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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문학관의 시대성

태백산맥문학관은 벌교 버스터미널 뒤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최근에 지어졌기 때문인지, 아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기 때문인지 문학관은 생각보다 크고 웅장했다.

이 문학관을 건립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력했을까. <태백산맥>은 80년대에 완성됐지만 2000년대까지 작가의 이적성을 따져 물었던 것이 우리네 현실 아니던가. 그런 척박한 토양에서 <태백산맥>과 같은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문학관이 지어졌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의 전경
▲ 태백산맥문학관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의 전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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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문학관이라 함은 그 작가가 생을 마감한 뒤 건립되어지는 게 일반적인데, 조정래 선생의 낯 뜨거움을 무릅쓰고 태백산맥문학관이 건립된 것은 결국 문학관이 가지고 있는 시대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단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언제든지 퇴보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특성상, 역사적 퇴행을 막기 위해서는 태백산맥문학관과 같은 시금석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급속히 뒷걸음질 친 우리의 민주주의를 상기해보자. 단지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많은 국민들의 인권이 탄압당하고, 이승만, 박정희, 심지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기념관마저 거론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

이와 같은 참담한 현실은 결국 우리 사회의 역사교육이 제대로 행하여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태백산맥문학관과 같은 기념비가 필요함을 반증해준다. 비록 교과서에서 배울 수는 없지만, 역사적 기념비를 통해 우리의 일그러진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만 있다면 지금과 같은 역사적 퇴행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벌교를 방문하고도 태백산맥문학관을 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실수일 수밖에 없다. 문학관은 곧 벌교의 역사요, 또 현재진행형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1박2일>이 보여준 만큼 꼬막정식만 먹고 만다면 그것은 벌교의 수박 겉핥기일 뿐이다.

태백산맥문학관과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 소설 <태백산맥>의 육필 원고 대하소설 <태백산맥>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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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소설 <태백산맥>의 육필원고였다. 장장 1만 6500장에 달하는 원고. 작가는 저 엄청난 분량의 글의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긴긴 밤을 뜬 눈 지새워야 했을까.      

문학관은 그 첫머리에 작가가 <태백산맥>을 집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었는지 전시하고 있었다. 소설을 쓰기 전 작가가 항상 소지하고 다녔던 작가수첩과 작가가 직접 그려낸 태백산맥 인물도와 구상도, 그리고 소설 속 빨치산의 실제 모델이었던 박현채 선생과의 인연까지 그곳에는 조정래 선생이 <태백산맥>을 집필하기 위해 쏟아부었던 노력이 서려있었다.

또한 전시관에는 소설 <태백산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의 일관된 방해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극우세력들의 협박을 받은 뒤 작가가 작성한 유서였다. 혹여 내가 오늘 죽는다면 오늘 내게 전화했던 이들의 행각이라고 써내려간 작가의 유서는 문장 하나하나에 결연함이 배어 있었다.      

작가가 목숨까지 걸고 완성한 <태백산맥>. 결국 그것은 이 시대가 조정래 작가에게 진 빚이었다. 어쨌든 <태백산맥> 덕분에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또 다른 진실을 정리할 수 있었고, 이를 발판 삼아 기득권과는 다르게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극악했던 쌍팔년도 <태백산맥>을 보며 용기를 얻었으며, <태백산맥>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지 않았던가.      

태백산맥문학관의 시작
▲ 문학관의 첫머리 태백산맥문학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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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유서를 보고나니 그 뒤로 전시된 검찰의 고소장이나 언론들의 마녀사냥은 귀여운 앙탈에 불과했다. 목숨까지 걸었던 작가로서는 준법적인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이적성 여부를 가리기 위해 관련된 자료를 달라는 검찰에게 작가가 단 하루 만에 자료를 제출했다는 일화는 작가가 그동안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전시관 말미에는 영화 <태백산맥>이 언급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았었지만 원작과 달리 현실과 타협했다며 혹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는 바로 그 영화. 그러나 영화에 대한 작가의 평가가 걸작이었다.

아쉽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임권택 감독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작가. 분단구조가 엄연히 유지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어디 마음대로 <태백산맥>을 읊조리는 게 쉬운 일이냐는 것이었다.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봄날의 현부잣집
▲ <태백산맥>의 첫 무대 봄날의 현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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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나와 그 앞에 서 있는 현부잣집 건물로 갔다. 소설 <태백산맥>의 첫 장면을 장식하는, 소하와 정하섭이 사랑을 논하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져 한옥을 기본으로 일본양식이 더해졌다고 하더니 건물은 꽤 아름다웠다. 다만 예전과 달리 사람이 살지 않아 풍기는 세트장 느낌이 아쉬울 뿐이었다.      

현부잣집 자택의 실제 소유주 박씨 문중의 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집의 모양새나 규모를 감안한다면 집주인은 분명 이 지역에서 한때 떵떵거리며 살았을 텐데 그 영광은 언제 무엇 때문에 사그라진 걸까?

벌교가 겪었던 수많은 역사적 변곡점에서 주택까지 버려야 했던 그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집안을 둘러보니 주인 잃은 주택이 왠지 처연하게만 느껴졌다.      

염상구의 데뷔 공간
▲ 벌교 철다리 염상구의 데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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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건물 그대로 사용 중이다
▲ 구 벌교금융조합 일제 때 건물 그대로 사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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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부잣집에서 내려와 <태백산맥>의 무대가 되었던 곳을 차례대로 답사하기 시작했다. 염상구가 벌교의 주먹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결투를 벌인 철다리와 빨치산들의 시체가 효시되었던 벌교역, 지금은 식당으로 변해버린 술도가와 농민상담소로 변해버린 금융조합 등.      

그러나 아뿔싸. 제일 기대했던 남도여관은 공사 중이었다. 일본풍의 겉모습도 겉모습이지만 빨치산 토벌대가 묵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꼭 보고 싶었던 남도여관을 보지 못하다니. 기회가 된다면 남도여관에서 인민재판이 벌어졌던, 그리고 토벌대의 열병식이 열렸던 벌교초등학교를 보고 싶었건만. 언젠가 또 한 번 들를 기회가 있겠거니.      

비극적인 역사의 말없는 증인
▲ 남도여관 비극적인 역사의 말없는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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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지 않은 벌교 읍내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그 경계선을 가늠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물론 어느 소설이든 그 배경이 되는 곳은 사실에 근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태백산맥>의 경우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들 자체가 워낙 비극으로 점철되었기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공간들을 소설에서 묘사했던 그것들과 일치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사한 햇볕 아래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곳에서 그렇게 잔인한 일들이 진행되었단 말인가. 진정?    

벌교 부용산

부용산에 바라본 벌교
▲ 벌교읍내 부용산에 바라본 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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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이러니, 비극은 진행형이다
▲ 벌교 부용산의 충혼탑 역사의 아이러니, 비극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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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부용산을 올랐다. 벌교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태백산맥>의 M1고지요, 안치환이 불렀던 노래의 그 부용산이었다. 처음에는 박기동 시인이 요절한 누이를 그리며 쓴 시지만, 월북 음악가 안성현이 곡을 붙인 뒤 빨치산들에 의해 불러짐에 따라 빨갱이 노래로 낙인찍혀 결국에는 76세의 시인을 혈혈단신 호주로 이민까지 보냈던 바로 그 비운의 노래 부용산. 그 아픔 때문인지 아름다운 부용산의 봄 풍경은 더 애잔하기만 했다.      

부용산     -박기동

부용산 오리길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장장 6km에 걸친 중도방죽
▲ 중도방죽 장장 6km에 걸친 중도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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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의 본고장
▲ 벌교 갯벌 꼬막의 본고장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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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을 내려와 순천 가는 길. 그냥 가기가 못내 아쉬워 중도방죽을 따라 그 유명한 벌교 갯벌까지 발걸음을 이었다. 이 길고 긴 중도방죽을 쌓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 당했을까. 쌀이 최고였던 당시 일제는 이 넓고 넓은 갯벌을 보며 간척 뒤 수탈할 쌀의 수확량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간척 이후 개발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을 꿈꾸는 지금과는 달리.      

갯벌에서 나와 다시 국도를 따라 순천으로 향했다. 급한 발걸음이었다. 처음에는 순천만의 일몰을 보고자 했지만, 벌교 읍내를 돌고 난 뒤 나의 목적지가 바뀐 탓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태백산맥>의 무대도 돌아봤는데, 여순사건의 흔적들을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태그:#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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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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