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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책, 값 14,000원
▲ 신정아 4001 사월의 책, 값 14,000원
ⓒ 사월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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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의 <4001>에 대해 말들이 많다. 출판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언론에 유명인사의 실명이 회자되고, 그 때문에 파문이 일어나면서 초판은 진작에 매진됐다. 어떤 이들은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하고, 어떤 이들은 철없는 짓이라고 하기도 하고,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한다.

솔직히 나는 이런 종류의 책에 별 관심이 없다. 좋은 책이라도 서점가나 신문광고를 통해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면 오히려 색안경을 끼고 본다. 요즘 베스트셀러는 출판사의 마케팅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버릇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은 진짜 좋은 책인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내 손에 늦게 쥐어지는 때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법륜의 <스님의 주례사>였다.

그런데 이 책 <4001>은 궁금했다. 언론보도를 다 접어둔다고 해도 논란의 중심에 섰던 여자가 별로 달갑지 않은 내용으로 현재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이들까지 실명을 거론해가며 자전적 에세이를 썼다면 쉽지 않은 결단이라고 생각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새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펴낸 책이니, 2007년에 한바탕 우리 사회를 뒤흔든 사건의 진실도 들어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책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들었다. 대체로 책 내용보다는 몇몇 인물들과 인세에 대한 말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때 인세도 다 날릴 판이라는 식의 '돈' 이야기만 뻥 튀겨지며 인터넷을 달구는 것 같았다.

프롤로그를 보고 놀라다

그리웠던 세상이었다. 뽀송뽀송한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었다. (중략)  오랜 시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입으로 하는 말보다 글로써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그렇게 처음 일 년은 혼자서 나만의 '말'을 하면서 문명사회에 적응해갔다. (중략) 이제 앞으로 남은 시간은 뒤돌아보거나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하략).
- <4001> 프롤로그 중에서

그랬다. 나는 이 프롤로그를 읽고는 이 책을 사지 말라던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야, 서문 봐라. 이 정도의 심정으로 쓴 글인데 거짓말이겠어? 자기 합리화나 하려고 쓴 글이겠느냐고? 이상하게 신정아에게는 여자 안티가 많은 것 같아."

그리고 '1-뉴욕, 2007년 여름' 이야기로부터 이어지는 <4001>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그 뒤의 상황이 어찌 되는지 궁금해서 읽을 뿐, 책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서문의 수려한 문장과 본문의 문장은 상당히 달라 보였다. 만약, 시종일관 프롤로그의 문장처럼 이 책이 이어졌다면 참 좋은 자전적 에세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2007년 당시 나는 가짜학위 논란으로 시작된 이 사건이 과거의 '선데이 서울'식의 판도로 가는 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능력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라 판단을 했고, 능력보다는 학력 위주 사회인 이 나라의 현실이 부끄러웠다. 5년이 지난 지금이야 더 심화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알지 못했다" 혹은 "거간꾼에게 속아서 그리된 것 같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냥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어쨌든 그녀는 <4001>을 통해서 그 당시의 과정들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반박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고해성사를 하듯 모든 사실 관계들을 밝혀내고 그녀의 말대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루하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새로운 인생'이 아니라, 2007년 망령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끊임없는 소송에 휘말리지 않을까

지난 2007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스캔들, 학력위조 사건 등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신정아씨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자전적 에세이 '4001' 출간기념회를 마친 뒤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지난 2007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스캔들, 학력위조 사건 등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신정아씨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자전적 에세이 '4001' 출간기념회를 마친 뒤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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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다. 그녀는 시종일관 예일대 박사학위 문제와 대리논문 문제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결론은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 깊은 내용은 나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억울하다" 뭐 이런 내용이다. 본의가 아니었는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풍토가 자신을 철저하게 파괴했다는 것이 그 골자가 아닌가 싶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해가며 항변을 해 독자들을 싫증이 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정황을 설명하려고 실명과 이니셜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일면 진실도 있겠지만, 자신만의 착각일 수도 있을 터다. 그런 점에서 독자들은 사실관계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모두 진실만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독자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실명이 되었든 이니셜이 되었든 끊임없는 소송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당연한데, 나는 당연하지 않다

또 하나는 그녀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내겐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명품유감>이라는 글에 등장하는 내용 중에는 엄마와 외할머니 덕분에 어릴 적부터 하도 많은 옷을 입어봐서 또래 아이들보다 일찌감치 나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p.73)는 이야기가 있다.

2007년 당시 뉴욕에서 입국했을 때에도 명품 옷이 회자된 적이 있고, 이번 기자회견장에서도 핸드백이 회자되었다. 그냥, 그녀에게는 그것이 일상인 것 같아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돈을 자루로 쓸어모으다시피 벌어오는 이야기나 밤새도록 현금을 세던 추억담이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현금 5억을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는 마치 무슨 소설을 읽는가 싶었다.

그녀가 학력위조와 대필논문에 막혀 큐레이터의 능력을 발휘 못한 점은 아쉽지만, 또 그것이 한국사회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현실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금 지혜로웠다면, 2007년 귀국 당시 사건의 본질보다는 명품 시비로 딴죽을 거는 것으로 아픔을 겪었으니, 이번 기자회견장에서는 대중을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4001>에서 주장한 대로 '이건 본질이 아니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름도 생소한 그 핸드백이 보기에 불편한 것을 어쩌겠는가?

자기합리화 위한 신변잡기식 나열

에세이란 '신변잡기식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원형을 탐색하고, 진솔한 자기성찰과 고뇌에 찬 직관과 깊은 관조'를 담아낸 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좀 잔인한 것 같지만,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자기합리화를 위한 신변잡기식의 나열에 불과하다.

문학적인 가치로나 에세이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내용 없이 신변잡기만 늘어놓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출간 며칠 만에 5만 부 이상이 나간다는 것은 수많은 문학가와 에세이스트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녀에 대해 우호적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피력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좋게 평가할 수 없다.

"당신 말이 맞았어. 그런 책은 보는 게 아니었어."

출근길, 아내도 나처럼 호기심으로 그 책을 읽으며 소중한 시간을 축낼까봐 슬며시 가지고 나왔다.


태그:#신정아, #4001, #노이즈마케팅, #똥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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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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