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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3월 26일과 27일, LG아트센터의 기획 음악극 시리즈의 첫번째로 상연되었던 하이너 괴벨스와 일리어드앙상블의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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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무대에는 네 명의 중년 남자가 서 있다. 모두들 중절모를 쓰고 있다. 거실의 내부에서 그들은 묵묵히 식탁을 정리한다. 모두가 침묵이다. 접시, 꽃병, 액자, 심지어 커튼까지 거실의 모든 물건들을 박스에 담아 정리한다. 그들은 왜 정리하는가?

침묵 속에 들리는 소리는 발자국 소리, 꽃병의 물을 따라버리는 소리, 커튼 걷는 소리 등등이다. 일상에서는 잊고 지냈던 소리들이다. 거실 내의 모든 것이 깨끗이 정리되었다. 언제쯤 이들은 말을 시작하려 하는가 궁금해질 즈음 이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들이마신다. 모두 한 호흡 한 박자이다. 말을 시작하려 하는가?

노래였다. 지난 3월 26일과 27일 저녁, 이틀간 LG아트센터에서 2회 상연된  하이너 괴벨스 작, 힐리어드 앙상블의 음악극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진 않았다>(2008년 에든버러페스티벌 초연)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연극과 콘서트의 경계에서 그들은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뮤지컬이나 연극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에게 힐리어드 앙상블의 퍼포먼스는 엉뚱한 몸짓으로 접근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간만의 휴식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전체 3막으로 구성된 음악극은 음악, 연출, 연기, 무대구성 등 모든 면에서 훌륭하였다. 삶의 일상을 담담히 그러나 심연의 문제들을 희화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연주자들인 힐리어드 앙상블은 네 명의 40-60대의 중년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성의 목소리가 없이도 고음부터 저음까지 이들의 하모니는 삶을 성찰하며 맑은 울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이너 괴벨스와 힐리어드앙상블의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진 않았다>의 1막 텍스트는 미국 출생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T.S. 엘리엇(T.S.Eliot 1888~1965)의 J. 알프레드 프루프룩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1911)라는 시에 바탕을 둔 것이다
▲ J. 알프레드 프루프룩의 연가 하이너 괴벨스와 힐리어드앙상블의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진 않았다>의 1막 텍스트는 미국 출생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T.S. 엘리엇(T.S.Eliot 1888~1965)의 J. 알프레드 프루프룩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1911)라는 시에 바탕을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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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은 T.S. 엘리엇이 22세에 쓴 'J.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1911)'를 가사로 한 노래였다. 흰 거실을 배경으로 벽에 딱 붙은 채로 모두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두 손으로 모아들고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중년남자의 의식을 따라가며 지나간 삶의 기회들과 이뤄지지 않은 육체적 사랑, 정신적 육체적 무기력함 등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지만 왠지 슬프지만은 않다. 1분 1초 차이의 기회들, 만회할 수 있었던 일들, 놓쳐버린 것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것은 인생은 그러한 나의 삶과 내가 놓쳐버린 것과의 견줌 사이에서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막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 1948/1973)은 프랑스 현대문인인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의 짧은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48년 발표된 '어떤이야기(Un recit)'는 1973년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란 재목으로 재발간되었다.
▲ 낮의 광기 2막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 1948/1973)은 프랑스 현대문인인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의 짧은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48년 발표된 '어떤이야기(Un recit)'는 1973년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란 재목으로 재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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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무대의 특이한 점은 막과 막 사이의 무대 전환을 오히려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것이다. 1막이 끝나고 2막 모리스 블랑쇼 가사의 '낮의 광기(1948/1973)'의 무대로 전환될 때, 무대가 전환되는 장면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2층짜리 각 층에 2개씩의 큰 창문을 가진 건물의 외벽을 배경으로 하는 2막에서는 네 명이 각 창문에 한 사람씩 자신들의 대사를 노래하며 삶을 또 노래하기 시작한다. 1막에서의 고요한 내레이션 형태의 음악보다는 2막에서는 좀 더 활기 있고, 연극적 요소가 강한 움직임이었다.

2막과 3막 사이의 막간극인 산으로 가는 소풍(Excursion into the Mountains, 1912)는 '변신','시골의사' 등으로 유명한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텍스트를 따온 것이다.
▲ 산으로 가는 소풍 2막과 3막 사이의 막간극인 산으로 가는 소풍(Excursion into the Mountains, 1912)는 '변신','시골의사' 등으로 유명한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텍스트를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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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관객에게 공개되는 무대 전환 장면 후, 간막극인 카프카의 "산으로 가는 소풍(1983)"이 이어진다. 집을 배경으로 무대 왼편에 모인 네 남자는 산뜻하고 신선한 소풍처럼 인생을 노래한다.

3막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겸 시인인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가 쓴 산문시 'Worstward Ho(1983)'에서 텍스트를 따왔다고 한다.
▲ Worstward Ho 3막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겸 시인인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가 쓴 산문시 'Worstward Ho(1983)'에서 텍스트를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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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3막은 사무엘 베케트의 "Worstward Ho(1983)" 를 가사로 하였다. 무척 멋있는 무대배경이었다. 세 명의 남자가 삼각형 구도로 커다란 침실 내부에 앉아있고, 창밖을 보고 있고, 서 있었다. 주황색과 빨간색 배경이었고, 한 남자는 나중에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등장한다. 좀 더 관능적이고 색조적인 감각으로 연출된 무대에서는 음악은 오히려 더 정적이고 조화롭고 중세 성가 같은 음향이었다. 중간 즈음부터는 왼편 벽으로 프로젝트를 영사하여 여러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집에 들어간 것 같은데 제목은 왜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인가. 2막 후반부에 나오는 대사인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진 않았다(I went to the house, but did not enter)"에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한 답은 '상상력'이었다. 굳이 모든 것이 딱 들어맞고, 해결되고 완결되는 스토리를 이들은 보여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소리와 호흡, 장면 그 자체가 힐리어드 앙상블의 전달사항이다. 1막에서 깨끗이 치워진 흰 벽의 거실내부에서의 노래, 2막의 2층 집에서의 소연극, 간막극인 자전거 합창, 3막 침실에서의 중세 성가 같은 노래 모두 집 내부였고, 집 바로 바깥이었는데, 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인가.

혹시 그저 더 잘 살아보고 싶었다는 그런 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 음악극의 텍스트인 모든 시에서 성찰한 삶은 아름답고도 후회스러운 순간들이었지만, 우리가 더 들어가보고 싶은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연극, 아니 콘서트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사건도 사실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아직껏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한 마디로 그 집에 '들어가진' 않았다.

덧붙이는 글 | 하이너괴벨스의 공식 홈페이지 : http://www.heinergoebbels.com

힐리어드앙상블의 공식 홈페이지 : http://www.hilliardensemble.demon.co.uk



태그:#하이너 괴벨스, #일리어드앙상블, #J. 알프레드 프루프룩의 연가, #낮의 광기, #WORSTWARD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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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전공하고 작곡과 사운드아트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대학강의 및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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