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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인 에이미 엘리슨(58.왼쪽)씨와 그녀의 파트너인 트루디 리쎄(64)씨가 26일 피켓을 들고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레즈비언인 에이미 엘리슨(58.왼쪽)씨와 그녀의 파트너인 트루디 리쎄(64)씨가 26일 피켓을 들고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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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저는 이제 트루디와 결혼할 겁니다."

26일(현지시각) 오후 뉴욕 맨해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앞에서 만난 레즈비언 에이미 엘리슨(58)씨는 그녀의 파트너 트루디 리쎄(64)씨의 주름진 손을 꼭 잡았다. 바로 옆 5th AVE에서는 '2011 게이 프라이드(pride) 퍼레이드'가 한창이었고, 게이들의 화려한 코스튬과 율동에 관광객들은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너무나 큰 감격 탓이었을까? 음악과 춤으로 한껏 달아오른 거리 분위기와 달리 엘리슨씨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1970년 첫 게이 퍼레이드가 열렸을 때 17살이었던 그는 지난 41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행사에 참가해왔다. 그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더 어렸을 때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나는 거의 평생 동안 나의 성 정체성을 알아왔고, 그래서 평생 동안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그가 트루디 리쎄씨와 교제를 한 지는 10년이 좀 넘었다. 이제 그는 뉴욕에서 평생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

지난 24일 밤, 뉴욕주 상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할 수 있는 평등결혼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며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공화당이 다수당으로 있는 뉴욕주 상원에서 이 법안이 통과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올해 게이 퍼레이드가 예년과 달리 50여만 명이 참여할 만큼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레이디 가가 "정의와 평등, 사랑을 위해 싸운 혁명의 결과"

이번 게이 퍼레이드가 범상치 않게 진행될 것이라는 조짐은 뉴욕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부터 보이기 시작됐다. 이 빌딩은 전날(25일) 밤 꼭대기에 동성결혼 합법화를 축하하기 위해 게이를 상징하는 무지개색 조명을 쏘아 올렸다.

일찌감치 5th AVE 인도를 가득 메운 수만 명의 게이들과 뉴욕시민, 관광객들 사이에도 온통 무지개색이 넘실댔다. 손에는 무지개 깃발이 들려 있고, 무지개색 목걸이에 팔찌를 착용했으며, 무지개색 모자와 티셔츠를 입고, 무지개색 바디 페인팅을 했다. 퍼레이드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게이들의 코스튬 곳곳에도 무지개색이 사용됐다. 한쪽에서는 무지개색 천으로 만든 장미꽃을 파는 행상도 등장했다.

뉴욕주에서 동성 간 결혼을 인정하는 평등결혼법안을 통과 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운데 곤색 양복)가 26일 뉴욕 맨해튼에서 펼쳐진 게이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옆에 있는 그의 여자 친구 샌드라 리가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고, 시민들은 "고맙습니다. 쿠오모 주지사"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뉴욕주에서 동성 간 결혼을 인정하는 평등결혼법안을 통과 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운데 곤색 양복)가 26일 뉴욕 맨해튼에서 펼쳐진 게이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옆에 있는 그의 여자 친구 샌드라 리가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고, 시민들은 "고맙습니다. 쿠오모 주지사"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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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날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고마워요, 쿠오모 주지사", "약속(공약)은 지켜졌다"는 글이 적힌 파란색 손피켓을 들고 있었다. 민주당 소속인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평등결혼법안을 발의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법안을 통과 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엘리슨씨를 비롯해 몇몇 참가자들은 평등결혼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상원의원의 이름을 손으로 적은 피켓을 들고 나왔다.

이날 퍼레이드는 센트럴파크 남단인 36st & 5th AVE를 출발해 크리스토퍼, 그린위치 스트리트(Christopher & Greenwich St)까지 진행됐다. 정오 12시, 전통대로 수십 대의 오토바이가 귀를 찢는 굉음을 만들며 출발했다. 한 여성이 무지개 깃발을 든 채 자신의 여성파트너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환호성을 질렀다.

이어서 무지개색 대형 풍선 행렬이 퍼레이드의 시작을 알리며 천천히 거리 행진을 펼쳤다. 퍼레이드는 직장 단위, 커뮤니티 단위, 지역이나 국가 단위 등으로 진행됐다. 구글, 스타벅스, 마스터카드, 체이스은행, 델타항공 등 일반 기업 게이 커뮤니티에서 참가했다. 특히 뉴욕경찰, 소방서, 응급차, 학교 등 공공기관 종사자들과 교회 관계자들의 참가도 눈길을 끌었다. 일부 민주당 상원·하원의원과 지지자들도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게이 바와 게이 헬스클럽 등에서 나온 참가자들이었다. 근육질의 알몸을 과시하거나 섹시한 코스튬으로 무장한 이들은 트럭에 실린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는 등 퍼레이드를 순식간에 환호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길거리에서 프러포즈하는 레즈비언 커플, 포옹을 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게이 커플 등도 눈에 띠었다. 18년간 동거해온 게이 커플이 아들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온 레즈비언 커플들도 있었다. 몇몇 게이 커플은 각각 신랑·신부 옷을 차려입고 나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게이커플 바르비에 쵸시보(37.오른쪽)와 마르셀라 폰네(32)씨가 26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게이커플 바르비에 쵸시보(37.오른쪽)와 마르셀라 폰네(32)씨가 26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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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비교적 동성애에 관대한 국가의 순서가 지나간 뒤, 일본이나 중국, 태국 등 아시아 국가 참가자들도 모습을 보였다. 특히 한국 참가팀은 북과 꽹과리 등으로 사물놀이를 연출했다.
게이 퍼레이드에는 레즈비언이나 게이만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 양성애자, 트래스젠더는 물론,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행사의 취지에 공감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평범한 복장의 참가자들도 많았다.

게이 퍼레이드 참가자들은 인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콘돔, 크림(윤활유) 등 성용품은 물론, 부채, 사탕, 무지개색 목걸이·팔찌 등 게이 퍼레이드 기념품들을 나눠줬다. 일부 참가자들은 기업이나 헬스클럽 광고 전단지를 배포하기도 했다.

이날은 구름이 많고 바람이 선선해 여름 날씨 치고는 거리 행진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게이 문화가 익숙지 않은 관광객들조차도 참가자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춤을 추거나 이색적인 코스튬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 등 나름대로 축제를 만끽했다.

현재 뉴욕주 곳곳에서는 동성결혼 지지자들의 축하 파티가 열리고 있으며, 레이디 가가, 린지 로한, 알렉 볼드윈 등 유명 연예계 인사들도 트위터 등을 통해 축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양성애자로 알려진 배우 린제이 로한은 "믿을 수 없이 기쁜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고, 역시 양성애자인 가수 레이디 가가는 "정의와 평등, 사랑을 위해 싸운 혁명의 결과"라며 환영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CBS의 인기 시트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의 주인공인 배우 닐 패트릭 해리스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동성연인 데이비드 버트카와의 결혼 계획을 발표했다.

"고마워요, 쿠오모 주지사!"... 공화당을 움직인 힘은?

"뉴욕에는 세 개의 성(sex)이 있다. 남성, 여성, 그리고 게이다."

뉴요커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통하는 말이다. 그 만큼 뉴욕에는 그 어느 지역보다 게이의 숫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버몬트, 뉴햄프셔, 아이오와 등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사이 뉴욕은 동성동거만 허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2년 전 민주당이 뉴욕주 상원의 다수당이었을 때 동성 간 결혼을 인정하는 평등결혼법안이 상정되었다가 끝내 부결됐다. 이후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평등결혼법안을 다시 발의하자, 정가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쿠오모 주지사는 비록 민주당이었지만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26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 참가자들, 게이커플로 보이는 두 남성이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행진하고 있다.
 26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 참가자들, 게이커플로 보이는 두 남성이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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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26일 법안의 통과 이면에 동성 결혼에 반대 견해를 보였던 공화당을 움직인 권력 역학의 변화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쿠오모 주지사의 여자 친구 샌드라 리에게 게이인 남자 형제가 있어서 쿠오모 주지사가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실제 쿠오모 주지사는 이례적으로 샌드라 리와 함께 이날 게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특히 쿠오모 주지사는 월스트리트의 공화당 거액 기부자 3명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이들 기부자 중 헤지펀드 매니저인 폴 싱어는 아들이 게이였다. 이들은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활동에 각각 수십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모두 100만 달러의 로비 자금을 제공했고, 이런 움직임은 공화당이 평등결혼법안 상정에 동의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국, 뉴욕주 상원에서 평등결혼법안은 찬성 33표, 반대 29표로 통과됐고, 뉴욕은 미국에서 6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주가 됐다. 특히 뉴욕주는 기존의 5개 주 인구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1900만 명) 규모나 상징성 때문에 기존 합법화 지역보다 훨씬 큰 파급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주에 이어 동성결혼 합법화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는 캘리포니아에서까지 법안이 통과될 경우, 미국인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동성 간 결혼이 합법적인 지역에서 살게 된다.

26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 참가자들.
 26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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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게이 퍼레이드, #게이 , #레즈비언, #평등결혼법, #동성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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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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