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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거리는 지하철. 과연 어린이들은 이것을 잡고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을까
 흔들거리는 지하철. 과연 어린이들은 이것을 잡고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을까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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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만나러 홍대로 가는 어느 날 저녁, 흔들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긴다. 사랑, 연애에서 소외를 느끼는 사람들은 지하철의 덜컹거림을 으레 고독과 낭만의 심장박동처럼 여기곤 한다. 옆 좌석에는 저녁이지만 생글생글한 한 아이가 주춤거리며 서 있다. 문득 드는 의문, 저 아이는 무엇을 잡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는 걸까.

아래 기사는 취재를 바탕으로, 6세 어린이의 관점에서 풀어낸 가상기사다.

"도대체 난 뭘 잡아야 하는 거야?"
[재구성] 6세 운성이의 7호선 여행기

"그래? 상호가 벌써 군대에 간다고?"

엄마가 큰이모와 전화로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올해 스물셋인 상호형은 대학교에서 신문사를 했단다. 3년 동안 바쁘다고 얼굴도 안 보여주더니 이제 군대까지 간단다.

"그래, 그래. 내가 오늘 일이 있어서 못 가니까 효순이랑 지수랑 우리 운성이랑 해서 가산 디지털단지로 보낼게. 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애들이 나올 거야."

친척 형아가 군대에 간다니 아마 맛있는 걸 먹으려나 보다. 효순이 이모랑 지수 이모와 함께 형아네 집인 가산 디지털단지로 간단다.

옷을 차려입고, 운동화도 신고 나니 엄마가 내게 다가온다. 주의를 단단히 주려나 보다.

"운성아. 엄마 말 잘 들어. 지하철에 타면 이모들 손 꼭 붙잡고 타야 해. 알겠지? 지하철 안에서 뛰어다니지 말고 장난도 치지 마. 다치면 너만 손해야. 응?"

옆에서 모자를 씌워주던 효순이 이모는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언니, 괜찮아. 운성이가 이제 꼬마애도 아니고, 알아서 얌전히 있겠지."
"아니야, 얘, 네가 애 한번 놔 봐라, 걱정되나 안 되나. 난 요 녀석이 바닥에 앉을 때마다 일으켜 세우느라 허리가 다 아파. 아무튼 애 잘 봐야 해. 알겠어?"

"걱정 마, 언니. 운성이가 얼마나 착한데 얌전히 갈 거야. 그렇지 운성아?"
"응. 이모. 히히."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터벅터벅 걸어간 건대입구역. 엄마 말씀처럼 이모들의 손을 꼭 잡고 간다. 번잡하기만 한 건대입구역. 내 눈에는 진짜 새로운 세상이다. 수많은 사람과 이름 모를 기계들이 사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곳은 놀이동산보다 신기하다.

세상에 이렇게 깊은 에스컬레이터가 있나 생각하다가 지하철 7호선을 탄다. 7호선을 타니 짙푸른 연두색과 회색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처럼 자리가 났는지 두 이모의 행동이 엄청 빠르다. 이모들이 자리에 앉고 나니 지수 이모가 내게 말을 건넨다.

"운성아. 이리 와. 이모 무릎에 앉아."

아니, 이럴 수가. 또래보다 성숙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내가 꼬마애들이나 하는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엄마 말씀을 잘 들어야 하니까 지수 이모 무릎에 앉는다.

'덜컹, 덜컹, 덜컹, 덜컹….'
뚝섬유원지에서 청담으로 건너갈 때 보았던 한강을 지나치고 나니 창밖은 어둡기만 하다. 이모도 내가 무거운지 자세를 자주 바로잡는다. 시선을 지하철 안으로 돌려본다. 넓게 트여 있는 중앙, 곳곳에 사람들이 서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 거실보다는 넓어 보인다.

효순 이모와 지수 이모는 수다 떨기 바쁘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슬그머니 지수 이모의 무릎에서 내려온다. 이것저것 모두 신기한 나는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디뎌 본다.

어린이들은 지하철 안에서 마땅히 잡을 곳 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끝 좌석의 봉이 있지만 출입구 주변이라 부모들은 걱정을 떨쳐 낼 수 없다
 어린이들은 지하철 안에서 마땅히 잡을 곳 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끝 좌석의 봉이 있지만 출입구 주변이라 부모들은 걱정을 떨쳐 낼 수 없다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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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은 논현, 논현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속도를 서서히 줄이는 열차가 논현역에 왔나 보다. 지수 이모는 이리 오라는 듯 손짓한다. 몸이 기우뚱하는 것을 느낀다. '끼익'하고 멈추는 소리는 들리지만 몸이 쉽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꽈당!' 결국 열차 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만다.

"운성아! 그러니까 이모 무릎에 앉아 있으라고 했잖아! 에이, 지지. 어서 손 털고 일어나."

지수 이모가 괜히 나한테 화를 낸다. 그래도 신기한 걸 어쩌나. 열차가 역을 지나칠수록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고를 반복한다. 이모 무릎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이젠 내가 불편하다. 다시 슬그머니 내려와 문쪽으로 향한다. 그래도 저기에는 세로로 봉이 있으니 넘어지지는 않겠지?

키가 작은 이와 어린이를 위해 '낮게' 설치된 손잡이. 어린이들은 이 손잡이를 잡는다 해도 까치발을 들 수밖에 없다
 키가 작은 이와 어린이를 위해 '낮게' 설치된 손잡이. 어린이들은 이 손잡이를 잡는다 해도 까치발을 들 수밖에 없다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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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성아! 거기는 문 열리는 데잖아. 위험하니까 빨리 이리 오지 못해!"

효순 이모다. 효순 이모는 화가 나면 무섭다. 입술을 툭 내밀고 이모한테 간다.

"운성아, 지하철에서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해요. 응? 위에 손잡이가 있네. 이거 한 번 잡아봐, 우리 운성이 얼마나 키가 컸는지 한 번 보자."

위를 올려다본다. 다른 손잡이에 비해 약간 낮게 내려온 손잡이가 눈에 띈다. 손을 뻗어보지만 잡히지 않는다. 결국 까치발을 들고서야 겨우 잡을 수 있다. 한 정거장 정도를 잡고 가니 발도 아프고 팔도 아프다. 결국 이모 무릎 위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괜스레 슬프다. 효순 이모가 나를 바라보더니 한 마디 건넨다.

"운성아. 왜 그래? 화났어? 어디 불편해?"
"저거, 손잡이 잡고 싶은데…. 잡아도 너무 힘들어."

"그래? 운성아 저건 어린이나 키가 작은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래. 우리 운성이 키 좀 컸는데 아직은 힘든가 보구나."
"나 키 많이 컸는데…."

효순 이모 무릎 위에 앉아 골똘히 생각해 봤다. 여기서 잘못했다가는 다칠 수도 있겠다, 다치면 엄마한테도 혼나고 친구들도 잘 못 만나겠지? 생각해보니 안 다치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운 것 같다. 곰곰이 배웠던 내용을 되새겨 봤다.

지하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사례들. 하지만 이는 모두 어린이 '개인'만의 잘못 때문이란다
 지하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사례들. 하지만 이는 모두 어린이 '개인'만의 잘못 때문이란다
ⓒ 행정안전부 교통ㆍ학교 안전지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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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해 보니 다 나 때문에 다치는 것 같다. 내가 장난쳐서, 내가 손잡이를 안 잡아서 다친다고 배웠다. 아니, 잡을 수 있는 손잡이도 부족한데 나보러 어쩌라는 거야? 생각해보니 화가 난다. 그래서 효순 이모한테 물어본다.

"효순 이모, 지하철에서 안 다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게….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되겠지?"

"자리가 없으면?"
"흠…. 사람들이 양보해 주지 않을까. 넌 어린이잖아."

"사람들이 양보 안 해주면?"

이모들이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저 표정은 내가 산수 문제 풀 때 나오는 표정 같다. 이모들도 모르는 걸까?

"차라리 이러면 어떨까? 어린이 전용칸을 만드는 거야. 지하철의 맨 앞이나 맨 끝. 이런 데에는 벽 쪽에 공간이 남잖아. 거기에 엄마랑 아빠랑 아이들이 각자의 키에 맞게 잡을 수 있는 손잡이를 만드는 거지. 그럼 안전할 거 같은데?"

질문은 내가 했는데, 효순 이모는 지수 이모한테 말한다. 다시 이모들의 수다가 시작되려나 보다. 난 잠자코 듣기나 해야지.

"그래, 언니. 그것도 괜찮겠다. 지금처럼 딱딱한 재질이 아니라 아이들이 부딪혀도 크게 다치지 않는 고무 같은 걸로 손잡이를 둘러도 좋을 것 같아."

효순 이모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지수 이모가 지하철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을 잇는다.

5ㆍ6ㆍ7ㆍ8호선 내부가 이렇게 바뀐단다. 어린이의 안전을 위한다면 적어도 2칸 이상에는 서서가는 성인 고객을 위한 크로스바가 아닌 실질적인 어린이용 손잡이가 필요할 것이다
 5ㆍ6ㆍ7ㆍ8호선 내부가 이렇게 바뀐단다. 어린이의 안전을 위한다면 적어도 2칸 이상에는 서서가는 성인 고객을 위한 크로스바가 아닌 실질적인 어린이용 손잡이가 필요할 것이다
ⓒ 위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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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근데 이번에 5·6·7·8호선 내부가 바뀐다는 거 봤어? 좌석을 중앙으로 놓고 창가 공간을 활용한다지?"
"응, 저번에 봤어. 뭔가 새롭게 보이기는 하더라."

"그래, 그걸 이용하는 거야. 계획안을 보면 창가에 서서 가는 고객들을 위해 크로스바를 설치한다고 들었어. 그런데 그건 결국 어른들의 허리 받침대밖에 안 될 것 같아. 그 공간을 활용해서 일부 객실에는 어린이를 위한 안전 손잡이를 만드는 건 어떨까?"
"어머, 그거 좋다 얘. 어차피 바뀌는 과정이니 그런 시설을 도입하면 애들이 안전하게 탈 수 있을 것 같아. 창밖도 볼 수 있고 말이야. 지금은 애들이 좌석에 올라가서 등을 돌려야 밖이 보이잖아. 더 안전하겠다."

"그래, 언니. 어린이 안전은 결국 미래의 안전이나 다름없잖아. 이렇게 어린이들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어떤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겠어? 게다가 미래의 안전을 어린이 자신과 속한 가정에만 책임 지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봐.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효순 이모랑 지수 이모는 마치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공익광고 같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간다. 나 같은 어린이들은 무조건 지하철에서 얌전한 인형처럼 있어야만 할까.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2007년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는 지하철 공사에 '어린이나 키가 작은 사람들을 위해 손잡이의 높이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했고, 이 제안은 부분적으로 반영됐다. 2010년 8월에는 대전도시철도공사가 지하철 내에 어린이용 손잡이를 시범운영했다. 각 분야에서 지하철 내 어린이 안전권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실제 서울시 지하철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그 시도의 실효성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하철에 무릎을 꿇어 어린이의 키에 얼추 맞춘 다음 손을 뻗어봤다. 유난히 팔이 긴 기자도 '안전'을 잡기는 힘들었다
 지하철에 무릎을 꿇어 어린이의 키에 얼추 맞춘 다음 손을 뻗어봤다. 유난히 팔이 긴 기자도 '안전'을 잡기는 힘들었다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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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7호선에서 만난 한상덕(39)씨는 "현행 어린이용 손잡이는 실효성이 없어 보인다"라며 "자신보다 신장이 큰 어른들이 가득 찬 지하철 안에서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웹진 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bonzine.tistory.com)



태그:#지하철, #어린이, #안전, #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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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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