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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반일 전적지’기념비가 있는 봉오저수지 입구. 일대가 모두 전적지이겠지만,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계곡과 마을은 물에 잠겼더군요. 서운했습니다.
 ‘봉오동 반일 전적지’기념비가 있는 봉오저수지 입구. 일대가 모두 전적지이겠지만,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계곡과 마을은 물에 잠겼더군요. 서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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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유적과 함께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여섯째 날(1월 15일). 오전 8시 45분 연길(옌지)을 출발, 항일시인 윤동주 묘소와 '3·13 반일의사 묘역'을 참배하고 국경도시 도문(투먼)으로 이동하여 '봉오동 전적지' 입구에 도착하니 시계는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박영희 시인은 '봉오동 전적지' 답사로 '2011 겨울 만주기행'은 사실상 끝난다고 했다. 일정표에 있으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들으니까 비 오는 날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렸을 때처럼 서운했다. 그렇다고 마냥 서운한 것만은 아니었다. 뭔가 이뤄냈다는 성취감에 뿌듯하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칼날처럼 예리한 찬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굴을 감싸며 달려들었다. 솔개 보고 놀란 암탉이 병아리 품듯 카메라를 가슴에 안았다. 마스크에 닿은 입김이 얼음가루가 될 정도로 추운 날에는 셔터가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볼때기가 얼얼했다. 차가운 공기에 식도도 놀랐는지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버스 창으로 들어오는 따사한 햇볕만 믿고 머플러와 방한모를 챙기지 않은 경솔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공기가 맑고 바람도 세차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문시 인민정부가 세운 ‘봉오동 5구구간대주둔지’ 기념비. 봉오동 전적지 가는 길 오른편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도문시 인민정부가 세운 ‘봉오동 5구구간대주둔지’ 기념비. 봉오동 전적지 가는 길 오른편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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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니 '봉오동 5구구간 대주둔지'가 적힌 기념비 두 개가 장승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비문 내용은 같은데 하나는 한글, 하나는 한자로 적혀 있었다. 봉오동 유적지를 찾는 방문객 대부분이 한국인, 아니면 조선족 동포라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앞사람 발자국이 깊이 남을 정도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다른 사람 발자국이 없는 걸 보니 우리가 이날의 첫 방문객인 모양이었다. 일행이 20명이어서 눈 밟는 소리도 '뽀드득, 빠드득··' 요란했다. '뽀드득' 소리가 재미있으련만,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다.

'봉오동 반일 전적지' 기념비 앞에서

봉오동 반일전적지 기념비.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도문시민이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봉오저수지가 있습니다.
 봉오동 반일전적지 기념비.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도문시민이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봉오저수지가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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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들어가자 '봉오동 반일전적지'를 음각으로 새겨놓은 기념비가 보였다. 봉오동 유적지도 두 번째 방문이지만, 새롭게 다가왔다. 기념비 옆에 심어진 소나무가 눈비를 막아주고 있어 왕릉을 보호한다는 석인(石人)처럼 느껴졌다.

박 시인이 앞으로 나와 "이곳이 바로 홍범도 장군이 만주 독립운동 전투에서 최초로 승전보를 전했던 '봉오동전투'(1920년 6월7일) 전적지입니다."라고 말했다. 일행들 얼굴빛이 달라졌다. 여성 일행 한 분은 "독립군들은 겨울의 혹한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궁금하다"며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박 시인은 "홍범도 장군은 40여 차례나 함경도를 드나들며 부근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면서 골짜기가 깊어 독립군이 매복하기 좋고 전투를 치르기 유리한 봉오동으로 유인했지요."라며 만주를 오가며 배웠다는 <홍범도 찬가>를 소개했다. 

홍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 적군 가는 길에는 눈비가 쏟아진다/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왜적 군대가 막 쓰러진다/(중략) 왜적 놈이 게다짝 물에 던지고/ 동해 부산 건너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왜적 군대가 막 쓰러진다.

박 시인은 만주를 떠돌며 배운 노래 중에는 곡이 없는 노래가 많았는데, 1910년대 대표적인 노래였던 <신독립군가><봉기가><최후의 결전> 등이라고 말했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조선에 떠돌던 <아리랑>도 대부분 곡이 없었다고. 

일행은 기념비 앞에서 홍범도 장군의 높은 기개와 뜻을 되새기고 계승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묵념을 올렸다. 마지막 방문지여서 그런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묵념을 마친 일행은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눈 쌓인 산길을 따라 전투지였던 저수지 쪽으로 올라갔다.

'봉오동 전적지'였던 '봉오저수지'에서

꽁꽁 얼어붙은 봉오저수지. 가물가물 보이는 끄트머리 능선을 넘어가면 두만강이라고 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봉오저수지. 가물가물 보이는 끄트머리 능선을 넘어가면 두만강이라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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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낮은 산들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봉오 저수지'는 꽁꽁 얼어 있었다. 여름엔 거울처럼 맑았던 저수지는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쌓인 눈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잔잔한 운해(雲海) 같기도 하고, 하얀 목화솜을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햇볕이 반사되어 저수지 바닥을 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저수지가 여름보다 더 넓게 보였다. 박 시인이 저수지를 감싸고 있는 끄트머리 산줄기를 넘어가면 두만강이라고 했다. 두만강 얘기를 듣는 순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봉오동 첫 마을 '하촌'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마촌'과 '태촌'이 작은 내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며 조금 더 올라가면 '박촌'과 '조촌'이, 그곳에서 '호박골' 어귀까지 들어가면 '강촌'과 '호박골' 마을이 역시 냇물을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호박골에서 '상촌' 사이에는 마을이 없고, 동남향으로 뻗은 골짜기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일광산(398m)은 높지는 않지만, 천연요새로 홍범도 최진동, 안무 장군이 지휘하던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가 일본군 야스카와 부대를 섬멸했던 전적지란다.

당시엔 봉오동 골짜기에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살았다고. 그런데 전투에 패하고 보복에 나선 일본군들이 마을을 불사르고 주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후 해가 갈수록 줄었고, 80년대 중반 도문시 상수원을 공급하는 저수지 공사 과정에서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역사의 현장, '봉오동 전적지'에서 듣는 홍범도 이야기

봉오골 반일 전적지 기념비. 기념비에는 ‘봉오골’, 안내석에는 ‘봉오동’이라 적고 있어 처음엔 헷갈렸습니다. 의미는 같지만...
 봉오골 반일 전적지 기념비. 기념비에는 ‘봉오골’, 안내석에는 ‘봉오동’이라 적고 있어 처음엔 헷갈렸습니다. 의미는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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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과 함께(가운데가 홍범도 장군). ‘신출귀몰하다’는 일본군들 입에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부하들과 함께(가운데가 홍범도 장군). ‘신출귀몰하다’는 일본군들 입에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 홍범도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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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인은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1868~1943)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를,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잃고, 노동자 생활을 하다 포수가 되고, 장군이 되어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1921년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카자흐스탄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하기까지 과정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만주 독립운동사에 많은 장군이 등장하지요. 그중 홍범도 장군은 특출한 분입니다. 첫째는 한글을 몰랐습니다. 두 번째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고, 세 번째 직업이 사냥해서 먹고 사는 포수였습니다. 네 번째는 '노가다'였죠. 부모 유산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여타 사례와 달리 당신 스스로 막일을 해서 번 돈으로 의병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해서 무장독립운동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홍 장군은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가 머뭅니다. 거기에서 뭘 했느냐? 2년 반 동안 스님생활을 하면서 한글도 깨우칩니다. 글을 배운 홍 장군은 나이를 속이고 나팔수로 군에 들어가 결국 신출귀몰한 장군이 되지요. 홍범도 장군이 남긴 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 번 읊어보겠습니다.

'내가 어디 좌익을 택했나요? 조선을 떠나 만주에서 처음 찾아간 곳이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어서 그렇게 된 것뿐이오. 나는 좌도 우도 모르오. 그냥 일본놈이 꼴 보기 싫어서 원수 갚겠다고 싸웠을 뿐이오.' 

이 말이 전붑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좌진 장군이랑 이범석 장군이랑 연해주에 갔다가 두 분은 돌아오는데 홍 장군은 러시아로 들어가 레닌을 만나고 공산당에 입당합니다. 홍 장군은 1937년 러시아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말년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국립극장 청소부로 일하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한 때 한국 정부가 홍 장군 유해를 반환하려고 했으나 카자흐스탄 동포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단다. 만에 하나 장군의 유해를 가져가면 한국을 폭파해버리겠다며 반대했을 정도로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동포들의 우상이자 힘이었다고 한다.

봉오동 전적지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12시 45분이었다. 버스에 올라서야 허기를 느꼈다. 도문 시내에 있는 고려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은 우리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와 연결된 '도문대교'로 이동했다. 시계는 오후 2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홍범도장군, #봉오동전투, #항일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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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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