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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여행의 좋은 점은 '간단한 짐 싸기'에 있는 것 같다. 내가 즐겨하는 자전거 여행이나 오토 캠핑 여행 같은 건 겨우 하룻밤 묵고 오는 여행인데도 웬 짐들이 그리 많은지. 삶의 무게에 눌려 여행이 덩달아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걷기 여행은 짐이 단촐하니 발걸음도 마음도 가뿐하고 가볍다.

 

<지리산 둘레길 그리고 그리다>의 지은이 고영일이 여행길에 가져간 것 중 특별한 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낚시용 접이식 의자. 만화가인 그가 걷기 여행 중 마음에 와닿는 풍경 앞에 앉아 간단하게 그림을 그릴 때 썼던 것으로, 책 속에 나오는 푸근하고 정감 어린 그림들은 모두 이 의자 위에서 스케치했단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난 10년간 만화를 그려온 지은이에게, 고갈되어 간다고 느꼈던 상상력을 북돋아주었다. 하긴 좁은 작업실 책상에서 벗어나 둘레길을 걸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게다가 길 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저자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은 얼마나 기꺼울 것인가.

 

그는 지리산에 오고서야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친구 하나는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었는데 둘레길을 걸으면서 많이 호전됐다고 하니, 지리산 둘레길은 찾아오는 사람에게 값으로 환산되지 않는 많은 선물을 주는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의 800리(약 300킬로미터)를 둥글게 잇는 도보길이다. 현재 개방된 구간은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에서 경남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를 잇는 71킬로미터 5개 구간으로 옛길, 마을길, 숲길, 임도, 논두렁길, 강변길을 연결한 조용한 길이다. 저자는 각 구간을 마음, 나눔, 자아, 삶, 평온을 담는 길로 나누어 그만의 여행기를 그려가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과 아마존 조에족

 

시골 어디나 그렇겠지만 둘레길에도 대문이 닫힌 집이 별로 없다. 대문이 아예 없는 집도 있다. 담도 낮아 살짝 까치발을 하면 집 안이 훤히 보인다. 손때 묻은 연장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기도 하고, 파종을 하고 남은 작물들이 널려 있기도 한다.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마존의 눈물>을 보면 원시 부족인 조에족이 찾아온 낯선 외지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 것에 놀라게 된다. 담당 연출자는 그런 조에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 자신이 누굴 의심하거나 공격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미국의 어느 도시에 있는 주택가를 구경하면서 지나가다가 "Don't Loitering"란 팻말을 보았다. "시끄럽게 떠들지 마시오" 정도로 예상했지만 들고 있던 전자사전에 입력해본 결과 "어슬렁거리지 마시오"로 해석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떴던 기억이 난다.

 

아마존의 조에족이나 지리산 둘레길 주민들의 마음이야 말로 인간이 그렇게 추구하는 문명의 최고 발전 단계가 아닐까, 그들은 이미 선진국이 동경하는 발전된 미래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 가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 앉아 쉬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의 재미있는 표현대로, "더위를 식혀줄 바람과 그늘이 즐겁다면 '여그가 천국'"이지 싶다.

 

 

지금 걷는 한걸음이 행복한 이유

 

몇 시간을 걸어도 사람을 만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외롭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것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지만, 그 빈 공간과 멈춰버린 시간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게 된다. - 본문 가운데

 

가끔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둘레길 여행이 화제에 오르면 "지리산 둘레길에서 어느 구간이 가장 좋았어?"라거나 "왜 둘레길을 가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말문이 막힌다. 어느 곳이 제일 좋은지 생각하며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지금'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에 충실해야 하고, 길을 잃지 않고 잘 가는지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 몸이 신호를 보낼 때마다 욕심내지 않고 충분히 휴식도 취해야 한다.

 

걷기 여행을 비움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짐뿐만 아니라 일상의 잡념들을 받아주고 비워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도시의 삶은 나 자신과 마주할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내게 수없이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들, 분노·화·즐거움·감동·갈등을 정리하지 못한 채 방치해두고 만다. 걷는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자연과 스치며 긍정적인 힘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걷는 순간만큼은 방치된 나와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그런 시간은 지리산의 적막함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곳이 많다. 하지만 길을 걷다보면 이 적막함이 적막인지도 모른 채 땅을 내딛는다. 지리산의 고요함 덕분에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니 조용하다고 생각할 겨를이 들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이런 책도 안 읽어보고 처음 전남 남원시 주천면에서 길을 나섰던 나는 초입부터 가파른 등산길을 만나고 '둘레길이 이렇게 힘든 곳인가' 하고 잔뜩 겁을 집어 먹은 나머지 한 구간만 걸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만 참고 더 걸어가면 너른 들과 산길, 마을길, 국도, 제방길 등 다양한 길에서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지은이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둘레길의 첫 코스인 주천-운봉길을 거꾸로 운봉에서 주천으로 걸어보라고 권한다).   

 

어릴 적 시골에 친척집이 없어서 '전원일기'를 경험하지 못한 저자처럼 어린 시절의 한(?)을 풀고 싶거나, 어딘가로 다시 떠나고 싶을 때, 문 밖을 나서기 전까지의 두근거림과 빈 가슴으로 돌아올 기대, 그리고 오랜 시간 잃었던 상상력을 다시 찾고 싶다면 지리산 둘레길로 떠나보자. 더불어 돌아온 후엔 도보 여행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면 더욱 좋겠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고 부지런히 걸으며 정신을 집중하기, 소박하게 먹고 가진 것을 줄이기, 여행 중 받은 친절에 감사하고 이방인으로서 겸손해하기, 모든 것을 새롭게 보기…. 언젠간 멀리 길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내 삶의 자리에서 길을 걷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 몇 년 전부터 지리산에 댐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어 마을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이 반대해오고 있다고 한다. 엄천강, 용유담이 있는 금계-동강 지역에 댐이 생긴다면 지금의 지리산 둘레길은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4대강 개발에 댐까지. 자연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이제 깨달을 때도 됐지 않을까! 
* <지리산 둘레길 그리고 그리다>(고영일 쓰고 그림, 나름북스 펴냄, 2011년, 15000원)


지리산 둘레길 그리고 그리다 - 스케치가 있는 감성 걷기 여행

고영일 지음, 나름북스(2011)


태그:#지리산둘레길, #걷기여행, #고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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