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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무척 더웠다. 상하의 나라 필리핀의 강렬한 햇빛이 살갗에 닿았다. 필리핀의 성벽도시,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는 예전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곳은 태평양 위의 아시아 국가에 세워진 스페인군의 필리핀 요새였다. 이 요새는 스페인군이 16세기에 필리핀의 마닐라를 점령한 후 파시그(Pasig) 강 어귀에 있던 이슬람 마을 위에 세운 요새였다.

나는 과거의 요새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가족과 함께 성 주변을 둘러싼 7개의 출입문 중 북쪽 문을 통해 인트라무로스 내부로 들어섰다. 버스는 아스팔트가 아닌 석재 벽돌로 만들어진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마닐라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대로 함축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인트라무로스의 성벽은 지금 봐도 상당히 높다. 마닐라가 필리핀의 수도로 개발되면서 외적이나 원주민들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할 필요성이 커졌고 그만큼 성벽의 높이는 높아만 갔다.

스페인군이 요새를 지킬 때 사용하던 대포이다.
▲ 인트라무로스 대포. 스페인군이 요새를 지킬 때 사용하던 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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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라무로스 안에는 녹슬은 대포와 대포알이 이곳저곳에 방치되듯이 놓여 있다. 이곳에 주둔하며 인트라무로스를 지키던 스페인군이 남기고 간 유산이다. 산재된 대포의 모습을 보면 마닐라의 유물 관리 수준이 아직은 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 같다. 마치 과거에 경복궁에 수많은 불탑들이 방치되어 있던 모습을 떠올린다.

인트라무로스의 대포 주변에는 많은 마차들이 지나다닌다. 과거 이곳 인트라무로스에서 중학교 후배를 우연히 만나 함께 마차를 탔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마차 타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후배의 제안에 엉겁결에 마차를 탔던 기억이 났다. 그날은 비가 흩뿌렸는데 마차 위에서 발이 편했던 기억이 머리 속에서 잠깐 튀어 올랐다가 사라진다. 나는 마차에서 편안히 인트라무로스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파시그 강 어귀를 지키던 천혜의 요새이다.
▲ 산티아고 요새. 파시그 강 어귀를 지키던 천혜의 요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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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깊고 넓은 해자를 지나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 안으로 들어섰다. 이 요새는 바다와 파시그 강이 만나는 곳에 지어졌다. 파시그 강의 어귀로 들어오려는 외적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주변 항구 등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이다. 요새의 성벽은 아쉽게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마닐라 전투에서 미군의 대규모 폭격을 받아 성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었다.

미군 폭격의 대상은 일본군이었지만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던 인트라무로스는 당시에 쑥대밭이 되었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성벽은 과거 성벽 기단에 흩어진 석재와 새 석재를 조립하여 1982년에 복구된 모습이다. 나는 호세 리잘의 동상을 보며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 건너편의 차이나타운은 재개발되어 많이 깔끔해진 모습이다.
▲ 파시그 강. 강 건너편의 차이나타운은 재개발되어 많이 깔끔해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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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그(Pasig) 강에 접한 성벽에 오르니 유유히 흐르는 파시그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남아시아 특유의 뿌연 회색 강물이 여러 부유물을 머금은 채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편의 차이나타운은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과거에 비해 상당히 정돈된 모습이었다. 십수 년 전의 필리핀 배낭여행 기억이 바로 어제의 일인양 머리 속을 돌아다닌다. 세월은 참 빠르다. 세월은 흘러 흘러 여행을 좋아하는 딸, 아내와 다시 마닐라 여행을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이 성벽에 올라서 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던 기억이 나는데. 강물은 탁해도 주변은 많이 깨끗해졌어. 이 요새의 다른 곳은 잘 생각이 나지 않은데 유독 이 흐르던 강물을 보던 기억이 선명해"
"여보 마닐라에도 와 봤어?. 지금 이곳이 깨끗해진 상황이야?"

내가 아내와의 대화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같이 필리핀 여행을 왔으면서도 내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아내가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당시 내가 여행 경비가 부족하여 마닐라 시내에서 마닐라 공항까지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어갔던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는 그때 당시의 나를 생각하며 그때 내가 참 젊었다는 생각을 했다.

요새에 수감되었던 죄수들은 이 지하감옥에서 익사해 죽기도 하였다.
▲ 지하감옥. 요새에 수감되었던 죄수들은 이 지하감옥에서 익사해 죽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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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안에는 참혹한 지하감옥이 있었다. 벽을 따라 흐르는 바닷물에 많은 죄수들이 익사하면서 악명을 떨치던 감옥이다. 필리핀 독립을 위해 항거하던 필리핀의 애국지사들도 이곳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이들도 있었다. 필리핀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호세 리잘도 스펜인군에 의해 처형되기 전에 이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자연스럽게 필리핀 독립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호세 리잘의 유품과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 호세 리잘 기념관 호세 리잘의 유품과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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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리잘이 수감되었던 감옥은 현재 개조되어 호세 리잘 기념관이 되어 있었다. 그전에 없었던 건물인데 번듯하게 잘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기념관은 그의 애국심과 독립운동에 초점이 맞춰진 훌륭한 박물관이었다. 필리핀에서 흔치 않은 정돈된 박물관이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그의 삶을 그린 대형 그림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기념관에는 그가 생전에 직접 사용하던 손때 묻은 유품들과 그가 만든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그가 많은 필리핀인들이 읽고 있는 소설을 쓴 대작가이자 언어학자였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수준급의 조각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다. 전시품 중에는 그가 처형 전날에 램프에 몰래 숨겨 요새 밖의 필리핀들에게 내보낸 우국 충정이 담긴 원고까지 전시 중이다.

그가 처형 전에 동포에게 남긴 글이 한글로 동판에 전시 중이다.
▲ 호세 리잘의 마지막 인사. 그가 처형 전에 동포에게 남긴 글이 한글로 동판에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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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밖으로 나가다 보니 호세 리잘이 남긴 '마지막 인사'가 한글로 번역되어 동판에 제작되어 있었다. 필리핀을 찾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워낙 많아서 한국 사람들이 읽기 좋게 한글로 제작해 놓은 것 같았다. 그의 글은 '잘 있거라. 사랑하는 나의 조국'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독립투사의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지는 글이다.

그가 남긴 발자국이 처형장이었던 리잘 공원까지 이어지고 있다.
▲ 호세 리잘의 발자국. 그가 남긴 발자국이 처형장이었던 리잘 공원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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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리잘 기념관 밖으로 나오니 뜨거운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필리핀의 역사가 태동한 곳을 걷고 있었다. 그 역사의 길에 한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호세 리잘이 처형되던 날 감옥에서 나와 처형지인 현재의 호세 리잘 공원까지 걸어가던 발자국이다.

아! 이 발자국은 역사의 발자국이었다. 이 발자국은 현재 독립국가 필리핀의 역사에 이어진 발자국이었다. 나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찌는 듯이 더운 마닐라의 한낮의 태양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 이 여행기는 2010년 2월의 필리핀 여행 기록입니다.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70편이 있습니다.



태그:#필리핀, #마닐라, #인트라무로스, #산티아고 요새, #호세 리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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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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