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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휴대전화가 없다. 집에 에어컨도 없다. 현대 사회에 유행하는 건강기구 등도 없다. 대신 그에게는 죽으면 장기와 시신을 대학병원에 기증한다는 20년 묵은 약정서가 있다. 10년 전 아내가 타계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의 약정을 지켰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30여 년 전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과 두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눈 뒤 얻은 깨달음 때문이다. 신발도 치우고 문을 닫아건 채 급박한 원고를 집필 중이던 스님께서 "저는 대구에서 온 시인인데 혹 스님께서 안에 계시면 받아 주십시오" 하는 간청을 듣고는 손수 차까지 끓여주시며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그날 그는, 법정 스님께서 간디로부터 영향을 받아 무소유 사상과 만민평등 사상을 실천하고, 소로(Thoreau, Henry David)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연친화 사상과 오두막집 기거를 일상에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후 그는 법정 스님을 본받아 스스로도 그렇게 살기로 작정했다. 사람의 운명은 '스승과 친구를 만나는 데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까닭이다.
 
이렇게 화두를 꺼내면 독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자못 궁금할 터이다. 거두절미하고 곧장 사실을 말하면, 그는 대구문단의 원로  정재호 선생이다. 앞의 내용은, 선생의 최근 수필집 <친구냐 원수냐> 권두에 나오는 '법정 스님과의 인연'을, '나'를 '그'로 바꾸어 내용만 소략하게 간추려 소개해 본 것이다. 글을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을 판단하자는 뜻에서이다.
 
<친구냐 원수냐>에 실려 있는 수필들이 모두들 한결같지만, '법정 스님과의 인연'도 결코 평범한 이야기는 아니다. 흔히 글쓴이의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필자의 인격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산문으로 정의되는 수필의 특성을 간과한다 하더라도, '법정 스님과의 인연'  이 한 편만으로도 이 책을 지은 작가의 정체성은 단숨에 파악되기 때문이다.
 
<친구냐 원수냐> 세간의 화제로 떠올라
 
대구의 원로 시인이자 수필가 정재호 선생이 상재한 <친구냐 원수냐>가 문단에 회자되고 있다. 지난 6월 18일 대전광역시 중구문화원에서 거행된 제7회 원종린 문학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덕분이다. 한국평론가협회장을 역임한 김양수 선생 등 5인의 심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심사평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올해 제7회 원종린수필문학상 대상 수상자로 정재호 수필가를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중앙문단에서 세속적인 이름을 높이며 화려한 각광 속에서 문학활동을 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지역을 지키며 문학정신을 현창하는 성실한 창작의지로 수필을 향한 애정을 쏟아 붓는 겸허한 자세는 바로 우리 문학상이 지향하는 취지와 연결된다.
 
반세기에 걸친 오랜 연륜을 시종하여 쉽고 분명한 문장, 웅숭깊은 인간애, 그리고 문학과 수필을 향한 고집스러운 소신을 지켜온 정재호 수필가의 근작수필집 <친구냐 원수냐>는 무엇보다도 우리 글에 대한 애정과 언어를 다룸에 있어 두드러지는 염결성과 사소한 사물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유추해내는 기량이 돋보인다. 대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서 수필의 힘이 배가될 수 있음을 우리는 정재호 수필가의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정재호 작가는 196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문단에 등단한 후 이은상문학상, 도천문학상, 부원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모과> <마당> <천치가 부르는 노래>와 수필집으로  <문구멍으로 본 인생> <세월이 남기고 간 자국> <생각의 모래알> <숨어서 본 연극> <도시에 나온 촌닭> <한 꺼풀 벗기고 본 세상> <이런 사람 저런 인간> <그대에게 드리는 선물> 등을 펴낸 대구 지역의 원로 문인이다. 그의 저서는 모두 13권이나 된다.  
 

선생은 수필 '겸상'에서 "내가 지은 저서가 열세 권 있지만 그것들이 후세까지 전해질지 누가 보장하겠는가" 하고 토로한다. 하지만 수필 '훌륭한 어머니'를 통해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의 명문대에 끝까지 다니지 못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중퇴하는 까닭을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암기를 주로 시키고 집에서는 과외에 아이들을 맡기다시피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창의력을 중하게 여기고 남과 다른 사고력을 요구하고 있으니 앵무새 교육만 받던 아이들이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급기야 '여자 친구'에서는 "(친구들은 궁상 그만 떨고 재혼을 하라고 하고) (친지들의 권유에 못 이겨 여자 친구를 구해 보기로 하지만) 여자 친구 대신 고독과 친해지려고, 밖에 나가서나 집 안에서나 그의 눈치를 보며 그의 비위를 맞추며 말없이 살아가고 있다. 나는 고독과 동거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 여자와 '친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들을 더 살펴볼 것도 없이, 이래저래 선생은 자신이 천생의 문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수필 '교사의 말 한 마디'를 통해 "나는 시련이 닥칠 때마다 시인이 될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왔다"고 직접 밝히기도 하지만, 그의 문인 정신은 수필집 <친구냐 원수냐>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냐 원수냐>는 모두 6부로 구성되어 있다. 6부의 내용은 제 1부 '친구냐 원수냐', 제 2부 '나는 누구인가', 제 3부 '아버지의 유언', 제 4부 '은장도', 제 5부 '외할머니', 제 6부 '수필의 맛'이다. 작가 본인은 '내 글은 우물 안 개구리의 넋두리 같은 것'이라고 겸양해 하지만, 수록된 61편의 작품들은 문필가 황필호 선생이 '지식과 체험과 직관이 잘 용해되어 탄생'되었다고 상찬한 바 그대로 한결같이 높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친구냐 원수냐> (정재호 씀, 그루출판사, 2011년, 9천원)


태그:#정재호, #원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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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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