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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무작정 남쪽으로 나선 발걸음은 나를 지리산으로 이끌었다. 가는 도중에, 경남 하동 쌍계사 벚꽃십리길을 시작으로 남도를 둘러보기로 결정했지만 어차피 하루는 어디선가 묵고 길 떠나야 할 터. 나는 하룻밤 지낼 장소로 또 다시 지리산, 그 중에서도 화엄사를 꼽았다. 으레 그랬듯이.

그러고 보면 내게 화엄사는 항상 여행의 시작이었다.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든, 남도 일주를 시작하든. 그것은 화엄사가 지리산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벽 화엄사의 장엄한 모습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이 틀 때 볼 수 있는 지리산의 장쾌함과 이를 온 몸으로 끌어안는 산사의 포근함.

전남 구례 화엄사 관광지구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아침 일찍 아내, 아이와 함께 화엄사로 오르기 시작했다. 지리산 기슭 산청 태생이면서도 산 너머 구례는 처음이라던 아내는 산청 쪽에 큰 사찰이 없기 때문인지, 일주문부터 그 규모가 심상치 않은 화엄사를 보면서 할 말을 잊은 듯 했다. 아이 역시 이렇게 큰 사찰은 처음인지라 눈이 휘둥그레. 녀석이 지금 보는 장면을 나중에도 기억하면 좋겠다는 건 역시 내 욕심이겠지.

현판이 인상적이다
▲ 화엄사 불이문 현판이 인상적이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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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화엄사
▲ 백매화와 만월당 4월의 화엄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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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길이 끝나는 곳에 화엄사의 작지만 고풍스러운 불이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라고 적힌 현판이 유독 돋보이는 불이문. 자료에 따르면 이 현판은 1988년 이 산문을 신축하면서 석전 황욱이라는 분의 글씨를 받아 건 것이라고 하는데, 석전은 이 글자들을 오른손의 수전증 때문에 왼손으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기교 넘치는 다른 현판과 달리 글자들이 담백하고 유독 정직해 보이는 것은.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에 도착. 갑자기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커다란 칼을 휘두르고 있는 사천왕들이 무서웠는지 아빠에게 착 안겨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금강문을 지나면서 동자들을 볼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그래도 사천왕들은 꽤 무서웠나 보다. 설마 전생에 너무 많은 업보를 쌓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 테지.

대웅전과 각황전... 우주의 중심에 서다

천왕문을 지나니 보제루가 보였고, 1층이 막힌 채 '루(樓)'라는 명칭만을 간직하고 있는 보제루를 돌아 들어가니 그곳이 바로 화엄사의 중앙이었다. 대웅전과 각황전이 보이는 바로 그 자리. 화엄사가 그 존재 자체로서 설명하고 있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내 눈에는 대웅전보다 각황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학자들에 따르면 각황전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대웅전을 각황전과 대등하게 보이기 위해 보제루 옆으로 동선이 짜였다고는 하던데, 그래도 크고 웅장한 것에 더 감탄하는 속세 범인의 시선에는 각황전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설레는 마음
▲ 각황전이 보입니다 설레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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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웅장함에 말을 잃습니다
▲ 올려다 본 각황전과 석등 그 웅장함에 말을 잃습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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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다 보이는 각황전의 웅장함에, 그리고 그 고색창연한 단청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마냥 거대한 것 같으면서도 오밀조밀하고, 마냥 화려할 것 같으면서도 단아한 각황전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 힘 있게 우뚝 서 있는 석등에 시선이 꽂혔다. 볼 때마다 그 크기와 위엄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석등. 본디 임진왜란 때 타버린 3층의 장륙전에 맞춰져 지어진 터라 석등의 규모가 엄청난 것이라는데, 어쨌든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오랜 세월 많은 이들에게 나와 같은 감명을 주었다 생각하니 석등에 붙어 있는 푸른 이끼조차 범상치 않아 보였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그 석등
▲ 화엄사 석등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그 석등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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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화엄사의 화룡점정, 홍매화

예와 다름없이 각황전 앞 계단을 오르는데, 각황전 옆에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삼발이에 DSLR 카메라를 올려놓은 뒤 무언가를 열심히 찍는 사람들. 화엄사는 산 바로 밑이라 봄꽃은 아직 피지 않았는데 무얼 저리 열심히 찍는 게지?

그들의 시선을 따라 간 자리에는 처음 보는 꽃나무가 있었다. 각황전과 나한전 사이 새빨간 꽃을 드리운 채 힘껏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나무. 전에 왔을 때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혹은 짙푸른 나뭇잎만 있어서 그 존재마저 알지 못했었는데, 4월 화엄사의 주인공은 바로 그 나무인 듯하였다.

각황전의 산증인
▲ 화엄사 홍매화 각황전의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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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그리운 홍매화
▲ 4월 화엄사의 화령점정 벌써부터 그리운 홍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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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매화라고도 불렸다는 홍매화
▲ 흑매화 흑매화라고도 불렸다는 홍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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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심상치 않아 보이는 나무는 그 앞에 친절하게도 설명을 달고 있었는데, 이 홍매화는 조선 숙종(1674~1720)때 각황전을 중건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계파선사가 심었다고 적혀 있었다. 각황전의 중건과 함께 화엄사의 역사를 올곧이 지켜본 관찰자라는 것이었다. 다른 홍매화에 비해 꽃이 검붉어 흑매화라고도 불린다는 이 나무.

아름다웠다. 모든 사찰들은 올 때마다 그 모습을 달리하던데, 저번에는 황금빛 각황전이 나의 심금을 울리더니 이번에는 이 홍매화가 봄을 기다리는 화엄사의 화룡점정이 되는구나. 아마도 매년 4월 이맘때가 되면 난 화엄사의 홍매화를 그리며 이곳 지리산을 그리워할 테지.

황금빛 모습
▲ 동 틀 때의 각황전 황금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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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벚꽃십리길을 가야한다는 마음에 서둘러 화엄사를 나서는데 금강문 근처에서 일군의 학생들과 마주쳤다. 수학여행을 왔는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정도의 인파. 물어보니 경북 영덕에서 온 중학생들이었다. 왁자지껄 시장바닥이 되어버린 아침의 산사. 이들을 피해 일찍 올라와서 구경을 했으니 망정이지, 이들과 함께 사찰에 도착했더라면 생각하기도 끔찍했다.

수학여행 중
▲ 나는 학생이다 수학여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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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래도 기독교인인데 이런 절에 와야 되니?"
"어디까지 걸어야 해? 이 절 무지 크네.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안 되나?"

무심코 '그 나이에 걸맞은' 대화들을 듣고 있자니 문득 내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이 생각났다. 불국사 연못에 던져진 동전들을 모아 밤새 고스톱을 치고, 보이는 탑마다 그 앞에서 친구들과 사진 찍었던 그때. 당시에는 내가 다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우리와 함께 불국사를 구경하던 이들은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그래도 오늘의 나처럼 그것이 학창시절의 특권이려니 하고 넘어갔을 터.

다시 불이문을 나와 섬진강으로 달려가는 길. 아내가 한마디 한다.

"산사는 이래서 아침 일찍 가야 하는 거구나."

그렇다. 조용한 산사를 원하신다면 아침 일찍 가 보시기를.


태그:#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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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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