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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 자기들 식당이 나간 것을 입증하려는 사진들이 정말 많았다. 위의 액자는 2007년 9월 27일 방송 출연분.
▲ 어느 식당의 벽에는 텔레비전에 자기들 식당이 나간 것을 입증하려는 사진들이 정말 많았다. 위의 액자는 2007년 9월 27일 방송 출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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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1년 3월부터 현재까지 30년 세월 중 24년 이상을 '주부'로 살아왔다. 24년 중 13년은 전업주부, 나머지 11년은 그냥 주부였다. 아내가 주부 생활을 한 것은 결혼 초기인 6년뿐이다. 물론 나는 남자이니 굳이 한자로 나타낸다면 주부(主婦)가 아니라 주부(主夫)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된 데에는 약간의 사정이 있다.

나는 육군 병장으로 제대를 했다. 군대에 갔다 오니 징집 면제를 받은 고교 동기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대학강사가 되어 있었다.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마지막 남은 4학년 과정 1년을 마저 마친 다음 교사가 되었다. 1980년 9월의 일이다.

그런데 8월 31일에 국립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지만 내게는 교사자격증이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는 교사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국립사대를 졸업하면 곧장 공립학교에 발령이 났는데, 경북 도내의 공립이 아닌 대구 시내의 사립으로 가고자 했던 나는 (오라는 데는 많았고, 어느 재단이나 서류만 제출하면 당장 교단에 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사자격증이 없어서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문교부(지금의 교과부)가 대학의 학사일정을 무기한 연기한 탓에 그런 사태가 빚어진 것이었다.

대학에서는 날마다 그 다음날을 기준으로 졸업예정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그러나 학교를 군인들이 에워싸고 지키면서 출입을 철통같이 통제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로는 교정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 탓에, 한번은 나를 아끼던 교수님께서 내 졸업예정 증명서를 대신 끊어서 정문까지 가져다 주신 일도 있다. 어떤 사립 고등학교에 강사로 출강할 일이 생겨서였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이윽고 나는 10월 31일자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자격증도 취득했다는 정부의 인정을 받았다. 지금도 대학에 가서 졸업증명서를 발급받으면 졸업일이 10월 31일로 박혀서 나온다. 그래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가짜 졸업장 아니냐'라거나 '운동권이기 때문에 그런 이상한 졸업장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 의심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 운동권도 아니었다.

1980년 가을을 강사로 보낸 나는 10월 31일 날짜로 장관이 발급한 교사자격증을 제출하여 12월부터 어떤 사립 고등학교의 야간부 교사가 되었다. 낮시간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심이 작동한 결과였다. 물론 그 재단 관계자에게 어째서 졸업일이 10월 31일인가를 설명하는 일이 정작 취업을 하는 그 자체보다 더 힘이 들었다. 재단 관계자는 대학에 전화로 물어보기까지 했다.

자신의 식당이 2007년 1월 15일 TV에  '맛집'으로 소개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액자가 어느 식당의 방 안에 걸려 있다.
 자신의 식당이 2007년 1월 15일 TV에 '맛집'으로 소개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액자가 어느 식당의 방 안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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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부 교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낮에 나를 붙들더니,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언제 장가 갈 거냐'고 물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이라고 대답했더니 '제발 장가를 좀 가라'는 호소가 이어졌다. 그 때 한국식 나이로 27세였는데, 당시는 25-6세에 결혼하면 빠른 편이고, 27-8세면 적당하다고들 여겼고, 30세에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신랑을 보고는 '노총각이야' 하며 쳐다보던 시절이었으니, 어머니가 특히 장남인 내게 결혼을 독촉하는 것도 지나친 무리는 아니었다.

왜 결혼을 재촉하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으니 '내가 열일곱에 시집 와서 살림 산 지 40년이 다 되었다. 이젠 (밥하고 설거지 등이) 하기 싫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그럼 내가 아침하고 점심 차리고 설거지하고, 저녁 식사 준비 해놓고 출근하면 되겠소? 저녁 설거지는 퇴근하고 와서 밤에 하고. 그러면 장가 가라는 말 안 할 거요?' 했더니 어머니 왈 '좋다'였다.

주부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결혼을 했고, 신혼 때에는 아내가 전업주부 생활을 했다. 내가 아내에게 전업주부 역할을 물려받은 것은 1989년이다. 전교조 활동을 하던 중 노태우 정부의 탈퇴 강요에 버티었고, 아내는 동네에서 작은 양품점을 차렸던 것이다. 밤 10시 넘어 가게 문을 닫고 귀가하여 쓰러지는 아내에게 가사노동을 떠맡길 수 없었으므로,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낮엔 빈둥빈둥 노는 내가 전업주부 역할을 하는 건 당연했다.

1994년에 복직을 했지만, 아내는 가게를 계속했다. 나는 이제 전업주부가 아니라 그냥 주부가 되었다. 그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 월급도 안 주는 교육위원에 당선 된 이래, 다시 전업주부로 '전문가' 자리에 복귀했다.

우리밀살리기운동 회원증
 우리밀살리기운동 회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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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지방선거 때 ('대구'에서 '진보' 후보로) 교육감 선거에 나가 낙선을 했고, 그 이후 완전한 실업자, 참된 마음으로서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한 전업주부가 되었다. 지금도 뒷베란다에 쌓인 낡고 잡다한 가재도구들을 정리, 정돈하고 바닥을 청소하는 여섯 시간의 가사노동으로 진땀을 흘린 후 물을 덮어쓰고 자리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까닭은, '주부' 생활을 하다 보니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자면, 아이들이 아주 어렸 때 일이다. 아이 둘이서 두고두고 피자를 먹고 싶다고 애걸(?)해서, 반짝 출시되다가 시장성이 없어서인지 아주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지만, '우리밀 피자가 나오면 사주겠노라' 공약을 했다. 그러던 중에 우리밀살리기운동에서 피자를 생산, 판매한다고 연락이 왔다. 당장 달려가서 두 판을 사왔다. 아이들이 정말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쳐다보는 앞에서 피자를 굽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던지라 내게도 그 냄새는 달콤했다.

한쪽면이 다 익은 기세여서 나는 그것을 뒤집었다. 피자를 서양식 빈대떡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렇게 뒤집어서 양면을 골고루 굽는 것이 올바른 조리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냄새가 더 좋았다. 단순한 냄새 차원이 아니라 그것은 향기였다. 나는 아까부터 줄기차게 군침을 삼켜온 아이들 앞에 '자, 맛있게 먹어라' 하고 큰소리를 치며 피자를 내려놓았다. 아이들이 말했다.

"피자, 이렇게 안 생겼던데?"
"그래? 아빠는 피자를 본 적은 없지만, 아까 사온 것 너희들 봤지? 피자 틀림없어. 그것도 우리밀 피자야!"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정말 맛있게들 먹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삶은 찰떡처럼 되어버린 엉망진창의 피자였지만, 다른집 아이들 피자 먹는 것을 늘상 부러워했던 나의 딸과 아들에게는 그것이 말 그대로 꿀맛이었던 것이다. 이제 20대 후반이 된 두 아이는 요즘도 나에게 종종 '우리 아버지는 세계 유일의 피자를 만든 분'이라고 힐난한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좋은' 것을 먹이려고 노력했다. 가난해서 '비싼' 것을 먹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주요 먹을거리 중 한 가지인 과자나 라면만이라도 (꼭 먹여야 한다면) 농약과 중금속이 없는 우리것을 주었다.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드문드문 '맛집'을 방문하더라도 무턱대고 방송이나 신문에 난 집을 찾는 법이 없었고,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나와는 전혀 달리 너무나 식성이 까다로운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뒤 갔다.

동료 후배 문인들과 어린이서점을 차렸을 때에도 매장의 1/4 정도를 우리밀살리기운동의 먹을거리에 할애했다. 동네 주부들과 아이들에게 '먹어도 괜찮은' 우리것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때때로는 통밀가루를 짊어진 채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배달을 다니기도 했다. 신문배달을 할 때에는 조간 속에 직접 만든 우리밀 광고 전단을 넣어서 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전 오마이뉴스를 켜니, 영화 <트루맛쇼> 이야기가 커다랗게 떠 있다. 읽자니 순간순간 속이 끓어오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예로부터 우리는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마라'는 민간언어를 떠받들며 살아온 종족 아닌가.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도 있고, '밥이 곧 하늘'이라는 종교사상도 있었다. 우리에게 먹는 일은 곧 생명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 어떤 식당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그 식당 벽에 텔레비전 소개 사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사진 촬영이 취미인 나는 그 홍보 액자들을 모두 찍어 왔고, 컴퓨터에 저장을 해두었다. 그리고는 가사노동에 휘둘려 사진을 꺼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랬는데, <트루맛쇼> 기사를 읽고 나니 그 사진들이 갑자기 못 견디게 궁금해졌다.

그 식당의 사진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맛이 있어서 텔레비전에 방영된 것일까. 그 집에 같이 간 후배들이 이구동성으로 '별 맛도 없는데' 하고 품평을 했는데, 혹시 그 집도 '맛집 소개, 음식 맛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트루맛쇼> 기사의 갈파에 해당되는 것일까. 아닐 거야. 설마, 그럴 리가!

2007년 1월 15일자 방송에 보도되었다는 사실을 홍보하기 위한 액자가 붙어 있다.
▲ 식당의 중앙 홀 벽에 2007년 1월 15일자 방송에 보도되었다는 사실을 홍보하기 위한 액자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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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5일에 텔레비전을 탔다. SBS다. 식당 내부에 걸린 액자를 보면 TV 화면에는 식당의 이름과 소재지가 밝혀져 있다. 주제는 '문전성시의 비밀'이다. 그런데 같은 식당이 2009년 5월 12일에도 SBS에 등장한다. 한번은 '생방송 투데이'이고, 다른 한번은 '모닝 와이드'이다.

'그러니까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트루맛쇼>가 확실하게 파헤쳐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텔레비전에 자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국 방방골골에 그렇게 맛집이 드문가, 하는 의구심은 지울 수가 없다. 삼천리 구석구석에서 식사 시간 여부를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식도락을 즐기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 중 한 가지인데, 그 많은 식당들 중에서 같은 텔레비전에 중복 소개가 될 정도이면 나라를 대표하는 '맛집'이란 이야기 아닌가. 아니면, 프로그램 관계자들의 나태한 직업의식 때문이든가.    

2009년 5월 12일 방송
 2009년 5월 12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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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은 MBC도 마찬가지이다. 이 식당은 2007년 9월 27일에 MBC에 소개되는데, 2010년 10월 2일에도 또 소개된다. '화제 집중'과 '공감! 특별한 세상'을 통해서다. 그리고 일시를 확인할 수 없는 때에 대구MBC에도 재차 소개된다. 'TV전국기행'을 통해서다. 제발 TV사들은 이런 방송을 내보내지 말거나, 아니면 맛집을 좀 많이 발굴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2007년 9월 27일 방송
 2007년 9월 27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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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일 방송
 2010년 10월 2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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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사진
 방송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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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어떤가. 같은 식당이 2009년 4월 27일 소개된다. '무한지대 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그런데 2010년 7월 9일에 또 소개된다. 이번에는 '한식 탐험대'가 소개를 맡는다. KBS도 MBC나 SBS와 마찬가지로 같은 식당을 중복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방송사 구분 없이 시기를 기준으로 나열해보면 TV사들의 나태는 더욱 두드러진다. 자기들이 중복 방영하는 것도 문제인데, 다른 방송사가 하면 뒤따라서 같은 내용을 재방송한다. 언제부터 KBS, MBC, SBS가 '재탕' 전문 케이블 방송이 되었나?

2007년 1월 15일, SBS '생방송 투데이'
2007년 9월 27일, MBC '화제집중'
2009년 4월 27일, KBS '무한지대 큐'
2009년 5월 12일, SBS '모닝 와이드'
2010년 7월 9일, KBS '한식 탐험대' 
2010년 10월 2일, MBC '공감! 특별한 세상'
연월일 미상, 대구MBC 'TV전국기행'
연월일 미상, 레저TV 'Go! Go! Go!'

2009년 4월 27일
 2009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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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9일
 2010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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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걸로 장난치지 마라'고 했다. 설혹 어두운 손이 개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방송사들이 같은 식당을 돌아가면서 '맛집'이라고 연이어 소개하는 행위는 '장난'이다. 방송을 보고 직접 찾아가는 '꾼'들을 속이는 행위이고, 집에서 군침을 삼키는 시청자들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문득, 직접 식당을 차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싼 집 찾다가 열 받아서 주인이 직접 차린 집'이라는 타이어 가게의 현수막을 보고 웃었지만, <트루맛쇼> 기사를 읽고난 뒤에는 어쩐지 그 구호에 공감이 간다. 정말 깨끗한 우리 농산물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식당, 얼마나 좋은가. 내가 차리면,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일 하나는 '따놓은 당상'인데, 한번 시도해 볼까. 장사에서 손님의 믿음을 얻고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닌가.

그런데, 곰곰 생각해볼 것도 없이, 돈이 없다.

한심해서 자조섞인 웃음을 짓는데, '정신 똑 바로 차리라'는 경고음인 양 세탁기에서 빨래 끝났다는 신호음이 들려온다. '빨래나 널자.'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나는 잊었어요?' 하듯이 한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그래, <트루맛쇼> 영화는 대구에서 언제 하지? 어느 극장에서? 빨리 보러가야겠다.'

방송 날짜 미기재 사진
 방송 날짜 미기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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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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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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