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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을 처음 받았던 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1957년으로 기억한다. 설날 아침에 부모가 누구누구 댁에 세배 다녀오라고 알려주면 형님을 따라 다녔다. 세뱃돈은 당시 금액으로 10환을 받았고, 인심이 후한 집에서는 20환을 받기도 했다.

 

군부시절인 1962년 6월 10일 긴급통화조치(화폐개혁)로 '환'이 '원'으로 바뀌고 화폐가치도 10대 1로 절하되어 50년대 후반의 10환은 지금의 1원이 된다. 당시 1원은 국화빵 10개, 구슬도 10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까 아이들에게는 큰돈이었다.

 

세배를 다니다 보면 세뱃돈 대신 설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놓으며 먹으라고 권하는 집도 있었다. 그렇게 쟁반을 내놓은 집은 대부분 '삼강오륜'과 '명심보감' 효행 편을 들먹이며 부모에게 잘하라고 설교를 해서 엉덩이가 따끔거리고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러웠다.  

 

농경사회였던 50년대까지만 해도 세뱃돈 대신 곶감, 떡 등을 내주는 집이 많았는데 산업사회로 접어드는 60년대부터 현금이 자주 오가기 시작하였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1원에서 10원, 100원, 1000원, 10000원 단위로 변하였다.  

 

예전에는 설날 아침에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가 끝나면 일가친척과 마을 어른, 절친한 친구 부모, 스승 등을 찾아다니며 올렸다. 당시엔 정월 대보름 안으로 세배를 다니면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어른들은 친구 사이에도 '만사형통(萬事亨通)'을 축원하는 덕담을 정월 내내 주고받았다.

 

세뱃돈 5000원씩 주기로 마음을 정하다

 

설날을 며칠 남겨둔 지난달 30일이었다. 아내는 2월분 생활비에 설날 보너스라며 5만 원을 얹어 주었다. 작년 설에도 10만 원을 주기에 많다며 5만 원만 받았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묻지도 않고 5만 원을 주었다. 서운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설날을 앞두고 아내가 주는 보너스는 말이 좋아 보너스지, 아이들에게 줄 세뱃돈이다. 10년 전에도 1만-2만 원씩 주었는데, 30년 넘게 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백수가 되면서 5천 원으로 내려왔다. 그래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돈에 구속되지 말자!'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2009년과 2010년 설에는 고향으로 이사해서 기분을 내다보니까 보너스로는 부족해서 생활비에서 일부를 세뱃돈으로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적자를 봤던 경험이 있어서 올해는 짠돌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년처럼 5천 원씩 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세뱃돈을 3만-5만 원, 많게는 10만 원씩 주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능력껏, 분수에 맞게 사는 것도 하나의 지혜라고 생각해서다. '참새가 황새 쫓아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옛말도 있잖은가. 

 

생활비 축내면서 인심 얻고, 즐거움 사고 싶지 않아

 

설날 오전 6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형님댁으로 가니까 형수님과 조카며느리들이 차례상을 차리느라 바쁘게 오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까 조카와 조카손자·손녀들이 방안에 가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니까 부자가 된 것처럼 흐뭇했다.

 

 

그러나 흐뭇함도 잠시였다. 아침을 먹고 세배를 받았는데, 옆에 있던 남동생(58)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주머니에서 예쁜 봉투를 몇 개 꺼내더니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의식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동생이 세뱃돈 인플레를 부추기는 것 같아서 언짢았다. 하지만, 귀엽고 예쁜 조카와 손자·손녀들에게 세뱃돈을 넉넉하게 주는 동생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게 경제력이 부족한 나에게 문제와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어서였다.

 

동생이 나눠주는 봉투에 최소한 2만-3만 원은 들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작년처럼 최소한 1만 원씩은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초심을 지키기로 마음을 굳게 다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민과 번뇌를 거듭하다 군대를 제대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조카는 무시하고 어린 조카와 조카손자·손녀들에게 세뱃돈이라며 5000원씩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고맙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이면서 받았으나 마음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인지상정이라고, 세뱃돈을 넉넉하게 쥐여주어 인심도 얻으면서 기뻐하는 아이들과 함께 설명절 아침을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능력껏 해야지, 생활비를 축내가면서까지 아이들에게 인심을 얻고 즐거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물가가 상승하면 세뱃돈 액수도 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상업주의에 찌든 병폐라고 생각한다. 해서 내년 설에도 올처럼 물가가 오르면 부식비도 동반상승할 것이니 나의 세뱃돈은 동결, 아니면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 생활비를 축내면서 세뱃돈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설날, #세뱃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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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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