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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29일 YWCA 대강당.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3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가슴에는 "진보 하나로"라고 적혀 있는 분홍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 창립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이다.

 

시민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학영 YMCA전국연맹 사무총장(59)은 이 대회를 통해 "생명과 평화, 정의와 같은 가치가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지 아니면 영구히 자본과 소수이익만을 위해 운영되는 나라를 만들지 결정하는 대회전(大回轉)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며 진보세력의 힘을 모으자고 호소했다.

 

그로부터 반년 동안 통합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 5월 말, 대전에서 만난 이학영 대표는 "대선주자들이 뛰기 시작하는 9월까지는 통합이 마무리 되어야 한다"며 "보수주의자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선거 때는 연합하고 누구하고나 손 잡는데"라고  말문을 열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차이'

 

- 진보진영의 통합을 이야기 하고 있다. 왜 '진보진영'이 대안인가?

"복지의 담론화는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정책으로 집행될 때 가능하다. 그러려면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사회에서 기존의 권력을 쥘 만한 두 정당이 있는데 그 정당들이 민중들이 바라는 만큼 삶의 안전망을 마련하고 사회시스템을 바꿔줄 수 있나?

역사이래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절대로 먼저 주지 않는다.

 

우리는 현대역사 속에서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 그 정당이 집권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 보나? 공동체를 중시하고 그런 논리로 세상을 운영하려는 집단, 우리들의 대표가 집권하고 지도자가 되지 않는 한 부와 권력은 절대로 국민들의 것이 되지 않는다,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를 지배하려는 세력이나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없는 집단에게 우리는 삼권분립, 의회정치라는 민주주의의 수단을 쥐어 줬다. 이 두 세력집단이 계속 교체집권해 왔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줬던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는 군소세력들에는 대중들의 기대치가 낮다. 이것이 한국사회정치가 갖고 있는 딜레마다."

 

- 사회운동, 복지운동을 해 왔다. 정치운동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회운동이 강해야 정치운동이 강해진다는 점에서 사회운동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 한국사회 정치구조는 사회운동보다 훨씬 후진적이다. 시민사회가 성장했으면 그만큼 의회에 반영되어서 진보세력이 다수당이어야 하는데 의회에선 10석도 못 가졌다.

 

사회성장속도와 반비례하고 그에 걸맞지 않은 정치의 병목현상, 후진현상 등을 고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발전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회혁명'을 이야기 했다면 지금은 '정치혁명'을 이야기해야 한다. 한나라당, 민주당 양당교체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없다. 한나라당을 적어도 제3당으로 격하시켜야 한국사회가 안정적으로 성장한다고 본다."

 

 

- 일단 힘은 되지 않더라도 2012년까지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2012년이 그 기회라고 생각하고 호기이다. 다시는 안 온다고 본다. 민중들의 진보에 대한 열망이 이렇게 올라온 적이 없다. 이때 진보세력이 그런 대중의 열망을 받아들여 정권을 바꿀 만큼 강력한 집단을 만들지 못하면 민중들은 진보세력에 실망할 것이다. 진보정당은 또다시 왜소해져서 기존 보수정당의 프레임에 쓸려갈 것이다.

 

이번 기회에 진보세력은 차이를 버리고 대중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세력으로 재편하자. 내 식구, 네 식구 키재기 하지 말고 세상에 대해서 변화를 바라는 마음을 총망라하자. 시민운동을 개량운동이라고 하지 말고 여성운동, 평화운동, 소수자운동, 복지운동까지 전부 함께 하도록 하자.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중심에 있으면서 다른 운동들까지 모두 망라하면 상당히 큰 정당이 될 수 있다. 한나라당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본다."

 

- '통합'에 원칙이 있는가?

"'우리하고 다르다, 우파다' 치부하면 어디 가서 정치세력을 구할 것인가? 지금은 나랑 약간 다른 몸도 붙여놓고 기본만 잘 잡고 가면 된다. 선장하고 기관사만 중심잡고 있으면 배는 제대로 간다. 일단 몸집을 키우고 대중들이 진보정당에 갖고 있는 편견을 없애면서 좀 더 유연하고 현실적인 당으로 거듭나야 집권을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함께 하겠다는 당들을 섞어놓으면 상상하지 못한 시너지가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분명하게 있지만 같은 부분을 먼저 확인하면서 다른 부분을 조율해 나가면 된다."

 

"노동운동은 내 인생의 동굴, 그래도 버텼다"

 

이 대표는 YMCA에서 활동하기 전, 지하운동, 노동운동을 거쳤다. 그 사이에 감옥도 두 번 다녀왔다.

 

"처음 경찰에 잡혀갔을 때 광주에서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는데 워낙 정치범들이 많다보니 해방구 같았다. 통방도 하고 본격적인 것은 아니지만 학습을 통해 세상에 대해 많이 얻어들었다. 그 때 지하철노조 정윤광 선배와 대학강사노조 김영곤 선배, 하재완 씨, 도예종씨 같은 인혁당(인민혁명당)으로 들어오신 분들이 내 옆방이었다. 그분들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에 대해 '그냥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첫 번째 출소했을 때 상경하여 봉제공장, 선반공장을 다니면서 노동운동을 히려 했다. 그러나 '노동'만 남고 '운동'은 요원해졌다. 봉제공장을 다닐 때는 그나마 노동자들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으나 경찰의 개입으로 해고당하고 새로 취직한 선반공장에서는 36시간을 일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노동강도로는 노동운동은커녕 인간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어떻게 살았나 싶다.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전망이 안 보이는 끝없는 터널, 아니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터널은 끝이라도 있기는 하지만 동굴은 끝이 막혀있지 않은가. 내 인생에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을 사귀어도 노동운동의 '노'자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도 '버티자'했다."

 

그러다가 70년대 말, 선배가 소개한 지하조직에 고심 끝에 들어가게 된다. 그 조직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였다. 그 안에서도 특히 전위대의 역할로 자금모금을 위해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의 자택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검거된다.

 

이 대표는 "나만 먼저 잡혀서 하루 이틀 버텼다. 다른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줘야 하니까 맞으면서도 거짓말을 했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원조회를 통해 전남대 학생회장 출신임을 확인한 경찰은 끈질겼다.

 

그러나 심증만 있을 뿐 확증이 없어 단순강도로 마무리 지었다. 이 대표는 "시골에서 올라온 놈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강도를 했다고 신문에 까지 났다"며 "그때 복역하고 서른 두 살에 출소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에 하지만 이창식 선배가 권한 아주 작은 시골, 순천 YMCA로 갔다"고 한다.

 

순천에서 맞은 6월 항쟁의 끝, "아파버렸다"

 

- 순천 YMCA, 첫 인상은 어땠나?

"유치원도 있고 시민상담도 하고 청년들 독서모임도 하더라. 대학생들 작은 모임도 있었고. '이게 무슨 운동이냐. 나는 세상을 뒤엎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한 달만 있다가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정이 들었다. 청년, 대학생들이 그냥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만 해도 세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들이 있었다. 그런 모임들을 이미 만들어서 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곳이 충분히 새로운 대중을 만날 수 있고 변화를 추구하는 근거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84년도 10월쯤 내려가서 눌러 앉았다. 당시에는 운동을 서울에서만 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밑바닥에서 차분하게 새로운 대중들을 변하게 하지 않은 이상 세상이 변하겠는가'라는 생각도 들고 사계절출판사에 다녔던 후배 김영종이 '지역에 내려가서 해보시오'라고 했던 말도 생각나고. "

 

- 당시 풍문에는 '엄청난 사람'이었을 것 같다. 어떤 활동을 했나?

"봉사클럽이었던 순천대YMCA클럽에서 책도 읽고 청년들과 독서클럽 조합을 만들어 해직 교사들 책 등 좋은 책들로 세상공부를 시켰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청년들을 '의식화'한 거다. 물론, 지역사회에서는 긴장을 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이 하나왔다'며 긴장을 하더라. 그래서 나도 조심하고 티나지 않게 했다.

 

87년까지 청년모임, 독서모임, 주부모임 등 그런 모임을 쭉 해나갔다. 주부들하고 세상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새로운 사람이 가니까 청년, 주부들은 좋아해주더라. 방학에는 수련회가서 분야별 세미나도 했다. 노동문제, 여성문제 등 각 분야별로 조금씩 모두 해설되어 있는, 임상택의 <한국경제초본>으로 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지식을 '넣어'줘도 잘 변하지 않는데 그 당시만 해도 책 한 권만 읽어도 대학생들의 인식이 바뀌는 게 있었다. 특히 '박정희정권의 성장정책이 박정희정권을 떠받치고 있다'라든가 '계속 성장해봐도 그 이익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을 거다. 상부의 부정부패로 이익은 상층에 머물러있을 것이다'라는 얘기하면 다들 분노했다. 단지 독재에 대한 반대보다도 사회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되어갔다. 그 무렵 서울에서 학생운동출신들이 내려오기도 하고 지역의 의식화된 청년들이 오기도 하고 해서 그룹이 커졌다."

 

 

- 그러다가 87년을 맞았다. 순천에서 맞이한 87년 6월 항쟁은 어떠했나?

"지역마다 그런 모임의 힘이 87년을 만들었다고 본다. 밑바닥에서부터 운동했던 친구들이 지역으로, 중소도시로 한두 명이라도 내려가서 그런 작업들을 하고 있었던 거다. 87년이 되니까 시위가 한 번도 없던 YMCA나 교회, 특히 교회청년들이 많이 일어났다. 이전에 있었던 여순사건 때문에 순천민들은 '사회저항의식을 가지면 큰일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순천도 시위가 한 번도 없던 곳인데 서울에서 6월 항쟁이 터지자 곧바로 시작되었다. 의식화했던 순천대 그룹들과  교회청년들이 함께 시내에 들어가서 퍼뜨렸다, 3·1운동처럼.  그 이후로 순천에서 '운동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이고 노동운동, 청년운동, 학생운동 등이 분야별로 조금씩 성장을 하게 된 것이었다.

 

세상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 온 나라가 열광적이었던 때다. 대학생들도 그 당시에 '민주혁명 며칠 전, 며칠 전'을 세면서, 혁명의 그날을 기대했다, 종교의 종말론처럼. 운동도 종말론적이었다. 6월 항쟁에서 이겨놓고 '87년 대선 때 단일후보 내서 민주세력이 집권하면 너희들, 군사정권은 끝이다'라며 기대했는데 참혹하게 분열돼서 실패로 끝났다.

난 충격으로 3, 4개월 몸이 아팠다.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어떻게 힘들던지, 이겨낼 수 없으니 아파 버렸다. 우리가 그렇게 고조된 분위기와 힘을 쥐고 있었는데 엉뚱한 군사정부가 힘을 쥐게 되었으니."

 

- 87년 이후, 어떻게 달라졌나?

"88년 지나고 89년 지나니 세상이 뭔가 달라졌더라. 그전만 해도 시위하면 시장상인들이 지지하고 도와줬는데 대중들이 다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찌되었건 선거에 의한 합법적 정권이 들어서니까 사람들이 '이제 되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운동권만 운동하고 다들 자기 생활로 돌아갔다.

 

서울에서는 여전히 중앙투쟁 지시가 내려오고, 내려올 때마다 학생들이 주요한 장소에 가서 플래카드 들고 시위를 했다. '아, 운동이 저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 YMCA에서는 이미 시민운동의 개념이 생겼다. 당시엔 그 개념이 생소했기 때문에 밖으로 얘기는 못했지만 '시민들을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YMCA시민을 자각하고 깨우치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들을 했다.

 

YMCA 간사가 되려면 논문을 써야하는데 <YMCA 시민운동론>이 내 논문의 제목이었다. '일상을 사는 시민들이 문제제기하기, 편지보내기, 정치인들에게 항의하기, 캠페인하기 등으로 자기 영역을 바꿀 수 있도록 YMCA가 앞장서야 한다'는 내용으로 논문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참여연대가 만들어서 펼치는 운동같은 것, 그야말로 시민운동이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우리동네 얘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전국적인 사안을 지역에서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이었지, 지역운동의 내용이 확실한 때가 아니었다."

 

잘 때도 칼 품고 자야하는 세상에 도움이 되려해

 

그러나 이 대표는 지역운동을 시작하지 못한 채, 88년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문학도였던 그는 "'글을 쓰려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운동을 하게 되었다. 마흔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도를 해보고 싶다. 안 하면 원이 될 것 같다. 내가 죽겠다. 나 좀 살려 달라"고 가족을 설득해서 YMCA에 사표를 내고 지리산 구례집으로 갔다.

 

그리고는 당시 그의 아내가 어렵게 사준 컴퓨터로 하루에 15시간 넘게 글을 썼다. 시가 두 군데 당선되고 단편소설도 당선되어 등단을 했다. 당선 상금으로 컴퓨터 값을 다 갚았다고 한다. 이후 지금의 1억 원 정도 되는 1500만원의 상금이 걸려 있던 장편소설을 써서 '당선이 되면 집에다 생활비를 주고 전업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는 한순간에 작가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당시 이 대표의 작품을 심사위원이었던 김원일 선생이 당선작으로 정해놓았는데 6·25전쟁을 다룬 것이라 내용시비가 있었다. 결국, 사장의 반대로 탈락되었다. 게다가 당시는 신호수, 이내창, 이철규 등이 테러, 암살당할 만큼 험악한 때였다. 잘 때도 칼을 곁에 놓고 잘 만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깨달았다. '작은 힘이라도 동시대 사람들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 지리산에서 나올 때가 몇 년도였나?

"89년이었다. '우리 동네를 공부하자'는 기조로 89년도에 교수들, 운동하던 후배들 몇 명과 함께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회를 만들었다. 90년도엔 연구소를 만들고 <지역과 전망>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11호까지 발행을 했는데 전남동부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취재해서 책으로 만든 것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투쟁결과를 실었다. 그 당시만 해도 드문 일이었던 시장인터뷰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주민들 인터뷰, 지역통계 등도 담았다.

 

당시에만 해도 지방자치시대가 아니니까 지역문제를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석산 파괴현장의 피해조사, 택지공사 저수지 매립반대 등 우리가 지역 민원거리를 일부러 찾아 다녔다. 제일 유명한 것이 '순천만 갯벌골재채취 반대운동'이다. 저수지 매립반대, 순천만 지키기 운동을 주요 과제로 삼아서 15년 걸려 성공을 했다.

 

조사하고 반대하고 캠페인을 해도 안 되니까 순천만에서 하는 민간축제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3년을 하니 전남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오는 축제가 되었다. 전남10대 축제로 선정되어서 순천시가 받아간 사업이다. 순천만 갯벌이 순천 최고의 상품이 되었다. 시민운동의 산물이 되었던 거다.

 

- 91년은 지방자치 원년이었다. 지역운동을 하자면 지방선거도 모른 척 할 수 없었을텐데?

"당시에는 '지방자치는 개량주의'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전민련 후배들에게 '지방자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보수세력에게 빼앗긴다'고 했더니 전민련에서 나를 제명하더라. 그래도 했다. 시의원선거를 도와 당선시켰다. 그 다음에 그 시의원이 욕심이 과해 시장후보로 나가서 선거에 패하고 분열되었다. 그래도 그 후로 전남동부지역이 지역운동이 세졌다. 그래서 이번에 전남 순천에서 민주노동당 김선동씨가 국회의원이 된 것에도 한몫 했다고 본다. 그렇게 2003년도까지 그 지역에서 자잘한 일 많이 하면서 살다가 YMCA연맹사무총장이 되었다."

 

- 노무현 정부 반 이명박 정부 반, 8년을 사무총장으로 일했는데

"온탕, 냉탕을 다 겪은 거다.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가 고 노무현씨가 막 당선되었을 때였다. 대중의 참여로 노무현씨가 당선되었고 거기에 YMCA도 한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힘으로 우리도 해보자'고 했다. YMCA조직이 보수온건조직인데 현재대로 정체되면 역동성이 사라질 것 같아서 각종 연대사업에 참여하는 등 내가 의도적으로 강한 모션을 했다.

 

이것이 회원들과 젊은 실무자들에게는 역동성으로 기여 했을 거고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굉장히 불편하게 보였을 거다. 중요한 것은 이런 활동을 통해 YMCA가 세상으로의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거다. YMCA는 전국적인 큰 조직이다. 이런 YMCA가 지지하는 것이라면 양심있는 사람들이 '저건 괜찮은 거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역할을 YMCA가 해주면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임기 막바지에 시민정치운동이라는 개념이 많이 내부에서 얘기를 했다. 시민참여 선거운동을 해보니까 깨어있는 시민만이 올바른 정치판단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겠더라. 복지국가 진보대통합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도 YMCA 내부에 이런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에도 후배들에게 'YMCA 그만두면 시민정치운동으로 복지체계를 열심히 만들어서 너희들이 자식걱정, 교육걱정 안 하고 열심히 시민운동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내가 그런 역할을 진짜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회가 개인에게 모든 것을 전가해 '네가 알아서 살라'고 하면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국가공동체, 국민공동체가 기본적으로 약자들이 탈락하지 않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정의롭게 살라, 열심히 살라'는 것이 가능하지,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탈락하는 구조를 놔두고 우리가 어떻게 같은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제2의 인생의 운동으로, 나는 시민운동에서 시민정치운동영역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 거다.

 

 

이 대표는 '2012년에 좋은 정부 만들면 제 역할을 다 했다고 하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태어나 '겉멋이 들어' 입학한 전남대 학생 시절, 아무 이유없이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폭력을 당하며 밤샘 조사를 받고 새벽에 방면돼서 혼자 걸어 나오는데 그때 세상이 제대로 보이더란다. 그래서 학생회장을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경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옥살이도 했다. 40년 세월 운동을 해온 이 대표는 20대 젊은이였던 때가 그리울 만도 한데 '그때로 돌아가면 못 견딜 것 같다'고 했다. "70년대는 희망도 없는 시대, 통제된 사회였다. 그런데 요즘에 또다시 그런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속지 말자고 한다. '경제성장 시키자, 재벌과 (보수)정치인들이 잘되면 다 잘 살 거다'라는 말을 믿고 따라왔는데 그것이 아니란다.  이것이 이 대표가 평생 살면서 깨달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했다. "스스로 운명을 헤쳐 나가려고 고민하지 마라.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이 세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올바른 정치 없이 올바른 미래, 올바른 삶은 불가능하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이 대표는 인생 선배로서 따끔한 충고를 남겼다.   

 


태그:#노동세상, #이학영, #시민회의, #정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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