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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밤 9시경 일본 도쿄 야경. 가운데 보이는 탑이 도쿄 타워.
 5월 30일 밤 9시경 일본 도쿄 야경. 가운데 보이는 탑이 도쿄 타워.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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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장 안 가면 안 돼? 방사능 노출되면 어떡해."

갑작스런 일본 출장 소식에 아내가 덜컥 겁이 난 모양입니다. 3·11 일본 동북부 대지진 이후 80일이 지났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따른 방사능 공포는 채 가시지 않은 탓이죠. 덕분에 아침저녁 미역국으로 모자라 라면, 김, 생수 같은 비상식량까지 챙겨주려는 걸 말리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도쿄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지난달 29일 오후 공교롭게 비까지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는 빗줄기였지만 태풍이 근접한 탓에 세차게 흩뿌리는 탓에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었죠.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방사능비'에 노출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도쿄 시민들에게서 '방사능 공포'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커녕 이 정도 비는 맞아도 괜찮다는 듯 우산을 펼치지 않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맞은 건 '불 꺼진 도쿄'였습니다. 업무시설이 문을 닫은 일요일 저녁이긴 했지만 화려하기로 소문난 도쿄 야경의 장관은 사라지고 어두운 적막만이 일행을 맞았습니다. "평양에 온 것 같다"는 일행의 말이 실감 날 정도였죠.

서울 남산 타워처럼 도쿄를 상징하는 333m짜리 도쿄 타워도 전력난을 비켜가지 못했습니다. 평소 일몰 후 자정까지였던 점등 시간을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로 단축했을 뿐 아니라 절전형 라이트를 사용해 소비 전력을 평상시보다 50~65% 줄였습니다.

원자력 대신 자연 에너지... '초절전 신드롬' 일본을 바꾸다

도쿄 신주쿠 역 앞에 있는 통신가전제품 양판점.
 도쿄 신주쿠 역 앞에 있는 통신가전제품 양판점.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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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전력 사용 성수기를 맞아 전력 사용량을 15% 줄이는 '전력 사용 제한령'이 발동되는 7월 1일부터는 아예 도쿄 타워 불빛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대지진 이후 한동안 소등했다 지난 4월 22일부터 정상 가동했다고 합니다.

도쿄타워뿐 아니라 도쿄 시내 곳곳에선 '절전 중'을 알리는 안내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일행이 머문 호텔도 '야간 세탁 서비스'를 중단했고 엘리베이터도 3대 중 1대는 멈춘 상태였습니다.    

도쿄 시오도메 지역에 있는 문화 복합시설인 '카레타 시오도메'에는 "절전을 위해 관내 조명과 디스플레이의 일부 소등을 실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매장 안에 있던 TV도 '절전 중 가동중지' 상태였습니다. 또 도쿄 번화가인 신주쿠 역 앞에 있는 한 게 요리 전문점은 영업시간을 오후 11시에서 10시로 1시간 단축했습니다. 이른바 '절전 영업'이지요.

휴대폰이나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신주쿠역 앞 양판점들은 여전히 화려한 조명으로 손님을 끌었지만 비교적 한산해 보였습니다. 이곳 매장에서도 '절전형 제품'만 특화해 판매하는 등 나름 살 길을 모색하는 분위기입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뒤 동일본 지역 원전 가동이 상당 부분 멈춘 상태입니다. 일본 원전 의존도는 약 40%에 달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그 영향이 더 심각합니다. 이 때문에 간 나오토 일본 총리도 2030년까지 원전 14기를 추가 건설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하고 2020년대까지 태양력 등 자연에너지 발전 비중을 현재 9%에서 20%로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역시 지난달 동일본 지역 태양광 발전소에 800억 엔(약 105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소프트뱅크와 KT와 손잡고 일본 기업들의 서버를 보관할 인터넷데이터센터를 한국에 만들기로 한 것도 일본 전력난 장기화에 대비한 것입니다.

절전 필요성 일깨운 원전사고, 일본엔 '실보다 득'

일본 도쿄 시오도메 지역에 있는 문화복합시설인 '카레타 시오도메' 입구에 붙은 '절전' 안내판.  건물 조명과 디스플레이 일부를 소등하고 있었다.
 일본 도쿄 시오도메 지역에 있는 문화복합시설인 '카레타 시오도메' 입구에 붙은 '절전' 안내판. 건물 조명과 디스플레이 일부를 소등하고 있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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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 본사를 비롯한 상당수 기업 건물들도 불필요한 전력 줄이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불필요한 조명등을 끄는 바람에 복도도 어두컴컴하고 올여름엔 오전 오후로 나눠 2부제 근무를 준비하는 기업들도 많다고 합니다. 전력 사용을 최대한 줄이더라도 70% 정도는 기본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15% 감축은 기업들로선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프트뱅크가 지난달 30일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연 한국 데이터센터 사업 설명회에 예상 인원 1200명보다 두 배나 많은 2500명 정도가 참석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기업마다 보관해온 인터넷 서버가 워낙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데다 지진 재발시 파손 위험성 때문에 데이터센터에 위탁하는 물량도 평소보다 3배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지진과 방사능 공포는 조금씩 잊혀져가는 듯하지만 원전 중단과 전력난에 따른 '초절전 신드롬'은 일본인들 일상으로 깊이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환경단체에서 석유 등 화석 연료 고갈과 원전 위험성을 거론하며 절전과 대체 에너지 개발을 많이 얘기하지만 사실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지금 전력난을 계기로 원전 위험성과 절전 필요성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당장 전기를 마음놓고 쓰지 못하는 불편은 어쩔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원전 비중을 줄이고 태양광 등 자연에너지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계기가 된다면 일본에겐 '실보다 득'이 될 듯합니다. 2박 3일 짧은 출장이었지만 우리도 이 정도 불편을 감수한다면 원전 의존도 줄이기가 그리 멀고 어려운 숙제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그:#일본, #도쿄, #절전, #동일본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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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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