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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대통령 가시는 길에 절을 올리는 시드니 동포
 고 노무현 대통령 가시는 길에 절을 올리는 시드니 동포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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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은 패배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다. 파괴될 수는 있지만 결코 패배당할 수는 없다(But a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E.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내고 추모하는 슬픔은 시드니가 봉하마을보다 더 진하다. 시드니의 5월이 가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을은 사계절의 끝이 아니다. 늦었지만... 아직은 다 끝나지 않은 가을에, 하늘은 높아가고 살아남은 자들의 생각은 깊어진다.

84일 동안 물고기 한 마리 낚아 올리지 못했지만 노인은 누구보다 일찍, 그리고 멀리 노 저어 나갔다. 기어코 커다란 고기를 잡겠다는 꿈을 꾸면서. 마을에선 그를 운이 다한 노인이라고, 꿈속에서 사는 몽상가라고 비웃었지만 말이다.

봉하마을에서 '진보의 미래'를 꿈꾸었던 노무현은 노인을 닮았다. 바다에 낚시를 드리우는 대신 책과 사색의 바다에 풍덩 빠져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꿈꾸었다. 노인이 84일 만에 낚은 거대한 고기를 닮은 책 '진보의 미래'를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그 꿈꾸기가 중단됐다. 필름이 끊긴 영화처럼 세상이 하얘졌다. '사람 사는 세상'을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는 노무현의 꿈이 실종된 것이다. 무수한 상어 떼의 공격을 받아서 앙상한 가시로 남은 노인의 고기처럼.

그러나 기진맥진한 노인은 혼자 중얼거렸다. "희망을 버리는 건 죄악이다"라고. 이제 노무현이 꿈꾸었던 세상을 현실세계로 만드는 일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노회찬의 말처럼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할 곳은 노무현의 꿈이 가다가 멈춘 곳"이다.

시드니 독서포럼 '시나브로'

'시나브로' 맨리 부시워킹
 '시나브로' 맨리 부시워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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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로부터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받아서 읽었다. 오 기자는 "아름다운 세상 함께 만들어요"라는 글귀와 함께 저자 서명을 해서 보내왔다. 고마운 마음에 그 책 20여 권을 구입해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2010년 2월, 그 책을 읽은 지인이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함께 읽자고 제의했다. 그는 '호주 유나이팅처치' 소속 이영대 목사의 권유를 받았다면서,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까지 주선했다. 책을 읽어본 참석자들은 크게 충격 받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10여 명이 모이는 독서포럼이 태동했고 4월부터 삼성 관련 토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중에 거창고등학교와 서울공대를 나와서 현대그룹에 근무했던 정창기씨가 있었다. 그는 대기업 근무 경험과 자신의 회사를 경영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삼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2010년 8월, 정창기씨가 오연호 대표기자가 쓴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10여 권을 구입해서 독서포럼 참석자들에게 선물했다. 그러면서 "노무현의 꿈이 이 책들 안에 담겨있는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책 10권을 함께 읽고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참석자들 모두가 동의했다.

2010년 10월, 이영대 목사가 시무하는 '이스트킬라라교회' 사택에서 시드니 독서포럼 '시나브로'가 정식으로 발족됐다. 회원들의 발의로 몇 가지 이름이 나왔지만 시나브로 발음이 정겹다는 이유로 독서포럼 이름으로 채택됐다. 그 어간에 이광우 회원의 '신비주의' 강의가 있었고, 이영대 목사의 논문 '성경과 믿음'을 함께 읽으면서 성경의 형성과정을 알아보았다.

회원은 정창기(은퇴한 기업가), 최태명(자영업), 이영대(목사), 김용해(자영업), 윤필립(시인), 정진연(치기공사), 이광우(컴퓨터전문가) 등과 그 부인들을 포함해서 14명이다. "진보를 생각하는 독서포럼을 통해서 우리부터 생각을 바꾼 다음 제대로 나라를 사랑하자"고 정식으로 제안한 정창기씨를 회장으로 선임.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의 부사다. 처음에는 정겹다는 생각만 했는데, 최근에 한 회원이 "시나브로 낱말이 아래로 하강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독서와 토론을 통해서, 세상의 낮은 곳을 살펴보고 아우르겠다는 독서포럼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장하준 '국가의 역할'에 덜컹거리다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한다' 읽으며 "경제 그까이꺼"

시나브로 회원들이 읽고있는 노무현 대통령 관련 도서들
 시나브로 회원들이 읽고있는 노무현 대통령 관련 도서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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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경제학자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었을까?", "아니, 장하준 교수는 우리 같은 무식쟁이들은 아예 상대도 안 할 생각인 것 같다", "이거, 이러다가 10권은커녕 한 권도 못 읽고 끝나는 것 아닌가?"

'이스트킬라라교회'와 회원들의 집에서, 매달 마지막 금요일 밤에 열린 독서포럼에 어둔 기운이 드리워졌다. 경제를 전공했다는 회원 하나가 특강을 두 번이나 했지만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진보 경제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그렇게 더듬거리기는 도중에 한국에서 복지논쟁이 벌어졌다. 거기서부터 뒤엉킨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고도 성장이냐, 복지정책을 통한 분배냐? 경기부양을 통한 활성화냐, 투기를 억제하고 건강하게 가느냐? 이렇게 방대하고 촘촘해진 경제를 한 번도 중산층 이하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는 '보이지 않는 손'에 계속 맡겨도 되겠는가? 등등.

처음엔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서 옆 사람의 눈치만 살피던 분위기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부유층과 대기업 위주 정책, 복지 외면 정책 등을 고집하면서 신자유주의 만세나 부르는 MB정부에 대한 강한 비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장하준 교수의 <국가의 역할>을 읽으면서 고생 쫄쫄이 한 회원들이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한다>를 읽으면서 표정이 환해졌다. 일단 '신자유주의'에 대한 확실한(?) 공부를 끝낸 다음이라서 그랬는지 "경제 그까이꺼"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2011년 5월 현재, 책을 읽기 시작한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도 어렵지 않게 건너갈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더 플랜>이나 <빈곤의 종말>도 별로 겁내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런데 <유러피언 드림>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듯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끝까지 집중한 책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독서포럼 '시나브로'의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한다> 독파 대장정은 2012년 5월 노무현 대통령 3주기 즈음에서 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확정된 계획은 아니지만 그 어간에 전문가를 초청해서 강연회를 열 포부도 갖고 있다.

"그게 인생이지요(Such is life)"

제6차 시드니 촛불집회에서 아들과 함께 공연하는 이영대 목사
 제6차 시드니 촛불집회에서 아들과 함께 공연하는 이영대 목사
ⓒ 호주한인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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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단 한 번 우는 새가 있다. 그 울음소리는 이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아름답다. 둥지를 떠난 순간부터 그 새는 가시나무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가장 길고 날카로운 가시를 찾아 스스로 자기 몸에 찔리게 한다.

새는 가시에 찔린 고통을 초월하여, 이윽고 나이팅게일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깊은 영혼의 울림을 담아낸 노래를. 그리하여 온 세상은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신(神)까지도 미소를 짓는다.

호주 작가 콜린 맥컬로우의 대하소설 <가시나무새>는 이런 켈트의 전설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펼쳐진다. 깊은 영혼을 지닌 존재가 되기 위하여,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찬바람 부는 천길 벼랑 끝으로 날아다니는 가시나무새.

그렇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노래는, 거기에 상응하는 위대한 고통을 치른 다음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소리(音)의 눈물 같은 것이다. 노무현처럼 혼자 숨어서 우는 속울음 같은. 그러나 그 소리 없는 울음이 여울져서 태평양 건너 시드니까지 울게 만들었다.

기자는 콜린 맥크로우와 같은 문학단체에 소속되어서 그를 여러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맨리 바닷가에서 함께 식사를 마친 다음에 맥컬로우에게 물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꼭 그만큼의 고통을 수반해야만 하는가?"라고. 한동안 대답 없이 빙긋이 웃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인생이지요(Such is life)"

2011년 5월 22일 저녁에 <호주한인포럼> 주관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그에 앞서 20일에는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강연회가 열린다. 2주기 추모식에는 조배숙 민주당 최고위원도 참석할 예정이다.

독서포럼 '시나브로'는 강연회와 추모식에 단체로 참석한다. 5월 13일 정창기 회장댁에서 열린 '시나브로' 5월 모임을 마친 다음 김용해 회원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노무현의 꿈을 더불어 꿀 수 없었던 대한민국 국민은 눈뜬 장님들이었다. 그게 두고두고 원통하다."


태그:#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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