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소련제 북한군 탱크가 한국전쟁 초기 한반도를 누볐다. 국군은 이 무소불위의 탱크 앞에 무력했다.
▲ 북한군 탱크부대 소련제 북한군 탱크가 한국전쟁 초기 한반도를 누볐다. 국군은 이 무소불위의 탱크 앞에 무력했다.
ⓒ NARA(미국국립공문서기록관리국)/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한국전쟁은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한국)' 'Korea War(미국)'  '조국해방전쟁(북한)'  '조선전쟁(일본)'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중국)' 등 입장에 따라 나라마다 달리 부르고 있다. 또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 <위키백과> 요약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전날 밤부터 한반도 상공을 뒤덮은 검은 구름이 마침내 비를 뿌렸다. 미처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는 굵은 빗줄기가 가랑비로 솔솔 내렸다. 4시 정각, 가랑비 속에 38선 전역에서는 갑자기 포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우리 겨레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한국전쟁 발발 신호였다.

하지만 그 시간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뒤늦게 그 포성 소식에도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까닭은 이전부터 38선 일대에서는 소규모 충돌이 잦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서울 라디오방송은 국군 승전보를 전했다.

1950. 8. 24. 피란민 행렬.
 1950. 8. 24. 피란민 행렬.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그날 정오부터는 마이크를 단 군용 지프차가 거리를 질주하면서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 복귀하라"고 방송하자 그제야 서울시민들은 조금 동요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38선 전역에 전면전이 일어난 줄은 대부분 까마득히 몰랐다. 대부분 사람들은 국군이 전선에서 인민군을 곧 물리칠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이튿날 6월 26일 오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국회에 출석하여 서울 사수를 공언한 다음, "이미 아군은 해주를 돌입하여 의정부 이북을 제압하고 있다. 명령만 내리면 사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하여 의원들로부터 박수까지 받았다. 하지만 전선의 실제 상황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그날 낮 인민군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근교 비행장을 공습하고 돌아갔고, 그날 밤에는 인민군이 의정부를 점령하여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에 진주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6월 27일 새벽에는 인민군이 수십 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의정부에서 서울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국군 제25연대는 대전차포와 바주카포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했으나 인민군 탱크는 꿈쩍도 않고 계속 남으로 질주했다. 6월 28일 새벽 서울 미아리 고개 일대 시민들은 인민군이 몰고 내려온 소련제 탱크 캐터필러의 소리에 선잠에서 깼다. 

1950. 7, 29.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는 마을 소년들.
 1950. 7, 29.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는 마을 소년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아직도 세계 화약고인 한반도

전쟁 발발 후 1년이 지난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시작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양측이 지루하게 끌던 정전회담이 마침내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휴전으로 매듭지어졌다.

3년 1개월간 계속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전 국토가 잿더미가 돼서 대부분의 산업시설들이 파괴되었다. 전쟁 후 남한과 북한 간에는 적대적 감정이 더욱 커지고 한반도 분단이 전쟁 이전보다 더 한층 고착화되었다.

함흥 덕산 광산 1950. 11. 13. 학살된 시체더미에서 아들을 찾는 어느 아버지
 함흥 덕산 광산 1950. 11. 13. 학살된 시체더미에서 아들을 찾는 어느 아버지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여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유엔군 측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여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인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었으며 그 가운데 민간인 희생자가 상당수였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에서도 100만 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하고, 중국군까지 합쳐 자유진영 및 공산진영 양측을 합하면 약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은 그밖에도 숱한 전쟁미망인과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부분 공업시설이 파괴되어 남북한 모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 수로에 머리를 박고 숨을 거둔 어느 북한군 병사.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 수로에 머리를 박고 숨을 거둔 어느 북한군 병사.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이와는 달리 한국전쟁은 당시 민심을 잃어 실각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파동을 일으켜 정권 연장을 도모할 수 있었고, 이승만 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대한민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아울러 북한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 이후에도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여 '김일성 체제'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닦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1돌이 지나지만, 아직도 남과 북은 위기일발의 세계 화약고로, 팽팽한 대치 속에 긴장감이 돌고 있다. 어느 정치지도자가 나타나 이런 긴장감을 풀고 남과 북이 다함께 평화 공존을 지향하며 마침내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한국전쟁 발발 61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나라 이 겨레를 평화공존으로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를 학수고대하는 것은 나만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나의 글보다 더 사실을 잘 알려주는 그때의 사진 몇 점을 붙인다. 이 기사에 실린 사진은 내가 2004, 2005. 2007년 세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가서 한국전쟁 자료사진으로 수집해 온 것들이다.

1951. 7. 6. 서울, 전쟁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도 시장은 열리다.
 1951. 7. 6. 서울, 전쟁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도 시장은 열리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1950. 9. 한 남정네가 병중인 시각장애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란을 떠나고 있다.
 1950. 9. 한 남정네가 병중인 시각장애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란을 떠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1951. 9. 20. 총구 앞에 한 북한군 병사가 짐승처럼 수풀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1951. 9. 20. 총구 앞에 한 북한군 병사가 짐승처럼 수풀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1950. 8. 24. 포로로 잡힌 인민군 병사가 심문을 받고 있다.
 1950. 8. 24. 포로로 잡힌 인민군 병사가 심문을 받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1950. 8. 25. 길가에 널브러진 피란민 시신들
 1950. 8. 25. 길가에 널브러진 피란민 시신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박도 기자가 한국전쟁을 주제로 엮어펴낸 사진집에는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 2 ‧ 3>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 <한국전쟁‧Ⅱ>(눈빛출판사) 등이 있다.



태그:#한국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