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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일군 어머니의 이야기

 

"우리 승일이는 2006년 10월 23일에 입대하여서 백령도에서 근무하다가 2008년 10월 7일에 전역을 하였답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친구들과 무척 잘 어울렸어요. 휴가를 나오면서 함께 나온 친구들을 몽땅 데리고 와서 밥 먹이고, 늦어서 출발하기 어려운 친구들은 재워서 보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무척 좋아했고, 가끔 부대에서 전화를 해서 아버지, 어머니 지난번에는 밥 잘 먹고 쉬다가 왔는데 잘 계시느냐고 안부를 묻곤 했어요. 모두가 아들처럼 생각이 될 정도로 아이들이 따르고 자주 보게 되니까 정이 들더라고요.

 

10월에 제대를 하고 나서 복학 준비를 하면서 오랜만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공부할 준비도 하면서 지냈지요. 그 동안에도 휴가 나오는 동료들이 찾아와서 자고 가기도 하고 잠시 머물다 가곤 하였지요.

 

12월 23일이 제 아버지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일찍 가게 문을 닫고 나가서 회식을 하고 돌아오면서 핸드폰 가게에 들러서 아버지가 글씨가 잘 안 보여서 고생을 하신다고 새 핸드폰으로 바꿔 주었어요. 효도폰이라고 글씨가 큼직큼직해서 잘 보인다고 좋아하니까, 내 번호와 제 번호를 단축다이얼로 입력을 해주고 집 앞에서 내려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서 나갔어요. 우리들은 집으로 들어오고...

 

그런데 집 앞에서 찌익 하고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리는데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예요. 그 순간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어요. 건널목을 건너는 내 아들 승일이를 110km과속으로 달리던 개인택시가 그만 그대로 치이고 만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가버린 것이에요.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억울한지, 하늘이 노랗고 원망스럽기까지 하였어요.

 

이렇게 해서 아들을 보내는 마음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미어지는지 식음을 전폐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화장장에서 막 관이 입실을 하는 순간에 전화가 울렸어요.

 

"승일이 어머니이시죠? 얼마나 가슴이 아프십니까? 저희 승일이와 함께 하던 우리 부대 7중대원들이 지금 승일이를 위해서 함께 묵념을 하고 있습니다. 승일이는 좋은 곳으로 갈 것입니다. 어머니 여기 승일이 친구들이 아들들이 되어 드리겠답니다. 너무 슬퍼 마시고 용기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서 무어라고 대답도 못하고 울음만 터뜨리고 말았더란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이나 지나서 조금 정신을 가다듬은 어머니는 행정관의 전화에 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끊었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너무 미안하고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 전화를 드렸단다. 마침 승일이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전화를 받아서 행정관을 바꾸는 동안에 자기들이 휴가 때마다 찾아 뵐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데 더 눈물이 나서 못 견디겠더란다. 행정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도 내내 울음으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어머니,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여기 승일이 친구들이 모두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 드리겠답니다. 보고 싶고 생각이 날 때면 언제든지 전화를 주십시오."

 

하며 위로를 해주는데 너무 고맙고 많은 힘이 되었단다. 그래서 가끔 밤늦은 시간에도 전화를 걸어서 좀 계급이 높은 병사이면 후배들에게 잘 해 주라고 이르고 내 아들처럼 전화를 하고 했단다. 그런데 승일이 장례를 치르고 열흘쯤이나 지나서 장병들이 여섯 명이나 승일이네를 찾아 왔었단다. 휴가 나오는 길에 부대장님의 명에 따라 들러서 위로 말씀도 드리고 승일이도 영정이나마 보고 가겠다고 들른 것이었다. 여기 들러서 가라고 휴가 기간을 하루 더 주었다는 것이다.

 

"너희들 고향에 가는 길에 주승일 병장의 집에 들러서 위로해 드리고 재롱도 피우고 해드리고 자고 가고 싶으면 하룻밤 거기서 자고 가도록. 그래야 아버지, 어머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 아니겠니? 잘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르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휴가 장병들은 오면서 자기들끼리 여기서 할일을 의논하여서 작은 콘서트를 준비하였더란다. 노래도 하고 어머님 은혜를 록 형식으로 부르는 친구, 우리 창으로 부르는 친구 이렇게 하고 코미디까지 준비해서 웃기느라 애를 쓰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승일이 어머니는 정말 고마운 부대장 전황기 대대장님이 너무 고맙고 장원진 행정관의 배려가 너무 죄송스러울 뿐이었단다. 한편 이제 새로운 아들들이 여섯 명이나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날마다 승일이에게 가보지 않고는 못 배기고 매일 기어이 다녀와야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어요."

 

하고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재훈 엄마는 재훈이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했는데 어찌 된 것이에요. 이렇게 교통사고로 잃었어도 조상까지도 밉고 나라도 미운데 억울한 일로 갔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겠어요."

 

하며 재훈 어머니의 이야기를 독촉하였다.

 

다음 기사"당신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두었겠어요?"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블로그,서울포스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 주승일, #해병6여단 7대대, #아들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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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아동문학회 상임고문 한글학회 정회원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 ***한겨레<주주통신원>,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꼼꼼한 서울씨 어르신커뮤니티 초대 대표, 전자출판디지털문학 대표, 파워블로거<맨발로 뒷걸음질 쳐온 인생>,문화유산해설사, 서울시인재뱅크 등록강사등으로 활발한 사화 활동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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