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하조대해수욕장
 하조대해수욕장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2011년 3월 11일, 날씨 맑음.

걷다 보면 우리나라 곳곳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조대에서도 그랬다. 하조대의 기암절벽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그곳에 들어앉은 팔각 정자는 애초에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 있는 정자는 그때 세운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훗날 다시 세운 것이란다. 이런 곳이 하나둘이 아니다. 전쟁은 이렇게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정자마저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화를 입히니, 무섭기 짝이 없다.

하조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 은거하며 훗날을 기약했다 해서 두 사람의 성씨를 따서 '하조대'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이곳은 하조대 정자보다는 기암절벽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경치가 일품이다. 넘실거리는 동해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짙푸른 빛이다. 보면 볼수록 마음을 빼앗기는 바다라고나 할까.

하조대 등대
 하조대 등대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이곳에는 하조대 등대도 있다. 하얀색 등대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조대 해수욕장 앞에 있는 모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창을 통해 모래밭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방이었다(이 모텔에서 자는 건 두 번째다). 창문을 열면 바다가 몸을 뒤채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던 밤이었다. 평소보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기 때문이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 역시 평소보다 하얀 포말을 더 많이 쏟아냈다. 기온이 쑥 내려간 탓이었다.

동서울을 출발해서 하조대를 향하던 고속버스가 대관령을 넘을 때, 눈바람이 세차게 불었더랬다. 길 가의 나무에는 하얀 눈꽃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고. 달력이 나타내는 계절은 분명히 봄인데, 강원도에서는 겨울이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은 뱀처럼 떠날 줄을 모르고 있어, 계절이 뒷걸음질을 치는 것 같았다. 덕분에 겨울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아침이 되자 바람은 잦아들었고, 하늘은 말갛게 개었다. 걷기 좋은 날이다. 하긴 폭우가 쏟아지는 게 아니라면 어지간하면 다 걷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조대 정자
 하조대 정자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오늘(3월 26일)은 하조대부터 주문진항까지 걸을 예정이다. 그곳까지 직선거리로 따지면 20km 남짓일 것이나, 걷는 길이 직선이 아니니 최소한 4~5km는 더 걸어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동해를 끼고 걷는 길은 내 눈이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질리도록 볼 수 있게 해주리라.

하조대 해수욕장에서 하조대까지는 1.5km 정도 거리다. 하지만 하조대에서 기사문항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으므로 걸어갔던 길을 도로 걸어 나와야 한다. 이렇게 되면 걸어야 하는 거리가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 그래도 걷는 건 즐겁다. 혼자 걸으니, 동행을 신경 쓸 필요 없이 내 멋대로, 내 맘대로 걷는다.

기사문항에 들어섰을 때, 집집마다 태극기가 매달려 있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있자, 오늘이 무슨 날이지? 왜 태극기를 달았을까? 국경일인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3월 26일은 국경일 근처에도 안 가는 날이다. 이상하네, 이 마을에 뭔 일이 있는 건가?

그 궁금증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 어느 민박집에 걸린 현수막을 보면서 풀었다. 언제나 태극기가 휘날리는 마을이란다. 날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건 좋으나, 관리를 잘해야지. 태극기가 날이면 날마다 깃대에 붙어 비바람과 먼지를 잔뜩 맞다가는 종내는 때가 잔뜩 타 흰색바탕이 짙은 회색이 될 수도 있다. 꾀죄죄한 몰골의 태극기는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기사문항 등대
 기사문항 등대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기사문항의 등대는 버섯 모양이다. 멀리서 보니 영락없이 양양 송이다. 꿀꺽, 송이버섯전골이 먹고 싶어, 침이 넘어간다. 등대로 가는 길, 항구에 배를 대놓고 그물을 배에 싣는 한 쌍의 남녀를 보았다. 손발이 척척 맞는 걸 보니 오랜 세월동안 함께 뱃일을 한 부부겠거니, 한다. 항구 횟집 입구에는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낸 생선들이 매달려 눈길을 끈다.

기사문항을 이리저리 거니는데 스피커에서 팝송이 흘러나온다. 이 역시, 새롭다. 문득 보길도 청별항에 이른 아침부터 울려 퍼지던 구성진 트로트 가락이 생각난다. 항구에 어울리는 노래는 트로트일까, 팝송일까?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도 해봤다.

먼발치에서 보니 기사문 해수욕장 해변 모래밭에서 몸에 짝 달라붙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체조를 하고 있었다. 해변에는 그 남자밖에 없었다. 달밤도 아닌데 하필이면 저기서 체조를 하는 걸까, 다시 고개를 갸웃.

어어, 저 남자 왜 저러지?

기사문해수욕장
 기사문해수욕장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갑자기 동작을 멈춘 남자가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던 것이다.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닌데, 바다에 뛰어들기에는 계절이 너무 이르지 않나. 혹시, 나쁜 마음을 먹은 거야? 걱정스러워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남자가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파도타기를 하려고 찬 바닷물에 몸을 담근 것이고, 남자보다 앞서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타기를 신나게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바람이 일렁이고 있어서인지, 파도는 거칠게 그리고 쉬지 않고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는 남자의 몸을 덮치면서 해변으로 미끄러지듯이 달려온 뒤, 모래밭을 파고들면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두 사람이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 타는 모습을 나 말고도 지켜보는 이가 또 있었다. 바닷새 한 마리가 모래밭에 앉아 물끄러미 바다를,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음, 너도 나처럼 신기하더란 말이지.

무지 신나겠다. 바닷가에 서서 한동안 두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 무지 차갑겠지, 그지? 바닷새에게 물으면서 고개를 돌렸더니, 새는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작별인사나 하고 가지.

38선 표지석
 38선 표지석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기사문항을 지나 38선 경계석이 세워진 곳을 지났다. 이곳 역시 남북 분단과 전쟁의 상흔이 어려 있는 곳.


1945년 8월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일본 점령지의 전후 처리를 위해 설정한 임시 군사 분계선으로 하나였던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며 12개의 강과 75개 이상의 샛강을 단절시켰고, 181개의 작은 우마차로, 104개의 지방도로, 15개의 전천후 도로, 8개의 상급고속도로, 6개의 남북간 철로를 단절시키며, 하나의 독립국가로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 38선 표지판에서


우마차로와 지방도로 등을 단절시킨 38선이라, 그 길이 아깝다. 단절되지 않았으면 그 길을 걷는다고 나서는 건데.

동해대로
 동해대로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동해를 따라 주욱 이어진 길은 7번 국도 즉 동해대로다. 그 길은 국도라서 그런지 차량의 통행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형 트럭이며, 대형 버스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그래서 차량을 마주보면서 걷는다. 어떤 차가 오는지 봐야 하므로. 덩치가 큰 차가 오면 갓길로 바싹 붙어 걷는다. 그러다가 해안도로가 나오면 얼른 그 길로 빠져 나간다. 그 길은 차량 통행이 뜸하기에 유유자적 걷기 좋기 때문이다.

경찰전적비가 세워진 곳에 대형버스가 한 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어느 절에서 방생법회를 하려고 나온 것이었다. 과일을 비롯한 음식들이 차려진 상 앞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스님 한 분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 이날, 방생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바다를 따라 걸으면서 아주 많이 보았다. 무슨 날이라서 그런 건지, 토요일이라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그 곁에 잠시 멈춰 서서 구경을 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과일들을 보니 문득 시장기가 돈다.

해난어민위령탑
 해난어민위령탑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해난어민위령탑
 해난어민위령탑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해난어민위령탑은 우뚝 솟아 있었다. 바다에서 죽은 어민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세운 탑이라서 그런가,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째 가슴이 먹먹해진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아름다운 바다가 실제로는 늘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린 탓이다. 그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어부들이 늘 무사히 뭍으로 돌아오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배를 잃기도 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했을 터.

이 탑 뒤에는 신봉승씨가 쓴 시 '바다여, 다시 나가리라'가 새겨져 있었다. 그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시는 바다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위로였고, 그럼에도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하는 산 자들을 위한 격려였다.


태그:#도보여행, #강원도, #양양, #하조대, #기사문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