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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의 승리를 기록한 대첩비. 1940년 일본 경찰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 조각난 이치대첩비 이치대첩의 승리를 기록한 대첩비. 1940년 일본 경찰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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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에 걸쳐있는 산이다. 사람들은 대둔산이라고 하면, 가을을 이름답게 장식하는 단풍을 먼저 떠올릴 것만 같다. 그러나 이 대둔산은 참으로 많은 기쁨과 아픔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산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흔치가 않은 듯하다.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전북 완주에서 대둔산 산허리를 넘어 충남 금산으로 넘어오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이치재' 혹은 '배티재'라고 부른다. 이곳은 도계(道界)를 연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통의 요지로 군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다. 1592년인 임진년 7월 8일, 조선을 침탈한 왜병들은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를 휩쓸고 난 후, 왜병 2만 여명이 이곳 배티재로 몰려들었다.       

최초의 육전승전지인 배티재

이 배티재 전투에서 불과 1,500명의 병사들을 지휘해, 2만의 적을 물리친 장수는 바로 권율이었다. 권율은(1537~1599)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이다. 후일 시호는 충장이라 했다. 배티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권율장군은 영의정 권철의 막내아들이자. 이항복의 장인이기도 하다.

선조 25년인 임진년 7월 8일. 왜병들은 식량보급을 위해 호남평야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병들은, 적장인 '고바야가'가 이끄는 휘하 6번대 소속의 일본군 2만 명이 이치를 거쳐 전주로 향하려고 했다. 이들이 배티재에 도착하기 전 전라도절제사 권율은 광주부근 군읍에서 모은 향병 1,500명을 거느리고, 이치에서 진을 치고 전주방면을 지키고 있었다.

이치대첩을 승리로 이끈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대둔산 자락에 자리한 대첩지로 들어가는 문
▲ 이치대첩문 이치대첩을 승리로 이끈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대둔산 자락에 자리한 대첩지로 들어가는 문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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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조성한 이치대첩비각. 안에는 새로 조성한 비와 한옆에 파괴된 비가 있다
▲ 대첩비각 새롭게 조성한 이치대첩비각. 안에는 새로 조성한 비와 한옆에 파괴된 비가 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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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2만 명의 왜병들은 배티재로 까맣게 몰려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왜병들이 공격을 시작하자, 권율장군과 동복현감 황진의 지휘 하에 있는 조선의 향병들은 용감히 맞서 싸웠다.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병들. 거기다가 수적으로도 승산은 왜병에 있었다. 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배티재를 지키는 향병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이 싸움에서 황진은 활을 쏘아 무수한 적들을 죽이다가, 일본군의 조총을 맞아 총상을 당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공방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육전에서 처음으로 이룬 승리였다. 그것도 1,500명이라는 적은 향병을 이끌고 승리를 얻어낸 전투였다. 이 전투는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금산과 웅치에서의 패배와 달리,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은 이 전투를 조선3대전의 하나로 꼽고 있다.

이치대첩지의 역사의 흔적

시기적으로 진주대첩이나 행주대첩보다 먼저 일어난 이치대첩. 3대 대첩 중 가장 먼저 조선군의 승리로 기록된 이치대첩지를 찾았다.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79번지. 3월 6일 오후에 길을 나섰다. 대둔산 배티재를 넘어서면, 좌측에 이치대첩지가 보인다. 지금은 충남기념물 제15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치대첩지.

이치대첩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대둔산의 모습이 보인다. 경내에는 대둔산을 등 뒤에 두고 전각이 하나 서 있다. 권율장군의 이치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록한 '이치대첩비'를 세운 비각이다.

1964년 새롭게 조성한 이치대첩비
▲ 이치대첩비 1964년 새롭게 조성한 이치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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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옵게 조성한 비의 뒤편에 새겨진 비문
▲ 비문 새옵게 조성한 비의 뒤편에 새겨진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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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 당시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쇠소리가 10km나 떨어져 있는 금성면 상가리 금곡까지 들렸다고 한다. 아마도 밀려드는 적에게 기를 죽지 않으려고, 많은 징을 울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나 보다. 그곳 금곡에 1902년 '원수권공이치대첩비'를 세웠다. 연재 송병선이 지은 비문을 새겨 금곡사와 함께 건립한 것이다.

조각난 비, 아직도 계속되는 슬픔

비각 안으로 들어가니 1964년 새롭게 조성한 비 옆에 조각난 옛 비가 있다. 비의 위에는 '원수권공이치대첩비'란 글씨가 보인다. 1902년에 세운 비를, 1940년 일본 경찰들이 사우와 비를 조각내어 버렸다고 한다. 자신들의 치부를 들어내지 않기 위해 수많은 전적문화재를 파괴한 일본. 이치대첩비도 그 중 하나였다.

일본경찰에 의해 파괴되어 조각이 된 이치대첩비
▲ 조각난 비 일본경찰에 의해 파괴되어 조각이 된 이치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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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슬픔. 아직도 문화재의 파괴는 계속되고 있어, 이치대첩비의 조각이 더욱 분노케 만든다
▲ 조각난 비 끝나지 않은 슬픔. 아직도 문화재의 파괴는 계속되고 있어, 이치대첩비의 조각이 더욱 분노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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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파괴되고 수탈된 수많은 문화재들. 그런 문화재의 파괴가 아직도 이 땅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이 조각난 비를 보면서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언제나 이런 슬픈 일이 사라지려는지. 대둔산에서 밀려 내리는 바람에 떠밀려 비각을 떠나면서, 울컥 울분이 솟구친다.


태그:#이치대첩지, #권율, #대둔산, #금산, #이치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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