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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하고 알바한다고 했지? 의류공장에서 같이 일할래? 기숙사도 있어."
"기숙사요? 우와. 좋죠."

그렇다. 집에 손을 벌릴 수도, 벌릴 것도 없는 나는 대학교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짐을 메고, 가방을 끌고 의류공장을 찾아갔다.

면접을 본다면서 찾아간 건물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와 똑같이 짐 가방을 끌고 온 수많은 청년들. 아 생각났다. TV 고발프로그램에서 자주 봤던 장면들. 자신을 '마스터플래너'라고 소개하며 한 여성이 다가왔다. 면접이라는 이름으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다단계하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랬다. 난 그 말로만 듣던 다단계에 온 것이다. 당장 나가고 싶었으나 왠지 모를 이 폐쇄적 공간에 대한 불안함과 소개 해준 사람 입장이 걱정돼 그러지 못했다.

이성을 되찾고 보니 그곳에 있던 친구들은 대다수가 내 또래였다. 사연은 구구절절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취업이 되지 않아서, 잔인하게도 꿈을 위해서까지···.  4일에 걸쳐 진행된 강의란 이름의 세뇌는, 돈에 대한 간절함을 간직한 사람들의 다단계에 대한 불안한 벽을 허물기에 충분했다.

기숙사란 이름으로 된 어느 빌라의 꼭대기 층 자그마한 집에서는 남녀가 함께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나도 그곳에서 며칠 생활을 했는데, 감시가 심했다. 내 휴대폰을 몰래 검사하기도 하고, 화장실을 갈 때 빼고는 혼자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나를 외부와 차단시켰다. 그리고 집에서 온 연락에는 "처음에 말했던 의류공장에서 일한다고 말해"라며 거짓말을 강요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세뇌와 감금과 비슷한 생활을 통해 그 주의 교육생들(매주 새로운 교육생을 받는다고 했다) 50여 명 중 나를 포함한 3~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단계의 개미지옥에 빠져들었다. 방학기간엔 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함께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내 눈엔 그냥 미친 세상으로 보였다.

4320원이라는 최저임금으로 이루어지는 알바로는 등록금이라는 커다란 벽을 넘기에 벅찬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짧으면 반년, 적어도 1년만 고생하면 월수입 천만 원씩 버는 게 가능하다는 다단계 회사의 사탕발림에 넘어가게 된다.

"성공해서 학교에 좋은 차 끌고 가면 후배들 보기에도 좋지 않겠어?"라는 말에 누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겠는가. 그런 성공이란 환상과 무거운 현실에서 이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다단계 늪에서 빠져나왔지만, 창문도 없는 고시원으로

대한통운 택배노동장 최학렬씨가 무거운 박스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자료사진)
 대한통운 택배노동장 최학렬씨가 무거운 박스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자료사진)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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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동안 교육을 받고 난 다단계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온전한 곳에서 일 한다고 집에 거짓말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고시원을 찾았다. 내 나이 25살, 장남으로서의 신뢰를 저버릴 자신은 없었다. 일단 '고시촌은 신림'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무작정 신림역으로 갔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저렴한 곳을 찾았다. 창문이 없는 21만 원짜리 방. 방 상태야 어쨌든 잘 곳은 구했고 이젠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다. 집에서 용돈을 받을 순 없었기에 급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죽음의 알바'라고 불리는 '택배 야간상하차'였다. 밤새도록 전국에서 모인 택배를 각 서울 권역별로 나누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아저씨들로 가득할 거로 생각하고 찾아간 그곳에는 의외로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많았다. 대부분 용돈 벌이를 위해 온 모양이었다. 밤새 일을 마치고 해가 뜨고서야 창문없는 고시원 방에 다시 누울 수 있었다. 그날 오전에 번 돈은 바로 입금된다. 오후만 조금 넘으면 돈이 들어왔다. 그러나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추운 겨울 흔한 길가의 어묵 하나조차 나에겐 사치였다. 친구들과 술자리? 언감생심이다. 택배회사에서 쌀 포대, 사과 상자 수십 개를 옮겨야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함께 할 '회비' 1~2만 원을 벌 수 있다.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했다. 한 번 다녀오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는데 그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이대론 책도 한 장 펼쳐보지 못한 채 휴학기간을 아깝게 보낼 것만 같았다. 나름 머리를 쓴다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다. 야간 아르바이트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 시간에 틈틈이 책이라도 보자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계산대 앞에 앉아 토익 책을 펼쳐놓고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손님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면 왠지 모를 창피함까지 들었다. 집에 내려갈까···. 수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신 터에 어머님의 기대마저 무너뜨릴 순 없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고 난 계속 거짓말을 했다.

"네. 회사 사람들이 잘 챙겨줘요. 오늘은 술도 사줬는 걸요."

없는 거짓말로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린 후 통화를 끊고 편의점으로 터벅터벅 들어가는 매일이었다. 어느새 나에게도 빚이 생겼다. 학자금, 생활비 대출, 그리고 학교를 다니면서 조금씩 쌓여버린 카드값들. 흔히 언론에 나오는 "학자금 대출 1200만 원"보다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아직 두 학기가 너 남은 현재로서는 이 금액이 얼마나 늘어날지 모른다. 너무 큰 짐이다.

반값등록금으로 해결? 그게 다가 아니다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12일차 대학생 촛불집회가 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서울종합예술원 조용훈 교수와 래퍼 김디지(본명 김원종) 교수의 공연에 촛불을 높이 들며 환호하고 있다.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12일차 대학생 촛불집회가 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서울종합예술원 조용훈 교수와 래퍼 김디지(본명 김원종) 교수의 공연에 촛불을 높이 들며 환호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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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등록금만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다. 집을 떠나서 학교를 다니는 나와 같은 학생들은 먹고 자는 문제를 대부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현실이다. 만약에, 약속대로 반값등록금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알바를 그만둘 수 있는 현실은 아니란 것이다.

나는 자취방 방세, 책값, 밥값, 교통비를 위해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의식주를 해결하고 나서야 그 흔한 극장에 가서 영화를 한 편 보고, 술도 마실 수 있다. 연애? 어학연수? 나에겐 사치다. 나는 내 어깨 위에 놓인 이런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휴학을 하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위에는 아버지 회사에서 대학 학자금을 지원해주는 친구들이 많다. 참 부럽다. 부모님 탓을 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한순간 원망하기도 한다. 불효자다. 나는 시간이 나면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고 구호도 외치려 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등록금을 지원받는 친구들은 광화문으로 나오지 않고 학원, 도서관으로 간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 경쟁사회에서 또 뒤처진다. 그래도 난 광화문으로 간다. 광화문으로 나온 수많은 학생들을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웃기지 마라. 그 많은 학생들은 귀중한 시간 포기하면서 나와서 생존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이다. 지난 10일 청계광장 반값등록금 집회 때는 한 고등학생이 올라와서 눈물을 보였다. 내 동생과 오버랩됐다. 동생도 얼마 전 영화관 알바를 시작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그러나 고통은 싫다"

이제 나는 서울 생활을 접으려 한다. 이를 악물고 서울에 남아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고 배우려했던 내 소박한 희망을 말이다. 고작 알바로는 등록금을 모으기는커녕 기본적 의식주에 들어가는 비용대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다행인지 집에서는 나의 이러한 서울 생활을 잘 모른다.

오랜만에 아들 왔다고 반겨하실 어머니 얼굴을 생각하니 이 나이 되도록 집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죄송스럽다. 어머니는 다른 집 자식만큼 뒷바라지 못해준다고 미안해하실 거다. 돈 때문에 자식에게 미안한 집안이 돼 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생활로 휴학기간의 반을 보내버린 현재다. 남은 반은 아마 돈만 보고 살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남은 두 학기 등록금에, 방세에 용돈까지... 덕분에 온 머리에 새치만 신이 났다.

제발, 매주 월요일에 확인하는 로또 복권만이 희망이 되지 않길 바란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교과부 모 차관이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한다고 했단다. 짧게 답변하고 싶다.

"알겠습니다. 미래에 밑거름이 될 고생은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통은 싫습니다."


태그:#반값등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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