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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네팔, 나이 40세, 키 164cm. 대한민국 노동부에 등록된 고 갈레 던 라즈(이하 갈레)씨의 생전 '스펙'이다.

"성실하고 윗사람에 대한 공경심이 뛰어난 네팔 사람"을 찾던 대구 S산업이 산업인력공단에서 갈레씨를 소개받은 것은 지난해 9월. '기계를 다루기에 적당한 키, 이직 확률이 높지 않은 나이'에 후한 점수를 준 S산업은 곧바로 그를 채용했다. 이렇게 대구의 한 이불솜 공장은 갈레씨가 한국의 고용허가제(EPS)를 통해 얻은 첫 직장이 됐다.

갈레씨는 지난해 10월 1일부터 지난 8일까지 9개월간 대구 성서공단 S산업에서 주6일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솜을 압축기에 넣고 빼는 일을 했다. 사람 키높이만큼 부풀어 오른 인공솜이 기계에서 압축돼 비닐에 포장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5초. 그는 이 일을 하루에 적게는 5시간, 많게는 12시간까지 반복했다. 동료들뿐만 아니라 회사 경영진도 그를 "조용하고, 일 잘하던 사람"으로 평가했다.

누가 봐도 성실했던 그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은 지난 12일 저녁 7시. 퇴사 4일만이었다. 숨지기 전날인 지난 11일, 타 공장에서 근무하는 네팔인 친구의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친구가 방을 비운 사이 화장실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이 남긴 유서는 모두 3통. 상의 윗주머니에 네팔어로 된 유서 1장이 꽂혀 있었고, 지갑에서 영어와 네팔어로 작성된 유서가 각각 1장씩 추가로 발견됐다. 네팔어 유서 2장은 현재 경찰이 보관하고 있으며,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여기는 법도 없나..." 갈레의 유서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Please, investigation please(제발, 조사해주세요 제발)'라는 문구로 끝나는 영문 유서의 수신인은 'Everybody(모든 사람들)'와 'Korea Government(한국 정부)'다. 도대체 무엇을 조사해달란 것일까. 성서공단노동조합 임복남 이주사업부장은 "일반적으로 회사와 관계가 틀어지면 이직을 하지, 일터에 끝까지 남아 진실을 밝히려는 경우는 흔치 않다"며 "전직 교사였고 청렴한 성격이었던 고인에게 부당한 대우가 있었던 것 아닌가"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갈레씨는 유서에서 '나는 미치지 않았고 결백하다. 회사가 나를 속였다'라고 주장하는데, 특히 'Company take my signature(회사가 내 서명을 받아갔다)'라는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는 'What thing is in that paper(그 종이에 어떤 것이 있었다)'라며 'Manager say, this paper for company change paper. So I do sign(부장이 말하기를, 이 종이는 사업장 변경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서명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총 몇 건의 문서에 갈레씨가 서명을 했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S산업의 C부장은 "퇴사와 관련해 그가 자필로 서명한 문서는 사직서가 유일하다"라며 "기타 문서에는 회사의 서명만 요구된다"고 밝혔다.

다음은 성서공단노동조합이 입수한 갈레씨의 영문 유서 내용이다.

Hi, Everybody! and Korea Goverment.
한국정부와 모든 분들에게

I am enocent(innocent) I have no mistake. Company cheating me. I am no crazy and everythings is no true. If I have a mistake, company can police case, company can go court. Why they didn't it?
나는 결백하고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회사가 나를 속였습니다. 나는 미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거짓입니다. 만약 내게 잘못이 있다면 회사는 경찰서와 법원에 갈 수 있습니다. 왜 회사는 그러지 않았을까요?

Here is no law? I have two small baby. and
여기에는 법도 없나요? 내게는 어린 아이 둘이 있습니다. (무언가 쓰려다 지운 흔적 있음.)

Company take my signiture(signature). What thing is in that paper. Manager say, this paper for company change paper. So I do sign
회사가 나에게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 종이에 무엇이 있었는데, 부장이 말하기를 이 종이는 사업장을 변경하기 위한 종이라고 해서 서명을 했습니다.

Please, investigation please.
반드시 진실을 밝혀주세요.

갈레씨가 내용을 모른 채 서명했다고 주장하는 문서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노동계는 네팔어로 된 유서 내용이 확보되기까지는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견해다. 아무래도 영어보다는 고인의 모국어인 네팔어로 된 유서에 더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을 것이므로 좀 더 기다려보자는 판단이다.

다만, 사직서 원본에 적힌 'letter of resignation(사직서)'란 영문이 고인의 평소 필기 습관과 다르게 표기된 점을 들어, 그가 '부당해고' 당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하고 있다. 사업장 이동을 위한 문서 작성이라고 속인 뒤 한국어로 사직서를 작성하게 하고, 갈레씨가 이를 제출한 뒤 회사측이 몰래 'letter of resignation'이란 문구를 추가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갈레씨는 평소 영어로 글을 쓸 때 모든 알파벳을 대문자로 표기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적어도 단어의 맨 앞글자만큼은 반드시 대문자로 표기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는데, 'letter of resignation'은 모두 소문자로 적혀있다. 실제로 네팔어 유서에도 "사직서를 쓴 것은 내 뜻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담당 형사는 전화통화에서 말했다.

갈레씨의 서명이 담긴 사직서
 갈레씨의 서명이 담긴 사직서
ⓒ 성서공단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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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S산업 C부장은 "갈레씨가 사직서 작성방법을 몰라서 옆에서 도와줬을뿐, 100% 본인이 작성한 것이 맞다"라며 부당 해고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다. 즉, 관계자가 '사직서'라고 한국어로 말하면 갈레씨가 이를 한글로 받아 적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온 지 9개월밖에 안된 이주노동자가 '합의' '퇴사'와 같은 어려운 말도 아무런 도움 없이 곧바로 받아적는 것이 가능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네팔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아느냐"며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힌 단어는 특히 습득 속도가 빠르다. '합의' '퇴사' 뿐만 아니라 '고용센터' '잔업' '야근' 같은 말도 다 안다"라고 대답했다. 'letter of resignation'의 표기법과 필체가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갈레씨 본인이 작성한 것이므로 우리가 알 길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3월에 무슨 일이... 초과근무수당 둘러싸고 사측과 갈등

평소 갈레씨와 친하게 지냈던 성서공단 네팔 이주노동자들은 그가 입국 6개월째인 지난 3월부터 힘들어했다고 일관되게 증언한다. 갈레씨가 지난 3월부터 주변 네팔 이주노동자들을 만날 때마다 "회사 때문에 힘들다"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특히 평소 갈레씨와 친하게 지냈던 타파(가명·33)씨에 따르면 "회사가 야근수당을 잔업수당으로 계산해 월급이 적게 들어왔다, 항의를 하니 원래 받아야 할 돈의 50%만 주더라"라고 갈레씨가 불만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회사가 공개한 故 갈레씨의 출퇴근기록과 급여명세서. 4월 14일 이전의 출퇴근기록은 공개하지 않았다.
 회사가 공개한 故 갈레씨의 출퇴근기록과 급여명세서. 4월 14일 이전의 출퇴근기록은 공개하지 않았다.
ⓒ MW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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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WTV 취재진은 갈레씨의 입사 이래 급여명세서와 출퇴근기록부 공개를 S산업에 요구했다. 이에 S산업은 근무 전체 기간 급여명세서와 올해 4월 15일 이후 출퇴근기록부 복사본을 제출했다. 한편, 4월 14일 이전의 출퇴근기록은 창고 깊숙이 보관돼 있어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3월과 4월 두달간 급여가 눈에 띄게 늘어난 이유에 대해 회사는 "당시 사람이 모자랐는데, 주간 근무만 하던 갈레씨가 돈을 더 벌고 싶다면서 주·야간 모두 일하겠다고 자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급여계산법, 갈레는 이해했을까

회사측 주장에 따르면, 갈레씨는 솜 수요가 늘어나 인력이 부족해진 3월부터 4월 초까지 하루의 절반 가량을 공장에서 보냈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쯤 출근해 다음날 새벽 0~1시까지 일한 것으로 C부장은 기억했다. 급여명세서에 따르면 갈레씨는 3월엔 약 190만 원, 4월엔 약 175만 원을 받았다. 평균 8시간 주간근무만 했던 입사 초반엔 한달 평균 약 130만 원을 받았다.

근무시간이 8시간에서 12시간으로 1.5배 늘어났고, 주간근무엔 적용되지 않는 야근수당(오후 7시~새벽 6시 근무시 시급 4320원의 50%를 추가로 지급)까지 더해졌을 텐데 급여가 130만원에서 175~190만 원 수준으로밖에 오르지 않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실제로 갈레씨와 회사 사이의 갈등은 여기서부터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갈레씨는 기본 근무 시간을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6시 30분으로 봤던 반면, 회사는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로 계산했다. 가령, 갈레씨가 오후 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일했을 경우 갈레씨는 오후 7시부터 야근수당이 발생한다고 봤지만, 회사는 밤 10시부터 야근수당이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직원수 20~30명, 연매출 약 25억 원 규모의 회사. 그러나 급여지급규정을 정리해놓은 문서는 없고, 이주노동자와 계약서 작성시에는 월급 날짜와 액수 정도만 설명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문서가 없다 보니 급여를 둘러싼 노사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갈레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10만 원이 덜 들어왔다면서 사무실에 올라왔었다"라고 C부장은 말했다. 갈레씨가 3월 월급 액수에 동의하지 않자 C부장은 그제서야 "오후 1시~밤 10시를 기본 근무로 쳤다"라고 그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쉽게 수긍하지 않는 갈레씨에게 C부장은 "일 잘하는 친구가 속상해하니까 5만 원 더 얹어서 15만 원을 호주머니에서 바로 꺼내줬다"라고 했다. 즉 지급되지 않은 급여는 없으며, 갈레씨가 적어도 '돈' 때문에 회사 측과 감정 상할 일은 없었다는 주장이다.

네팔행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4월 중순부터 줄곧 야간 근무만 하던 갈레씨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 외롭다'면서 지난 6일, 주간 작업조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만인 지난 8일 회사를 그만두고, 10일엔 고용센터에 구직등록을 했다.

이주노동자에게 주어진 구직기간은 최대 3개월. 이 기간을 틈타 그리운 아내와 두 자녀를 만나기 위해 14일 오전 출발하는 네팔행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놨다. 그러나 출국을 불과 이틀 앞둔 지난 12일, 그는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서공단노동조합에 차려진 故 갈레씨의 임시분향소
 성서공단노동조합에 차려진 故 갈레씨의 임시분향소
ⓒ MW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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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노동청은 폭력이나 임금체불 등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회사 경영진과 동료 이주노동자들을 조사했지만 별다른 혐의를 찾아내지 못했다. 사건이 '우울증으로 인한 비관자살'로 결론 내려질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는 상황. 고인의 시신은 대구 성서병원에 안치됐고, 유족이 한국에 들어오는대로 장례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주민방송 MWTV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 #부당해고,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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