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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무척 추운 날 아들은 입대를 했다. 아들은 군대입대가 걱정되는지 몇일째 웃지를 않았다.
▲ 공군훈련소에서 아내와 아들 날씨가 무척 추운 날 아들은 입대를 했다. 아들은 군대입대가 걱정되는지 몇일째 웃지를 않았다.
ⓒ 조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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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아들은 공군에 입대를 했다. 하필이면 이날따라 그렇게 추웠을까. 겨울이면 눈이 한 번 내릴까 말까 하다는 진주에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아내와 나, 아들은 오전 7시 차를 타고 진주로 향했다. 오후 2시까지 부대로 들어오라는데 우리는 1분이라도 늦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일찍 출발한 것이다. 우리 가족 전부가 아들의 입대로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기 위하여 2주 전에야 집에 내려왔다. 아들도 나를 닮아서 사회성이 없다. 2주 동안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잠만 잤다. 2주 동안, 군에 입대하는 아들만큼이나 아내 또한 초조해 했다. 그러면서 저녁이면 좋은 것은 다 먹이겠다고 횟집, 오리집 등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러면서 불평을 해 덴다. 자기 남동생 아들이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공익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부러운 모양이다. 무슨 복이 많아서 공익근무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이다.

물론 아내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내 나이 40살에야 본 늦둥이 아들이다. 그래도 아내가 나로서는 영 못 마땅하다. 그래서 한소리 했다.

"군대생활은 잡초처럼 내 버려둬야 잘 하는 법이라구. 군에서 제일 고문관이 누군 줄 알아? 부모 과잉보호에서 자란 애들이라고. 나는 우리 부모가 그냥 내버려 뒀어도 군대생활 최전방에서 3년이나 잘 하고 왔다고."

사실 그랬다. 74년도, 월남전이 막 끝나 갈 때다. 그때는 형제가 많으니 군대 간다고 해도 별로 관심도 없었다. '나, 갔다 올게'하며 인사만 하고 집을 나선 것 같다.

공군훈련소에 도착해 훈련소측 버스를 이용해 안으로 들어가는데, 주위 풍경들이 훈련소 같지 않고 마치 대학 캠퍼스처럼 평화로웠다. 넓은 숲속에 넓은 잔디밭, 푸른 호수, 군인교회도 보이고 현대식으로 지어진 막사 건물들하며, 우리를 안내하는 군인들도 부드럽고 친절하다.

부대 측에서는 같이 간 가족들에게 훈련병들이 생활할 생활관을 보여주었다. 내무반의 관물들이 반듯하게 잘 정돈돼 있고 세면장 등 부대시설이 참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런 좋은 환경들을 보니 우리나라 군대가 참 좋아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들을 맡기는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생활관까지 보여주다니. 그 마음씀씀이가 참 고마웠고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40여년 전, 내가 입대하던 날이 생각났다. 나주 연병장에서 집결했다. 우리를 인솔하는 군인들도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참 친절했다. 그러나 입영열차를 타고부터는 달랐다. 우리 입영장병 중 하나를 불러내더니 반쯤 죽을 만큼 두드려 패는 것이다.

1975년 백암산 철책선에 근무를 서면서 사진 한 방 폼잡고 찍었다
▲ 나의 군시절, 백암산 철책선에서(오른쪽이 필자) 1975년 백암산 철책선에 근무를 서면서 사진 한 방 폼잡고 찍었다
ⓒ 조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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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때부터 군대란 것을 실감해야 했다. 연무역에 새벽 0시 다 되어서야 내린 것 같다. 연무역에서 수용연대까지 가는 길 양옆에 쭉 늘어서 있는 어린 아이들과 어른들, 그 아이들은 '아저씨, 건빵~!'을 외쳤다. 우리가 입영열차를 타고 오면서 받은 건빵 한 봉지를 얻으려고 한밤중에 나온 것이다. 그때는 국민 모두가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수용연대에 도착한 뒤부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벽까지 잠을 안 재우고 기합을 줬다.  대표적인 기합이 '원산폭격'이었다. 내무반의 마룻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옆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군홧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별로 즐거운 기억이 아니다. 생각하는 내내 마음이 씁쓸했다.

그러나 아들의 입대는 나의 입대 때와는 사뭇 다르다. 마치 대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을 따라온 학부형처럼 흐뭇했다.

공군훈련소 연병장에서 입대식이 있었다. 아들과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등을 토닥이며 군대생활 잘 하라고 말한 뒤 연병장으로 보냈다. 그때부터 아내는 눈물을 글썽거린다. 아내뿐만 아니라 다른 어머니들도 눈이 빨갛다. 자식을 군대 보내는 것이 여자들에게는 참 힘든 일인가 보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입영장병들이 운동장을 돌았다. 어머니들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갈 때는 같이 간 아들을 떼어놓고 오려니, 나도 마음이 언짢았지만 아내는 더욱 마음이 아픈가 보다. 내내 휴지로 눈물을 닦는다. 나는 그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세대가 얼마나 존경스럽고 위대한 분들이었는가를 새삼 깨달았다. 그들은 일제시대, 6.25, 월남전을 겪은 세대들이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 징용당해 남양군도, 사할린 등으로 끌려가서 2차 대전에 참전을 했고 6.25전쟁터로 자식들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월남전에서 자식들의 전사통지를 받아야 했다. 우리는 이런 평화시대에 자식들 군대에 보내는 것조차 이처럼 어려워하는데 그때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징용, 6.25, 월남전의 전쟁터로 보내야 했다.

그때의 어머니들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자식이 덜 사랑스러웠을까. 사랑하는 마음이야 똑같았을 것이다.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마음들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때 어머니들의 마음 아픈 상처위에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현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내는 광주에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갑자기 아프다고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해서 버스기사님께 사정하여 고속도로 중간에서 내려버렸다. 갓길에 대형 유조차가 멈춰있었다. 쉬고있는 기사님께 사정을 말했더니 순천시내까지 태워다 주셨다. 눈발이 내리는 순천의 낮선 찻집에서 아내가 좋아지기를 기다린 뒤 밤 9시에야 광주에 왔다. 아들을 입대시키는 날 아내가 갑자기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다. 아내는 오늘 일어난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했다.

군대는 인생대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주의 1군 하사관학교에서 7개월의 모진 훈련을 받았었다. 우리 동기들은 지금도 모임을 갖는데 성공한 친구들은 그때의 훈련이 사회생활의 어려운 고비들을 이겨내는데 가장 큰 정신력이 되었다고 말들을 한다. 모든 입영하는 장병들이 건강하게 훈련을 잘 마치고 우리 앞날의 큰 일꾼들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태그:#공군, #입영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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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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