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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동안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몇 명쯤은 있다. 푸름의 계절 5월, 스승의 날 즈음이면 생각나고 보고 싶은 얼굴이 있다. 교사 부임 첫해, 학교에서 만난 제자다. 1년 반 동안 짧게 근무했고, 그중 그 아이와 수업 시간에 만난 기간은 1년뿐이다. 그런데 그 아이와의 인연은 편지로, 때로는 만남으로 10여 년간 이어졌다. 담임을 맡았던 내 반 아이도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질문도 안 하던 그저 조용한 아이였다.

진경이라는 이름. 다른 학교로 발령나고 나서 편지가 오기 시작했고 편지쓰기를 좋아하던 나도 가능하면 꼬박꼬박 답장을 해주었다. 편지에는 아이의 성장 과정이 그대로 나타났다. 고등학교 진학 후 공부하는 과정, 진로 고민, 대학 입학, 사랑, 방황, 직업 선택 등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 그 아이의 기쁨과 고민을 편지로 주고받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1998년 이후론 연락이 끊어졌다. 나도 서울을 벗어나 의정부로 이사했고 아이 키우면서 여유 없이 사느라 잊었다. 아이 둘을 다 키우고 요즘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지난날의 제자들이 생각난다.

교사인 내게 큰 '가르침'을 줬던 진경이에게 공개 편지를 띄운다. <기자 주>

보고 싶은 진경아, 어떻게 살고 있니?

화려한 싱글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있니? 아니면 널 위해주는 좋은 남자 만나서 아이 낳아 키우며 엄마로 주부로 한집안의 며느리로 살고 있니? 궁금하구나.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찾아오던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제 네 나이도 제법 됐겠지? 아마 내 기억이 맞는다면 서른 여덟아홉쯤은 돼 있을 듯싶다. 지금 너를 만나면 같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할 얘기가 무궁무진 할 텐데···. 가끔 우리 큰 애가 네 얘기를 한단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 전에 너를 만났는데, 아직 기억나는 모양이다.

첫 번째 사진은 92년에 받은 편지 중 반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바라는 내용이고, 두 번째 사진은 97년에 받은 편지 중 삐삐 번호를 알려주며 연락을 바란다는 내용이고, 세 번째 것도 97년에 받은 편지로 학원 강사를 한다는 내용의 편지다.
▲ 진경이가 보내온 편지 중에서 첫 번째 사진은 92년에 받은 편지 중 반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바라는 내용이고, 두 번째 사진은 97년에 받은 편지 중 삐삐 번호를 알려주며 연락을 바란다는 내용이고, 세 번째 것도 97년에 받은 편지로 학원 강사를 한다는 내용의 편지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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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중학교 졸업하고 그 뒤로도 가끔 너의 편지를 받을 때면 설레기도 하고 너의 고민을 읽으면서 내 20대 때 고민하던 모습이 떠올라 안쓰럽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주긴 해야 할 텐데 뭐라고 해주어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딱히 좋은 조언은 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린 1987년에 처음 만났지. 너는 중학교 2학년 학생, 나는 갓 발령난 사회교사. 그때 내 수업은 서툴고 어설프고 아마도 열정만 있었을 게다. 그 당시엔 시청각 교재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기자재는 더더욱 신통치 않았던 시절이어서 설명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지방 면소재지는 더욱 그랬다. 그나마 말주변도 변변치 않았었는데 그래도 너희는 재밌게 들어주었지. 물론 역사라는 수업 자체가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 덕을 본 탓도 있을 거다.
  
머리를 친 제자의 말... "그 선생님도 말로 다 때우세요"

너는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왔고, 내가 서울로 온 뒤에도 서울에 볼 일 있어 왔다가 들렀다며 다른 아이들 소식과, 새로 온 선생님들 얘기를 하며 즐겁게 지내다 가곤 했지.

진경아 너 그거 아니? 너는 기억을 못 할지 모르지만 너랑 나눈 많은 말 중에 평생 나에게 새겨진 말 한마디가 있단다. 네가 중3때, 내 후임으로 오신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너는 이런 말을 했단다.

"그 선생님도 선생님처럼 수업을 재밌게 잘하세요. 그리고 말로 다 때우세요."

그 순간 '탁' 하고 내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너는 아마 별 뜻없이 한 얘기였겠지만 그 말은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네가 돌아간 뒤에도, 그리고 지금 교직에 있는 동안에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말로 다 때웠다고? 내가 너무 안이하게 수업을 했나?'

반성하며 그 후로 시청각 교재 구매에 힘쓰고 교재를 활용해 수업하려 애썼다. 문화재 도록, 박물관 도록과 역사, 미술사 슬라이드 등 동양사·서양사·한국사 등 수업에 필요한 것이라면 가능한 한 많이 사려 애썼다. '다시는 말로 때우지 않으리라, 많은 것을 보여주며 많은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리라' 다짐했단다.

고창에서 1년 반쯤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후에는 역사 강좌나 연수 등에도 많이 찾아다녔다. 유적지 답사를 가게 되면 직접 슬라이드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기도 했다. 심지어는 학교마다 기자재 보유 형편이 달라서, 환등기를 직접 사서 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창가에 커튼이 없는 교실에선 쉬는 시간에 신문지를 붙여서 어둡게 해놓고 보여주기도 했다. 역사스페셜은 거의 빠지지 않고 녹화를 해뒀다가 필요할 때 보여주곤 했다. 수업도 발령 초보다 다양하게 진행했다.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 등은 답사 후 보고서를 내도록 했고,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1달 정도의 시간을 주고 검사팀과 변호사팀으로 나누어서 재판을 시키고 캠코더로 찍어서 보여주기도 했다.

제자의 한마디에 노력하는 교사로 거듭났습니다

아마 이때 네가 수업을 들었더라면 역사를 정말 좋아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다. 이 모든 노력이 너의 한마디에서 비롯된 것이니 오히려 네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너의 그 한마디가 없었더라면 나의 깨달음은 훨씬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어린 너는 나의 스승이었다. 너의 그 한마디가 나의 교직 생활 내내 나를 다지는 울림이었다. 타성에 젖지 않고 노력하는 교사로 남을 수 있도록 채찍질해준 지침이었다.

지금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근무하기에 현실적인 입시를 무시할 수 없어 예전과 같은 수업은 할 수 없으나 대신 마음에 남을 수 있는 얘기를 해주려 애쓴다. 먼저 인생을 산 선배로서 아이들에게 앞으로 펼쳐질 고민스럽고 불안한 20대를 내  헤쳐나갈 수 있도록 멘토 역할을 해주고 싶다.

진경아, 너희에게는 제대로 들려주지 못했던, 내가 젊어서 잘 알려주지 못했던, 인생 경험담을 지천명에 들어선 지금은 편안하게 얘기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부모보다 많은 나이지만 생각만큼은 젊어지려 노력한다. 언젠가 편지에서 네가 얘기했지.

"악동들을 이해해보고 싶으시면 그 애들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보세요. 그리고 그 애들이 잘 가는 공개방송 현장에 가보세요. 라디오도 들어 보시고요. 보통 FM 11시-1시 <윤상의 디스크쇼> 같은 걸 청취하시면 좀 더 많이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들이 읽는 만화책도 읽어보시고요."

네 말대로 아이들이 즐겨보는 시트콤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세대공감을 해보려 노력했고 만화도 보려 노력했다. <개그콘서트> 유행어를 패러디해서 아이들 긴장을 풀어주고 요즘 젊은이들이 읽는 책도 읽고 얘기해주고 있어. 그러나 공개방송 현장은 아직 가보지 못했구나.
 
나를 거쳐 떠난 많은 아이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하여튼 네 덕분에 이만큼의 노력이 더해졌다는 점에서 정말 네게 고맙게 생각한다.

보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니? 혹시라도 이 글을 네가 읽을 수 있다면 연락해라. 커피 향 좋은 카페에서 수다를 떨어도 좋고, 아니면 소주 한 병을 앞에 놓고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구나.


태그:#스승의 날,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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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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