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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치유는 언뜻 보아서는 하나로 엮이지 않는 화두이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고문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치유하는 일로 인권의 전방에서 활약하고 있는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엇일 테다. 그가 말하는 치유와 인권의 맥락을 따라가니 그곳에는 '사람' 그리고 '희망'이 있었다.

지난 6월 29일 홍대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인권센터 건립을 위한 주춧돌 강연에서 한 정혜신씨의 강연을 요약해 보았다.

심리적 내상의 메커니즘과 치유

정신과 전문의이자 마인드프리즘 대표인 정혜신씨. 지난 6월 29일 인권센터 주춧돌을 위한 연속강연에 재능을 기부해주었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마인드프리즘 대표인 정혜신씨. 지난 6월 29일 인권센터 주춧돌을 위한 연속강연에 재능을 기부해주었다.
ⓒ 위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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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은 어느새 '치유'의 대명사가 됐다. 찾는 이가 많으니 바쁠 수밖에. 다양한 영역에서 치유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는 그는 그림 에세이 <홀가분>의 저자이자 같은 이름의 심리 치유 카페를 운영하며, 정신건강 컨설팅을 하는 회사 '마인드프리즘'의 대표이기도 하다.

평일 낮에는 대기업 임원 등을 상대로 심리상담을 하고, 토요일마다 경기 평택을 찾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을 상담하며 1주일에 한번은 서울 봉은사에서 고문 피해자들을 만난다. 그런데 이렇게 자본의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정혜신씨에게는 전혀 '분열적'이지 않았다. 

"저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고문피해자들의 심리적 내상을 치료하는 일을 해요. 자본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다가 이렇게 오가는 것에서 크게 모순을 느끼지는 않아요. 특별한 사람에게도 평범한 면이 있고, 평범한 사람에게서 위대함을 발견하기도 하거든요. 노동자든 해고자든 기업체 대표이든 간에요."

물론 보편적인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일을 겪은 사람들은 그만큼 치유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정씨가 만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인간의 의지로 통제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사건 이후에 나타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를 겪고 있다. 그는 이 병의 핵심 기제를 죽음에 대한 위협과 공포, 그리고 모멸감과 무기력으로 설명했다. 옆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의 경험이나 고문 피해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렇게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상처의 본질은 '죽음의 각인'이에요. 고문수사관은 처음에 말도 없이 2~3일 동안 때리기만 한대요. 그러고 나면 자신이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린대요. 온몸의 세포가 각성 상태가 되는데 그보다 생생한 기억은 있을 수 없지요.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낮에는 고통스런 기억을 잊기 위해서 다른 데 매몰되기도 하지만 밤이면 꿈에 나타나고요. 80년대 고문당한 분들이 지금도 잠을 설치고, 쌍용차 노동자들은 자꾸만 헬기 소리가 들린다고 해요. 2년이 지났는데도 진압을 위해 헬리콥터가 저공 비행하고 최루액을 떨어뜨린 기억 때문에 비행기가 지나가기만 해도 두통이나 가슴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은 이후 스스로 파괴하는 원인이 된다. PTSD가 위험한 이유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게 유사한 고통이 전이되기 때문이다. 자살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경우 배우자가 자살한 경우가 거의 절반이나 됐다고 한다. 꼭 전쟁이나 고문이 아니더라도, 노동현장의 이런 구조적인 모순이 얼마나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지 뼈저리게 알 수 있다. PTSD는 정신과 질환 중에 유일하게 가해자가 존재하는 병이다. 정씨는 "피해자의 어떤 특성 때문에 생긴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했다.

"희망퇴직자 중에 와병 중이던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쟁을 포기한 사람이 있어요. 엄청 괴로워하다 결국은 아버지가 자살하셨어요. 상황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피해자들끼리 서로 가해를 찾는 상황이 시작돼요. 분노와 자책을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면 안심하고 자신을 더 상처내지 않을 수 있지요."

절망 속에서 삶의 바닥을 마주하고 자신의 고통을 철저히 마주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때, 같은 상처를 서로 보듬을 수 있을 때가 진정한 치유의 시작인 셈이다. 

치유는 상처의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치유는 '현장으로 돌아가기'를 거쳐야만 가능한데, 치유되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투쟁할 수가 없다. '분노의 힘'은 투쟁의 중요한 동력이지만 억울함이나 분노로 꽉 차 있으면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눈앞의 투쟁에 급급하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치유란 사치에 불과했지만 "치유해야 투쟁도 잘 할 수 있다"는 그의 '꼬임'에 결국은 넘어갔다.

"예전에는 같이 투쟁했던 사람을 만나도 피했대요. 사람만 봐도 예전 기억이 떠오르니까요. 억울함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에요. 꾸준히 상담한 해고노동자들은 투쟁이 잘 된다고 하세요. 사람들을 만나도 적절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80년대 고문피해자의 경우는 거의 '지옥에 가까운' 경험을 얘기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기억에서조차 지우고 싶은 것들도 상담실에서는 끄집어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심리적으로 안전한 상황을 만들고 얘기하도록 돕는 일이 상담자의 역할이고 거기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모든 것들을 검열하지 않고 다 얘기하도록 한다.

그가 20여 년 동안 상담으로 만난 사람이 1만 1000명에 가깝다. 이렇게 힘든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정씨는 도리어 이 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다'고 했다. 그만큼 감정적으로 내담자와 독립된 상태라는 뜻이다. 오랜 경험으로 쌓인 내공이라 하겠다.

"봉은사에서 고문 피해자분들 상담하면 머리가 맑아져요, 제게 에너지를 주는 일이지요. 제 딸이 그러는데 요즘이 제일 쌩쌩해 보인다고 해요(웃음). 젊었을 때는 상담하다 보면 감정이 자극되기도 하고 힘들 때가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돌본 친구가 있었는데, 엇나가는 아이들을 상담할 때 너무 힘들어했어요. 정신과 의사라고 해도 이렇게 각자에게 걸리는 부분들을 치료받아야 해요. 저도 그 과정이 2년 넘게 걸렸어요. 상담 중에 무기력할 때 힘들어지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에도 치유로 연결시키는 부분을 알게 된 거지요."

든든한 동반자 얘기도 빠질 수 없다. 심리기획자 이명수씨는 함께 사업을 하는 동료이자 남편이다. "어떤 감정도 같이 나눌 수 있는", 말하자면 소울메이트인 셈.

정혜신씨는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가 불거지면서 김진숙 지도위원을 '위로차' 방문하고 통화하면서 도리어 힘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호작용이야말로 치유와 위로의 힘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무지와 편견 또한 사회가 변화해야 할 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혈액형을 맘대로 바꿀 수 없듯 성정체성이란 것도 그런 것이에요. 한때는 '질병'이라고 보고 전기충격이나 실험을 가하는 등 오랫동안 잔혹한 역사가 있었어요. 의학계에서 이미 선언한 것처럼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알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성적소수자들은 상담해 보니 이성애자들은 인지하기 힘든 정신적으로 힘들고 예민해지는 때가 많습니다.

비단 한진중공업 사태뿐만 아니라 여러 철거 현장 등 발벗고 나설 문제가 도처에 산재해 있다. 정혜신이 한 명뿐이란 것이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그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경기도 평택에 세울 심리치유센터 '와락'의 건립을 준비하며 상담인력을 키우는 학교 또한 계획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들도 사회 맥락에서는 현실 경험이 부족하지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상담학교를 계획하고 있어요. '포옹대안학교'를 만들고 싶은 꿈도 있고요. 치유의 본질은 '엄마성', 한 인간을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포옹'이라고 보거든요. 세 아이를 한 인간으로 지지하고 격려한 것 뿐인데, 다 잘 커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치유와 인권의 만남은 인권센터 건립으로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을 듯하다. 정혜신씨는 인권센터 건립에 대한 관심과 동참을 당부하며 말을 맺었다. 이날 강연비 또한 센터 건립을 위한 기금으로 후원했다. 

인권재단 사람이 주최하는 주춧돌 연속강연은 지난 4월 시작되어 7월 27일 박노자, 7월 28일 배우 김여진씨의 강연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인권센터 건립에 대한 내용은 홈페이지(www.hrcenter.or.kr)를 참조하면 된다.  


태그:#정혜신, #인권센터, #주춧돌강연, #쌍용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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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하셨습니까>를 썼고 인권, 여성 분야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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