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년 전 설날에 '다문화 이해 수업' 용도로 일본의 친정에서 보내온 옛날의 기모노를 시험삼아 입어본 우리 아이들
▲ 일본의 친정에서 보내온 옛날의 기모노 2년 전 설날에 '다문화 이해 수업' 용도로 일본의 친정에서 보내온 옛날의 기모노를 시험삼아 입어본 우리 아이들
ⓒ 야마다다까꼬

관련사진보기


지난 12일부터 26일까지 일본 친정에 다녀왔다. 지난해까지는 시간제 강사 등의 부업을 하고 있어 1주일 이상 일본에 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짬이 생긴 올해, 3년만에 일본에 가는 6살 막내 딸을 포함해 12살 큰 아들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가 친정에 다녀온 것이다.

사실, 우리 친정 어머니 생신이 일본의 설날인 1월 1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12월 말에 가서 같이 연말을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아이들이 방학에는 친할머니가 계시는 강화도에서 지냈고 큰 아들도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하던 일본 나의 모교(초등학교)에서의 '체험입학'(해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일본 국적자의 자녀들이 방학 등 단기간에 체험적으로 통학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에 흥미를 잃어 1월 첫 주는 강화도 할머니댁에서 지낸 뒤 일본 친정에 다녀오게 됐다.

결혼이주여성들, "한국은 왜 명절 때 여자만 바쁘게 일하나요?"

일본의 설날은 음력 설을 쇠는 한국과 달리 양력으로 1월 1일이다. 하지만 그 전부터 연말 대청소를 하고 12월 31일에 먹을 토시코시소바('가늘고 길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기원하며 먹는 메밀국수)를 준비한다. 이와 함께 새해인 1월 1일부터 3일 정도 동안 먹는 '오세치요리'라는 설음식도 조금씩 준비해 나간다.

오세치요리는 겉모양이 화려하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먹을 때 구운 떡만 넣으면 되는 간편한 떡국 '오조니'와 함께 설날 3일간 주부의 가사일을 덜어주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집에서 자는 설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설날을 고향 가족과 함께 편하게 지내거나 평소에 못가는 해외여행을 떠나는 등의 시간으로 쓰고 있다. 어떻게 보면 주부에게도 설은 휴가기간인 것 마냥 가족끼리 느긋하게 지내는 시간이다.

일본도 한국과 같은 부계중심사회이지만 부모를 모시고 사는 전통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보다 더욱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강해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과 비교해 봤을 때 상대적으로 강한 부계중심 성향을 보이는 한국의 문화가 낯설 때도 있다.

한국에 시집온 결혼이주여성들에게 들은 '고생한 이야기'에도 꼭 이런 부계중심사회에서 겪은 '남녀차별사례'가 포함돼 있다. 모계중심적인 성향이 강한 베트남이나, 필리핀, 몽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남녀가 평등하게 일하고 가사를 분담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결혼이주여성들은 한국에서 명절 때마다 남자들은 편하게 앉아있고 여자들은 바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물론 한국에서도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나 많은 힘이 필요할 때 남자들이 도와주기도 하지만 명절 준비의 상당 부분을 여자가 맡고 있어서 이런 어려움을 호소하는 듯하다.

'얼어버린 수도'와 함께 한국에서 맞은 첫 설날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설을 맞이한 것은 지난 1999년이다. 하지만 그 때는 아직 결혼전이었기에 가족이라기 보다는 손님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럼에도 당시 강화도에 있던 시댁의 수도가 갑자기 얼어 물이 나오지 않아 충격을 받고 시댁 뒷산에 가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다들 바쁘게 보이는데도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뭘 도와야 할지 모르는 가운데 소외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 친정으로부터 정식 결혼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편지 한 장을 두고 떠나왔음에도 아무것도 못하는 내 자신이 어이없게 느껴졌고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당시 신세를 졌던 한 분의 '시간이 약이다'는 말을 들은 이후 무조건 보고 듣고 배우며 살아갔고 2000년 1월 6일에 큰아들을 낳게 되면서부터는 나와 남편에게 차갑던 친정부모님도 외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지 너그러워 지셔서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에도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큰 며느리로 살면서 명절 준비 등 배워야 할 것도, 챙겨야 할 것도 많지만 시어머니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잘 지낼 수 있었다.

우리 시어머니는 새댁 시절 한국전쟁이 일어나 참전한 시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시할머니를 모셨다. 또 장애인이 된 큰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간 큰며느리 대신 조카를 7살이 될 때까지 업고 키웠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들었다. 어머니로부터 시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에야 자신의 아이를 가지게 됐지만 그후에도 시아버지의 장사빚을 갚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고 결코 편하게 살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인생의 역경을 이겨낸 시어머니께 감사할 일이 3년 전 일본에서 보낸 설날에도 있었다.

10년만에 만난 두 사돈... 잊지 못할 3년 전 일본에서의 설

2009년 가을 한국을 찾아온 친정 어머니, 이모와 같이 강화도 역사박물관에서
 2009년 가을 한국을 찾아온 친정 어머니, 이모와 같이 강화도 역사박물관에서
ⓒ 야마다다까꼬

관련사진보기


지난 2008년 설날, 항공회사에 근무하고 있어 비행기 티켓 부담이 없는 시동생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우리 부모님은 꽤 부담스러워 하셨다. 이유인즉슨 예전엔 일곱 식구 대가족이 같이 살았던 친정집은 우리 오빠, 여동생, 내가 다 집을 떠나면서 빈방이 많아졌지만 여러 물건들을 주워 왔다가 버리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의 습관 때문에 집 정리가 안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방문 소식에 나도 연말부터 친정에 돌아가 함께 집 대청소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내가 버린 것을 다시 쓰겠다며 가지고 들어오는 아버지 때문에 정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로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친정집은 지은 지 20년이 넘은 목조주택이라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겨울이 되면 집안이 꽤 추웠다. 일본에는 온돌도 없으니 전기장판을 깔고 난방과 가스히터를 틀어야 집이 겨우 따뜻해질 정도였다.

우리 부모님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부담감 때문에 시어머니께 쉽게 다가오지 못했고 가슴 한 켠에는 우리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참석조차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는 듯했다. 순간 내가 좀 더 부모님께 잘해 결혼반대를 받지 않고 시집을 왔더라면 두 어머니가 더욱 빨리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하지만 그 땐 일단 편지라도 써놓고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언젠가 내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서로 화해할 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또 가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가서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마음으로 바다를 넘어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사돈으로 직접 만나게 되었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 두 할머니 사이에서 부족하지만 통역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큰아들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시어머니의 일본 방문 둘째 날.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시작한 드라이크리닝점을 지켜야 하는 관계로 차를 준비할 수 없어 나머지 가족들이 전철을 타고 한시간 정도 이동했다. 전철 안에서 시어머니는 손자들을 살뜰히 챙기셨고 이런 모습에 천정 어머니는 시어머니와의 심적 거리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명절 때 바쁜 '한국의 큰며느리'... 고되지만 시어머니가 있어 따뜻하다

어린 시절 부모님 대신 외조부모님이 우리 3남매를 거의 키워주셨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어떨 때에는, 우리 어머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시어머니가 더 친정 어머니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시어머니의 따뜻한 모습을 계기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친정 어머니가 시어머니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결혼 10년 만에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다시 감사해하며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큰며느리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2004년 지금의 큰 아들과 연년생이었던 4살된 큰 딸을 잃고 내가 무척 힘들어했을 때에도 남편과 함께 나를 크게 위로해주기도 하셨다.)

시어머니의 일본 방문이 계기가 되었는지 그 다음해인 2009년에는 아직까지 해외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던 친정 어머니도 드디어 이모와 같이 서울투어를 이용해 인천의 우리집과 시댁이 있는 강화도로 찾아 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지만 매해 설을 맞을 때마다 지나가는 세월을 돌아보며 한 집안의 큰며느리이자 엄마로서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일본에 비해 모이는 식구가 많아 이번 설 준비도 조금 고되겠지만 마음이 따뜻한 시어머니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태그:#설날, #일본, #결혼이주 여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 이주민영화제(MWFF) 프로그래머 참여 2015~ 인천시민명예외교관협회운영위원 2016~ 이주민영화제 실행위원 2017.3월~2019 이주민방송(MWTV) 운영위원 2023 3월~ JK DAILY 명예기자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