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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DNA

묘한 조합이다. 쌀가게 주인과 인권운동가, 전직 교사와 현직 교수, 그리고 건설업 프리랜서……. 나이도 직업도 학벌도 각기 다른 다섯 명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실에 모였다. 5·18민중항쟁 31주년의 소회를 풀어내는 간담회 자리다.

대체 '광주'와는 무슨 인연들일까. 80년 5월의 거리에서 어깨 겯고 함께 내달린 인연일까. 누구는 그렇고, 또 누구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이는 군인 신분으로 총을 들었고, 어떤 이는 고교생 신분으로 항쟁의 복판에 뛰어들었다.

1980년 5월, 그들은 광주에 있거나 없었다. 어떤 이는 서울에서 재수를 했고, 어떤 이는 휴학생이었으며, 또 어떤 이는 광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광주에서 퍼진 항쟁의 씨앗이 운명처럼 그들의 삶에 박혀 버렸다는 것이다. 살아남아서 더 아팠던 그들의 삶은 이후 전적으로 그 씨앗의 명령에 지배돼 왔다. 이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해 그들에게 무한한 희생을, 헌신을, 각성을 요구했던 그 질긴 생명의 씨앗을, 그들은 '5·18 DNA'라 부른다.

폭력의 기억

정동열
 정동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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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광산구 본양지서에서 근무하던 방위병 정동열(53세, 곡물도매업)은 1980년 5월 20일 오치동 31사단에 점호 받으러 나왔다가 항쟁의 물결에 휘말렸다.

"공수들이 쫙 깔렸는데 살벌하더라고요. 광주공원에 거적때기로 죽은 사람 덮어놓고 그랬었다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광주시민 다 죽어간다는데 이렇게 있어선 안 된다 그래갖고 여덟 명이 도로가에 나무 버팀목 하나씩 뽑아들고 송정리로 나갔어요. 그때 송정리 막 불타고 타이아 놓고 불질르고 그랬잖아요. 차를 타고 광주를 들어갈라고 항께 비행장 입구에서 막더라고요."

일행과 함께 해남경찰서 무기고에서 총기류를 탈취한 정동열은 23일 검거될 때까지 해남, 목포 등지를 돌며 시민군 총기교육을 담당했다.

"나는 방위병이니까 총 못 다루는 애들 총 쏘는 법 갈차주고 해남으로 전부 돌았죠. 그러다 목포 지산부대에 끌려갔는데 대위 하나가 권총 빼갖고 머리에다 대고 그러는 거야. 빨갱이 새끼들 죽여버려도 상관없다고. 지금도 술 하고 수면제 없으면 아파서 잠을 못자요. 무르팍 꿇고 앉겄으면 무르팍 밟아버리지 허리 밟아버리지 그래노니까……."

늙다리 고교생 김용필(52세, 건설업)은 대동고의 명물이었다. 광주 재야인사들의 사랑방인 양서협동조합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대동고 죽암독서회 회장으로 활약하던 그는 5월 19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을 규탄하는 교내집회를 주도했다가 수배돼 27일 체포되었다.

"보안대에서 당한 고문이요, 말도 못합니다. 자기가 요구하는 답을 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고문해요. 걔들은 얘가 기절을 할 것이다 안할 것이다를 알아요. 그 순간에 딱 멈춰요. 좀 정신 차려서 심호흡을 하고 나면 또 합니다. 저는 온몸이 까맸어요. 부어가지고 몸의 굴곡선이라던가 형체가 없어져요. 저뿐 아니라 5·18  연관자들이 그때 엄청난 인권유린을 당했어요. 다른 동지들이 잘 모르는 목격담이 있어요. 5월 28일 새벽 광주 서부경찰서 보안대를 거쳐 상무대를 들어가는데 육군 영창 마당에 부녀자 수십 명이 발가벗겨진 채 전부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서치라이트가 음부를 비추고 있고……. 그런 수모를 당했어요."

장신환
 장신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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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환(55세, 원광디지털대학교 교수)은 당시 휴학생 신분으로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 투쟁을 하다 이듬해인 1981년 3월에 구속됐다.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이 팡파르를 울릴 무렵, 그는 내란선동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쓰고 남산 안기부에서 한 달 넘게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5월 18일부터 신문이 까맣게 깎여 나왔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긴박한 연락들이 올라왔죠. 광주가 터졌다. 광주에 내려가야 된다. 근데 교통이 다 막혔다……. 반신반의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잔혹하게 진행될까. 여러 가지 경로로 확실한 사실임을 확인하고 그 내용을 등사기로 인쇄해서 국내와 해외에 동시에 알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81년 초 남산에 잡혀가서 뭐 고생 많이 했죠. 거기서는 거울 볼 일이 없으니 자기 형상이 어떤지 잘 모르지. 그런데 복도에서 다른 사람을 보면 너무너무 겁이 나는 거야. 퉁퉁 붓고 터져가지고 까만 사람이 걸어다녀요. 마치 영화에 나오는 좀비처럼……."

좀비의 세월

'좀비의 세월'은 감옥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오랜 세월 그들은 불령선인 취급을 받고 살았다. 정동열은 '할 짓이 없었다'고 했다.

"81년 전두환 취임 특사로 나왔는데 고향에 갔더니 지서장이 부르드라고. 니가 여기 있으면 보고서도 계속 올려야 되고 머리가 아프다, 차비 줄 테니까 서울 올라가서 좀 조용해지면 내려와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친구놈 고무신 신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근데 헐 짓이 없더라고요. 가방끈은 짧지, 취직을 해볼라고 해도 신원조회 들어가지……. 탄광에 가서 일을 해볼라고 해도 안 되고, 사우디를 나가볼라고 해도 안 되고, 그래서 구두닦이도 하고 온갖 잡일을 하고 돌아댕긴 거죠. 안 해 본 일 없어요, 서울에서."

항쟁 당시 어린 고교생 친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숱하게 지켜본 김용필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뒤바뀐 것 같은' 죄책감에 20년 동안 망월묘역에 가질 못했다. 그는 친구들이 묻혀 있는 광주를 떠나 서울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김용필
 김용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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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이후에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한편 책도 보고 하면서 나름대로 5·18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어려움도 많이 겪었어요. 5·18에 대한 편견 때문에 한동안 서울에서 자취방을 못 구했어요. 방을 안 줘요. 하숙집도 마찬가지고요. 방 구하러 가면 집주인들이 하는 첫마디가 뭐냐면 '광주 사람', '전라도 사람'입니다. 전라도 사람한테는 방을 안 주겠다는 거지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간부였던 정경자(53세. 5·18민중항쟁 서울기념사업회 사무총장)는 5·18관련자로 지명수배돼 피해있던 중 6월 1일 체포되었다. 사대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교사의 꿈을 키워 온 그는 90년대 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도 교사 임용을 받지 못했다.

"90년대 중반까지 보안심사라는 것이 있어서 시국사건 관련자들은 임용명부에 있어도 임용을 안 해 줘요. 민주정부라는 김대중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이제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싶어 시국사건관련 미임용자들을 규합해서 특별채용싸움을 했어요. 3년간 치열하게 싸운 끝에 학교로 다 들어갔는데, 또다시 충격이 왔어요. 아이들이 5·18을 모르는 거예요. 5·18 아는 애가 한 반에 한두 명이나 될까? 그때가 전교조 조합원이 십만이라고 하던 때였어요. 진짜 충격이었죠."

31년이 지난 오늘도 그들의 꿈에는 고문기술자가 등장하고, 수면제와 술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고 5·18묘역이 민주화 성지가 된 오늘, 그들은 왜 그날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좀비의 세월'이 끝나지 않은 것은 단지 그들의 몸에 새겨진 폭력의 기억 때문인 것일까.

청산되지 않은 역사

정경자
 정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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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51세,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은 81학번으로, 광주항쟁의 충격과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진정한 의미의 광주세대다. 1988년 동생 박래전이 '학살원흉 처단'과 '운동대오의 통일단결'을 외치며 분신한 이후 인권운동으로 방향을 틀어 진보운동의 영역을 확장해 왔다.

"저는 '386'이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해요. 우린 광주세대다. 정말 바들바들 떨면서 가리방으로 긁은 조악한 유인물 돌려보고 광주에서 올라온 친구의 경험담을 전해 들으면서 광주의 진실이 대학사회에 알려졌거든요.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을 던질 수 있다.'는 80년대 운동 특유의 비장함, 이념성, 과격함 같은 것들도 광주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6월항쟁도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게 아니라 80년부터 축적돼 온 민주화 역량이 폭발한 거죠. 물론 그 한계점도 그대로 안고 있는 거고요."

정경자는 '386'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박래군의 말에 적극 동의를 표했다.

"386이란 말이 우리 5·18 세대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혀 버렸어요. 5·18정신은 '광주'와 '5월'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되거든요. 저는 80년대 운동의 비약적인 성장과 6월항쟁, 91년 대투쟁을 만들어낸 동력이 바로 5월정신에 있다고 봐요. 그런데 87년을 기점으로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우리 운동이 분산되고 정작 5·18의 과제와 5·18정신은 놓쳐버렸다고 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권력의 본질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선 어떤 수준의 결의가 필요한가를 보여준 5월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박래군
 박래군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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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해 박래군과 김용필은 5·18 민중항쟁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광주 해결 5원칙'이라고 운동 주체들이 합의한 게 있었어요.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배상, 기념사업, 명예회복……. 이건 순서를 바꾸면 안 되는 것들이거든요. 그런데 노태우 정권이 보상을 해주니까 받아먹어 버리면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라고 하는 것들이 사라져 버렸어요. 과거사 청산 한다고 전두환, 노태우 다 구속시켰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요구로 석방돼 버리거든요. 5·18정신이 급속도로 희석돼 버리는 거죠. 사실 그때 그 힘으로 인적 청산 밀고 나갔어야죠. 5·18로 훈장 탄 놈들 공직에서라도 쫓아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정치인들이든 검판사든 쫓아냈으면 달라지는 거거든요. 인적 청산 못하니까 발목 잡히고 '잃어버린 십년' 얘기해 쌓고 그렇게 되는 거죠."(박래군)

"광주 5·18단체가 올바르게 5월 정신을 계승해가지 못하는 부분이 사실 많이 노출되고 있어요. 광주에서도 5·18단체가 대접을 받는 게 아니고 오히려 광주정신을 훼손시키는 이익단체로 변질돼 있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걸 반성을 해야 되고요. 과거청산, 저는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아요. 5·18 관련자들은 아직도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데, 국민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사과 한 마디 없이 뻔뻔하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29만원 밖에 없는 집단이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영령들에게 가서 꽃 한 송이 올리면 다 잊을 수 있어요."(김용필)

오월, 우리는 영원을 보았다

정경자는 항쟁 전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짝수달 18일에 만나는데 이상하게 다들 만나기만 하면 꼭 5·18 이야기를 해요. 왜 저 분들은 만나기만 하면 5·18 이야기를 할까. 그 고통스런 이야기를……. 그분들에게 그 시간은 고통만이 아니었던 거예요. 자기한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던지고 큰 용기를 냈을 때의 해방감과 자유, 그이들끼리의 아름다운 교감, 해방공동체의 감격과 기쁨을 누려 본 행복한 시간이었던 겁니다. 5·18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게 아니라 이런 이야기도 좀 됐으면 좋겠어요."

정경자의 말에 장신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총과 죽음만이 보이는 극도로 고립된 상황에서 서로 격려하고 돕고, 굽힘없이 싸우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민군에게 앞다퉈 주먹밥을 건네고……. '완벽한 순간' 또는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때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는 천국을 맛보았던 사람들 아닐까 싶어요. 천국은 저 멀리 있거나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수많은 영혼이 한마음으로 순수하게 결집돼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그 천국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하다……."


5·18민중항쟁 제31주년기념 서울행사

○ 시민추모: 5.17(화) 10:00~5.19(목) 14:00
○ 기념식: 5.18(수) 11:00
○ 공연: 5.18(수) 19:30~21:30
○ 전시회: 5.17(화) 10:00~5.20(금) 20:00
◇ 장소: 서울광장(서울 시청 앞 광장)

* 우천 시에도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과연 그럴까. 피와 눈물, 총성으로 얼룩진 그 시간은 과연 '영원'이었을까. 31년을 되짚어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광주 본양지서의 순진한 방위병 정동열은 과연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수줍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 같아요. 80년 5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당당한 시간이었거든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희망세상>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태그:#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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