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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1. 2002년 5월 조선의 건국 수업 중 들려오는 한 학생의 질문.
"샘. 조선의 태조가 왕건이죠?"

상황 2. 2006년 6월 수업시간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학생을 나무라자 돌아오는 답.
"저 이과갈 거에요. 국사는 필요없어요."

상황 3. 2008년 10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6년간 문제없이 가르쳐온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바꿔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짐.

2002년 교직에 나온 후 제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입니다. 기본일 거라 믿었던 사소한 역사적 사실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학생들과 교육과정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교과에 대한 한탄, 그리고 교육이 정치에 휘말리는 것을 막는다고 나름 노력했지만 실패한 경험.

그러는 사이사이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역사 교육이 부실하다며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다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질 때 그런 이야기가 나오곤 했죠(그러고 보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초부터 몇몇 국회의원이 한국사를 필수 교과로 지정할 수 있도록 교육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더니만 지난 4월 22일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역사교육강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것도 일본의 역사왜곡 '덕분'이겠죠. 역사 담당 교사로서는 일본이나 중국에 감사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듣곤 합니다.

이번 방안의 핵심 내용은 내년 입학하는 고등학교 1학년생부터 한국사 교과를 필수로 한다는 겁니다. 또 교원임용시험에서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자격증을 필수 요건으로 하도록 추진하고, 공무원 채용시험에서도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관계기관에 협조를 구하겠다고도 합니다.(인터넷 한겨레 4월 22일 기사 인용)

그 내용을 두고 역사교육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환영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다만, 한편에선 수능에서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지 못해 학교 현장에서는 반쪽짜리 교육이 될 것이라는 비판어린 시선도 존재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편에선 모든 교과가 선택인데, 한국사만을 필수로 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며 교과 이기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한국사 필수 지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역사 교육(정확히는 국사 교육)이 부실하다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현실을 조금이나마 반영할 수 있는 안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내년에 들어오는 신입생들과는 제가 지난 9년간 겪었던 위의 상황을 다시 겪을 일은 없게 될까요? 상황 1과 2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이과 모두 한국사를 수능에서 필수로 하면 되겠죠. 하지만, 저는 반댑니다. 이미 입시에 치어 허덕이고 있는 학생들에게 또 다른 짐을 지우는 꼴이 될테니까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차라리 저는 한국사를 수능 선택과목에서 아예 제외했으면 합니다. 대신 문·이과 모두 내신에는 반영하도록 하면 입시 부담은 줄이고, 수업은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딱딱한 교과서 중심의 수업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부터 한국사 교과서가 검인정체제로 바뀌었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있지는 않지만, 구성방식이나 제시하는 자료들은 나름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는 편입니다.
▲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이번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부터 한국사 교과서가 검인정체제로 바뀌었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있지는 않지만, 구성방식이나 제시하는 자료들은 나름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는 편입니다.
ⓒ 김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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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안을 접하면서 오히려 걱정되는 건 세번째 상황입니다. 역사 교육이 정치적인 문제에 결부되어 진행된다는 것은 언제든지 적극적인 개입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는 까닭입니다.

전국 고등학교의 절반 가까이가 수년간 아무 문제없이 교재로 채택해 온 교과서를 몇몇 정치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다고 수정을 강요하고, 절차를 어겨가며 교과서 재선정을 강요했던 그 상황이 재현될 수도 있겠다 싶거든요. 이번에 새로이 시작된 한국사 교과의 경우, 교과서의 2/3 이상을 근현대사에 할애해 비슷한 문제가 재발할 가능성은 늘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역사 인식을 갖도록 도움을 주고자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 의식이라고 하는 것에 정답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특정 정치 세력이 생각하고 바라는 역사 의식이 학생들에게 강요되어서는 더욱 안될 이야기입니다.

이미 우리는 지난 몇년간 광복절과 건국절 논쟁, 친일파 인명대사전 편찬으로 다시 불거진 친일파 논쟁, 얼마 전 이승만의 후손의 사과 의사 표명 등 수많은 역사적 논쟁거리들을 겪어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은 다양한 사료들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논점들을 제공해줌으로써 학생들 스스로 자기 생각을  세우고 강화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학생들 개개인의 독자적인 역사 인식이 세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태그:#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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