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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생의 학력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치러지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등교와 시험을 거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자료사진)
 초중고생의 학력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치러지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등교와 시험을 거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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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ㄱ고 1학년 상진(가명·17)이를 만난 건 평일 오후 10시 30분이었다. "원래 야자가 11시까지였는데 교육청에서 하지 말래서 10시까지만 해요." 상진이는 주중엔 야자를 하고 주말엔 수학 과외와 영어 학원에 간다. 귀가하면 오후 11시. 오전 2시에 잠들고 6시경에 일어난다. 평균 수면이 4~5시간이다.

부천시 ㄴ고 2학년 석린(가명·18)이는 주말 오후에 만났다. 석린이는 오후 10시까지 야자를 하고 집에 돌아와 예습·복습을 하거나 잔다. 역시 6시에 일어난다. 중학생과 달리, 고등학생의 야자와 과도하게 적은 수면시간은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되었다. 올해부터 경기도교육청은 강제야자를 금하겠다고 했지만 부천시 내 22개 고교 중 17곳이 여전히 강제야자를 하고 있다.

서울시 ㄷ고 3학년 도원(가명·19)이는 평일 저녁에 만났다. 6시까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2~3시간 정도 자습을 한다. 나머지 시간엔 학생회 일과 청소년단체 '희망' 활동을 하고 있다. 며칠 전 시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관련 순회공청회를 치렀고, 이어 5·28 청소년 요구대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활동도 즐겁고 입시 스트레스를 예전보다 덜 받는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도원이의 경우를 '적용 가능한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도원이의 성적은 전교 상위권이었다. 다만 그가 개인이 아닌 모든 학생들의 입시 고통을 덜고 싶다고 생각하는 점이 희망이었다.

상진이는 입학하고 1, 2주 지나자마자 4월 중간고사를 대비해야 했다. 중학 3학년 때 죽어라 고교과정을 공부해 두지 않았다면 못 따라갔을 거다. 중학 때와는 난이도가 확연히 다르다. 하루에 2~3시간은 꾸준히 해야 할 분량으로 학교, 학원 숙제가 주어진다. 수행평가 기간엔 더하다. 과목에 따라 시험일 수도 있고 UCC 제작일 수도, 오답노트일 수도 있다. 미리 예습 등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소화하기 어려운 양이다. 학습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1점이 석차를 가르니 빠짐없이 잘 해야 한다.

"요즘은 내신이 중요하잖아요. 수행평가 감점되면 큰일나요. 또 입학사정관제나 독서인증제 같은 거 생겨서 교내경시대회도 만들고 그러는데 거기서 상장 하나 받느냐 못 받느냐가 엄청 신경 쓰여요. 상대평가에 대한 부담이요? 크죠. 친구보다 잘해야 잘하는 거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친구가 더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서로 경계하는 친구들도 되게 많고, 자기가 공부하기 싫을 땐 친구도 방해하고."

한편 격차는 공고해진다. 대개 선행학습을 꾸준히 해온 중학교 상위권들이 그대로 고등학교 상위권이 된다. 간혹 '잠 안 자고 하루 한 끼만 먹고 공부에 올인해 성적을 휙 올리는 독종'도 극소수 있으나, 대개 비슷한 위치다. 5살 때부터 영어 선행학습을 한 도원이는 고교 성적엔 질과 양이 모두 필요하다고 했다.

"전 초등학교 때 실력으로 중학 때 먹고 중학 때 한 거로 고교 때 먹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초등 때부터 공부해온 애랑 안한 애들은 근본 차이가 나요. 그런 건 양으로 해결이 안 돼요. 그런데 고교 수학은 양도 필요해요. 엄청 많이 풀어야 해요. 미리 선행학습 해서 안정권에 들어서려면 중학교 때 4배는 공부해야 해요. 거기에 내신까지 하려면 장난 아니죠."

쉼없이 공부하고 쉼없이 낙오한다

도원이는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의 '관리'에 따라 새벽 2,3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주요 과목 학원은 다 다녔다. 평균 4~5개씩 학원과 과외를 했다. 스스로도 초등학생 때부터 너무 바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평가가 늘어나고 이기기 위해 미술 한 과목마저 다 챙겨야 하는 지금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더 바쁘고 힘든 것 같다고 했다.

올라설 수 없다 해도 학생들은 계속 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제도권 안에 있을 수 없다.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고교 1학년을 기점으로 걸러져 나간다. 포기하고 자거나 아예 자퇴를 하기도 한다. 많은 학교에서는 한 반에 한두 명씩은 있다. '공부 못 하는' 자는 아이들을 굳이 힘들여 깨우지 않는 선생님도 있다.

꾸준한 상위권도 실패와 낙오를 피할 수는 없다. 상진이는 외고를 가고 싶었으나 비평준화인 지금 학교에 진학했고, 석린이는 비평준화나 자사고를 가고 싶었으나 지금의 평준화 고교에 왔다. 둘 다 이때 큰 좌절감을 겪었다고 했다. "난 늦었을 수도 있겠다. (외고·특목고 간) 딴 애들은 앞서 간 거 같다는 느낌 받았어요." 석린이는 1학년 모의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음에도 '나는 별거 아니었다'고 좌절했다.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불안은 시험이 있는 한 계속된다. 누군가는 떨어져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중간·기말 외에도 전국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와 전국연합학력평가 등 수능대비 모의고사를 연 4~6회 본다. 수행평가까지 합하면 한 달에 2~3회는 시험을 보는 것 같다고 상진이는 말했다. 학교별로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3년 내내 '시험 모드'인 것은 다르지 않다. 여기에 일제고사까지 시행하는 데는 고교등급제와 연관이 있다. 학교별 성적이 공시되기 때문이다. '성적우수자'를 끌어오려는 학교 간의 경쟁을 학생이 대리하는 셈이다.

'시험 모드'에서 비교는 노골적이 될 수밖에 없다. 등수는 '무늬만 비공개'다. 선생님들이 성적을 간접적으로 밝히거나, 성적 확인서를 반 아이들에게 돌린다. 계속 평가를 받고 자기 위치를 확인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견준다.

석린이의 학교는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별도의 학습실을 개방하고 있다. 개인 사물함과 냉난방 등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누가 이곳을 이용하는지에도 아이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등수의 혜택'은 이렇게 아이들에게 체화된다.  그래도 경쟁을 위한 학습과 등수가 주는 스트레스를 아이들은 말하지 않는다.

"다들 안으로 삭여요. 못 풀어요. 암묵적으로 공부에 관련된 얘길 안 해요. 공부가 주제가 되는 것조차 짜증이 나는 거거든요. 경쟁심도 중학교 때는 유치하게 너 몇등 나 몇등 하면서 싸우지만 고등학생 쯤 되면 티를 안 내요. 그냥 미묘한 신경전이 있죠."

도원이는 놀고 싶을 때 자퇴한 친구들이나 그냥 좋은 대학에 얽매이지 않고 '노는' 동창들을 불러 논다. 학교 친구들은 '서로 미안해서' 못 부른다. 억눌린 스트레스는 어딘가에서는 터지기 마련이다. 자살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바로 제 윗 선배 자살했어요. 성적도 1등이었는데. 시도하는 애들도 꽤 있어요. 해마다 한 명씩 자살한다는 얘긴 들려요. 진짠지는 모르죠. 학교에서 얘기 안 하니까. 그래도 얘기는 항상 있어요."(도원)

"카이스트 자살 사건에 공감할 수 없어"

2008년 4월 19일 열린 학교자율화 반대 청소년 촛불문화제 전시공간에는 청소년들이 직접 정부에 '한 마디'씩 적어넣었다.
 2008년 4월 19일 열린 학교자율화 반대 청소년 촛불문화제 전시공간에는 청소년들이 직접 정부에 '한 마디'씩 적어넣었다.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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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진이의 학교생활은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없다. 우수한 성적에 친구들과 사이도 좋고, 반장에 동아리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러나 상진이가 학교를 좋아하는지는 의문이다.

"지금 학교에 좀 잘못 온 거 같기도 해요. 지금 입시엔 수시 비율이 높아졌잖아요. 다른 학교(평준화)였으면 전교 10등 안에서 놀았을 텐데 여긴 너무 어려워서…  저희 전교 1등이 평균점수가 92점이에요. 학교가 공부하는 분위기니까 성적 잘 잡아줄 거 같아서 여길 왔는데, 막상 내신이 안 나오니까 좀 그래요." 

상진이가 느끼는 시험 스트레스는 70%다.

"저 나온 중학교도 못하는 학교 아니라 애들 수준 다 높았는데, 여긴 더 열심히 하는 거 같아요. 일단 좋든 싫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더 생겨요. 솔직히 우리나라가 학벌사회잖아요. 대학이 눈 앞에 보이니까 성적 떨어질까 봐 부담 많죠. 커닝하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들어요. 딴 거 다 풀고 모르는 거 한 문제 남았을 때. 하나라도 안 풀리면 불안하거든요."

상진이는 지난 중간고사에서 반 석차 1등을 했다. 그러나 전교 석차가 20등이라는 것이 초조하다.

"국어에서 망했어요. 25개 중에서 헛갈린 문제 3개를 다 틀렸어요. 진짜 많이 틀린 거예요." 

석린이는 새벽 1시까지 공부하는 게 힘들어서 지난해 말 학원을 끊었지만,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서는 다시 등록할지 고민하고 있다.

안으로 체화된 경쟁 스트레스는 무기력과 냉소의 양분이 된다. 상진이와 석린이는 카이스트 자살 사건에 공감할 수 없다고 했다.

"전 솔직히 자살한 사람이요, 이해가 안 가요. 좋은 대학 갔잖아요. 자기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갔는데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 점수 안 나오고 그런다고 여태껏 했던 그런 노력이 다 있는데 자살하는 건… 안타깝긴 한데 제 생각엔 그 학생이 한심하단 생각 들어요. 지금 고등학생들 보면 좋은 대학 가려고 열심히 하는 건데…."

도원이의 이야기에서 이러한 반응의 근원을 유추할 수 있다.

"다들 고민하거나 혼란을 겪는 걸 싫어하거든요. '이거 생각하면 공부 안 될 거 같아...'이렇게 차단해요. 이런 일(학생 자살)은 항상 있었잖아요. 저도 어릴 때 공부해야 한다고 신경 끄고 차단했어요."

무기력은 학생 스스로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추진하는 순회공청회 자리에서도 학생들이 너무 말 안 하는 게 아쉽죠. 학생은 1, 2분 얘기하고 나머지는 학부모 선생님들이 다 얘기하고… 학생들 자체가 바꿀 생각이 없는 거 같고… 선생님이나 학부모가 그런 생각을 주입하거든요. 제가 공청회나 인권조례 같은 거 활동하면 선생님들도 많이들 동의하세요. 그런데 '그래 잘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어쩔 건데?' 식이에요. 공청회 홍보해도 1500명 중 50명도 안 될 걸요. 안 될 거 알면서도 혹시나 고민하는 애들 있을테니 준비하지만 너무 전반 의식 자체가 그래서… 그런데 준비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나 하는 회의가 들 정도예요."

"차라리 아무 것도 없으면 행복할 거 같아요"

상진이의 장래희망은 딱히 없다.

"그냥 돈을 좀 많이 벌어서 나중에 편하게 살고 싶어요. 직업이 수단이 돼서 솔직히 저도 안타깝긴 한데 제 현실 입장에선 그래요."

석린이는 반도체 계열 연구자나 토스트 가게 주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꿈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석린이의 행복지수는 현재 10점 중 2점이다.

"행복해지려면… 뭐가 있어야 한다기보단, 차라리 아무 것도 없으면 행복할 거 같아요. 꼭 해야 한다는 거든 뭐든…."

도원이가 '희망' 활동을 하는 이유는 한국의 교육정책을 바꾸고 싶다는 장래의 목표 때문이다.

"길이 너무 없어요. 다른 길은 없고 있는 길도 좁은데 사람은 많으니 경쟁이 심해질 수밖에 없죠. 중학교 때 고민 되게 많이 했어요.  저도 공부하면서 느낀 건데 스스로 동기부여가 될 때 결과도 질적으로 차이가 나더라고요. 학교가 그런 걸 심어주면 학생들도 많이 바뀔 거 같아요. 직업에 소명의식도 가지고. 지금은 너무 경쟁이 과열돼 있잖아요. 일단은 외교관이 돼서 여러 나라들 보고 돌아와서 궁극적으로 한국 교육을 바꾸는 게 꿈이에요."

그런 그 역시 당장은 '현실적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다고 사회 모두가 말한다. 이들에게 선뜻 다른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것은 비단 정책의 부재에만 기인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이 학생들은 모두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80%들의 목소리는 이번엔 듣지 못했다. 더 아플 80%의 학생들이 말해줄 현실은 더 의미심장할 것이다. 그들이 목소리를 낼 창구가 더없이 적은 것도 그 일부이리라. 한편으로 우리 사회의 서열 경쟁이 그 창구를 더욱 틀어막는 바윗돌임을, 도원이의 말에서 다시금 인식할 수 있었다.

"지금 제 성적이 중하위권이었으면 지금처럼 활발하게 활동하거나 얘기 못했을 거 같아요. 사람들 편견도 있고, 저 자신도 '성적이 안 되는데 내 얘기 들어주기나 할까?'하고 의기소침할 거 같아요. 제가 굳이 '네임밸류' 있는 대학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거든요. 사실 저랑 가장 맞는 건 한동대예요. 그런데 제가 하려는 것들 하려면, 제 얘기를 사람들이 들어주려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묻는 건 어느 대학 나왔는지잖아요. 그래서 일단 좋은 대학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말 걸지 못한 수많은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동세상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교육, #경쟁교육,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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