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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서 넘어오는 등산객들이 아이들에게 맛난 먹거리를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쏟아지는 칭찬에 힘이 납니다.
▲ 앵벌이? 선암사에서 넘어오는 등산객들이 아이들에게 맛난 먹거리를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쏟아지는 칭찬에 힘이 납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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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4시간 넘는 산행을 마치고 힘겹게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반갑게 아이들 배낭을 받아든 아내가 배낭 속 내용물을 보더니 한마디 합니다. "산에서 애들에게 앵벌이라도 시킨 거야?"

아내는 둘째 아토피성 피부염 때문에 먹을거리에 꽤 신경을 씁니다. 이번 여행도 아빠의 무분별한 애정을 알고 있기에 현관문 나서는 순간까지 아내의 잔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산행 하루 전부터 군것질거리 사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터라 배낭 속 먹을거리는 뭐냐고 따지듯 묻습니다. 제가 사준 것도 아닌데 핀잔을 들으니 억울합니다.

이번 산행의 시작은 저의 방정맞은 입 때문입니다. 몇 주 전 회식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두 아이가 내일 토요일이니 어디든 놀러 가자며 조릅니다. 엉겁결에 동네 뒷산은 시시하다며 조계산 산행을 제시해 버렸습니다.

그 말에 아이들은 환호성이고 애들 엄마는 괜한 기대를 심는다며 타박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지난 토요일은 궂은 날씨로 산행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빠의 호언장담은 어물쩍 넘어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기억력과 기대는 저와 반비례인가 봅니다. 며칠 전부터 산에 간다는 약속을 지키라며 저에게 다짐을 놓습니다. 결국, 지난 9일 아침 불가능한 산행을 위해 아이들과 배낭을 둘러맸습니다.

송광사 초입입니다. 첫째는 벌써 지친 듯 둘째에게 엄살을 피웁니다.
▲ 가야할 길 송광사 초입입니다. 첫째는 벌써 지친 듯 둘째에게 엄살을 피웁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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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집 옆을 흐르는 시냇물가에서 스님이 봄을 찾아 담고 있습니다.
▲ 봄과 스님 절 집 옆을 흐르는 시냇물가에서 스님이 봄을 찾아 담고 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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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거란 얄팍한 기대 여지없이 무너지다

장소는 순천 조계산입니다.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넘어야 할 높이가 700m 이상입니다. 두 아들과 함께 오르기엔 버거운 산입니다. 갑자기 얄팍한 생각이 듭니다. 중간쯤 오르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못 이기는 척 내려올 속셈으로 송광사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제 마음을 읽었는지 버스는 봄 향기를 가르며 시원스레 시골길을 달립니다. 2시간을 달려 도착한 송광사에는 봄을 찾아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모두들 화사한 봄옷에 가벼운 발걸음입니다.

반면, 두 아들과 저는 꽉 동여맨 등산화에 결의에 찬 표정입니다. 송광사는 큰 절답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송광사를 지나지도 않았는데 매표소에서 몇 걸음 뗀 큰 아들 걸음이 더뎌집니다.

걷기 싫은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 상태면 산중턱쯤 오르다 내려올 수 있으리란 기대입니다. 그러나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저의 기대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심먹던 곳 옆에 폭포가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니 떨어지는 물소리가 시원합니다.
▲ 폭포 점심먹던 곳 옆에 폭포가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니 떨어지는 물소리가 시원합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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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챙겨주신 점심을 맛있게 먹습니다. 가져간 물이 점점 줄어듭니다.
▲ 늦은 점심 엄마가 챙겨주신 점심을 맛있게 먹습니다. 가져간 물이 점점 줄어듭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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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하는 동생을 기다립니다. 행여 떨어질세라 자꾸 고개를 돌립니다.
▲ 동행 힘들어 하는 동생을 기다립니다. 행여 떨어질세라 자꾸 고개를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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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유혹이 산에서 내려오다

맞은편 선암사에서 출발해 산을 넘어 온 등산객들이 애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 놓습니다. 그 말에 힘 받은 아이들은 저보다 앞서 걸으며 씩씩하게 올라갑니다.

물론, 저도 산을 좋아해서 힘들지는 않지만 애 둘과 함께 산에 오르는 일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데 꽤 가파른 길을 오르며 힘든 표정이 될 때면 어느새 등산객이 나타납니다.

등산객들은 조그마한 애들이 산에 오르는 일이 신기하고 기특한지 아이들을 향해 한마디씩 합니다. 또 초콜릿과 초코파이, 그리고 음료수를 고사리 손에 쥐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동안 엄마의 철저한 보호아래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들이 배낭을 가득 채웁니다. 아이들은 무슨 횡재냐는 듯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등산객이 나타나면 그들만의 야릇한 신호를 보내기도 합니다. 도중에 포기하고 내려가기엔 너무 달콤한 유혹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오르막입니다. 숨이 턱에 차오릅니다. 드디어 고개를 넘습니다. 내리막이 보입니다.
▲ 굴목재 끝이 보이지 않던 오르막입니다. 숨이 턱에 차오릅니다. 드디어 고개를 넘습니다. 내리막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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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약속 깨는 일이 무슨 자랑처럼 됐어"

두 아이와 함께 힘들게 산을 오르다보니 집에 있는 아내가 점점 얄미워집니다. 무모한 산행을 막을 생각은 않고 비빔밥과 물 두통 그리고 당근 몇 개를 썰어 배낭에 넣어주며 잘 다녀오라고 제 엉덩이까지 토닥이던 아침이 생각납니다.

"애들과 약속이라고 무시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요즘 약속 깨는 일이 무슨 자랑처럼 됐어."라고 아내는 덧붙였습니다.

그렇게 조계산을 넘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하산 길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아이들에게 먹을거리를 주지 않더군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파른 오르막길을 종종 걸음으로 오르는 꼬맹이들이 힘들까봐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겠지요.

다행히 내려가는 길은 훨씬 쉬웠습니다. 아이들도 소풍 나온 듯 즐거운 토끼걸음입니다. 도중에 산중 보리밥집을 들러 맛난 음식도 먹었습니다. 배를 든든히 채운 초보 등산객은 쏜살같이 아래를 향해 달려갑니다. 위험하다고 소리쳐 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산행 중 만난 숲 친구입니다. 지난 가을 숨겨둔 열매를 찾고 있었을까요? 숲 탐험도 겸한 이번 산행에서 겨우 만난 녀석입니다.
▲ 숲 친구 산행 중 만난 숲 친구입니다. 지난 가을 숨겨둔 열매를 찾고 있었을까요? 숲 탐험도 겸한 이번 산행에서 겨우 만난 녀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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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할 약속 꺼내지도 말 것

동네 뒷산 오르던 실력으로 조계산을 두 아들과 오르겠다고 호기롭게 도전을 시작한 제가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던 힘은 등산객들의 지나친 관심(?)과 쏟아지는 칭찬이었습니다.

물론, 아직 어린나이라 화장실도 함께 가야하고 가끔은 힘들다고 투정도 부리기도 했습니다만 마주 오는 분들의 넘치는 관심으로 어렵지 않게 산을 넘었습니다.

이번 산행을 통해 큰 지혜를 얻었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애당초 말도 꺼내지 말아야합니다. 또 한 번 약속한 일은 꼭 지켜야 합니다. 약속의 중요함을 온몸으로 느꼈으니 이번 걸음이 헛일은 아닙니다.

산행 마친 다음날 이곳저곳 쑤시고 아픈 다리를 핑계 삼아 이부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데 큰애가 이상한 지도를 들고 옵니다. 그리고 신나서 하는 말 "아빠, 우리 조계산 갔다 왔지요, 그 옆에 백운산도 있어요. 다음엔 백운산 가요."

아이의 다그치는 말에 등 돌려 모로 누우며 자는 척했습니다. 멀리서 아침 밥상을 차리는 아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습니다.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아내의 말을 속으로 되뇌며 아침을 포기했습니다.

애들이 지도책을 가지고 제 옆에 다가왔습니다. 다음 목표로 제시한 백운산이 보입니다. 이러다 백두대간을 모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닌지...
▲ 목표 애들이 지도책을 가지고 제 옆에 다가왔습니다. 다음 목표로 제시한 백운산이 보입니다. 이러다 백두대간을 모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닌지...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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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계산, #송광사, #선암사,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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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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