고, 나만 모나서 후임병들을 괴롭힌 건 아닌 것 같다. '군기 잡는다'란 미명하에 구타와 얼차려가 당연시되고, '까라면 까'라는 상명하달 문화가 어떤 원칙보다 앞섰던 군대. 맞고 얼차려 당하던 후임병 시절이 끝나면 곧바로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후진적 군대.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나 인격에 대한 예의조차 무시된 군대가 6·25직후 3년을 넘게 사병으로 지냈다던 아버지 병영의 모습이었고 내가 20년 전 겪은 군의 모습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니. 강군육성을 내세우는 군, 가정보다 편안한 잠자리, 엄마가 해주는 밥같이 맛있다는 식사, 형님 같고 동생 같이 지낸다는 내무반 생활, 이것들이 한낱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쇼에 불과했었나?

기수열외, 작업열외라는 극한적 인간 무시의 소외 현상. 후임병조차 선임병에게 말을 놓고 선임병 대우는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수없이 맞고 얼차려 받으면서 군생활을 한 20년 전의 그것과 비교해봐도 나을 것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기수열외를 전통이라고 하지만 20년 전 군대에서도 후임이 선임에게 말을 놓는 문화는 꿈도 못꿨다. 전통이 아닌 '악습'일 뿐이며 강군은 절대 이런 문화 위에서 이루어 질 수 없다.

그쪽보고는 오줌도 안 싼다는 군대생활. 지금 생각해도 힘들고 어려웠다. 올해는 유독 군에 관련된 소식이 많다. 좋지 않은 소식들이 대부분이다. 고위 공직자 선출이나 임명시에는 군에 왜 안 갔냐, 면제가 합법적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또 한쪽에서는 군에 간 자식들이 동료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구타에 못견뎌 스스로 죽어가고 있다. '강군육성'은 첨단 무기만 들여온다고 되지 않는다.

군대가 '진짜 군대'로 거듭나려면 국방의 의무가 신성하다는 교과서 이야기를 지도층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 또 군대가 강군이 되려면 인간의 권리, 인권에 대한 교육이 우선돼야 한다. '쫄다구'와 '고참'이 아닌 인간이 먼저라는 것을 군이 모두에게 주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강군은 인권의 바탕 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장군에서 이등병까지. 제대로 된 인권교육으로 이번 기회에 구타와 얼차려의 악습을 반드시 끊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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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해병대, #군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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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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