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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기행 마지막 날(8월 19일)은 오전 4시에 눈을 떴다. 광활한 만주에서 이레 동안 쉬지 않고 강행군을 했는데도 몸은 가벼웠다. 오히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것 같아 아쉬웠다. 다리가 아파서 일송정에 오르지 못했던 아내도 서운한 모양이었다.

 

 

아내와 함께 묶은 방은 '시티 프라자호텔' 805호실로, 연한 회색빛 안개가 자욱한 심양(선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있으니까 거리에 행인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고층 아파트 공사장으로 보이는 건축물 위의 파워크레인들은 말로만 듣던 중국의 개발붐을 실감 나게 했다.

 

저녁은 수천 킬로 떨어진 집에서 먹을 거로 생각하니까, 새벽닭 울음소리가 조·중·러 3국에 들린다는 두만강 국경지대에서 백두산을 거쳐, 신의주와 마주한 짬뽕 도시 단둥(丹東)까지 그동안 둘러봤던 도시들과 항일 유적지 풍경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갔다.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아내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인천행 비행기 출발시각이 오전 9시여서 8시까지는 심양 공항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짐을 챙겨 들고 나가서 식권을 받아 호텔식당으로 향했다.

 

빵과 밥이 곁들여진 뷔페식이었는데, 시래기 무침에서 고급 야채샐러드까지 반찬 종류도 다양했고, 상큼한 맛과 감칠맛을 지니고 있어서 즐겁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고소한 향이 풍기는 버섯요리는 백미였는데, 일행들도 그동안 먹었던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호텔을 출발해서 심양 공항에 도착하니까 오전 7시 50분이었다. 호텔에서 공항까지 1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비행기 탑승 절차를 밟는 시간에 일행들은 연락처를 교환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눴는데 모두 아쉬운 표정들이었다.

 

비행기에서 만난 '조선족 할머니'

 

탑승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더니 좌석이 한참 뒤쪽이었다. 만주기행을 시작하는 날은 비행기 앞날개가 보이는 좌석에서 아내와 나란히 앉아 시시때때로 변하는 아름다운 창공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귀국길에는 좌석번호까지 달라 떨어져 앉아야 했다.

 

국내 버스 같아야 좌석을 바꿀 수 없느냐고 묻기라도 하지, 포기하고 앉아 있는데 스튜어디스가 키가 작달막한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오더니 창가 옆자리로 안내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할머니는 상냥하고 친절해서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항상 "기르니까네··"로 말을 시작하는 백점복(78세) 할머니는 2년 전부터 한국에서 사는 딸네 집(대구)에 다니러 간다고 했다.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묻는 말마다 거침없이 답해주는 백 할머니가 가깝게 느껴졌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살아온 조선족 할머니였고, 지난 5월에 돌아가신 큰 누님과 동갑이어서 더욱 그랬다.

 

길림성(지린성) 사평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소학교(일본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는 백 할머니는 중국말을 못하고, 한글도 읽기는 해도 쓰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름도 집에서는 '희자, 학교에서는 '요시코'였다고. 백 할머니의 이름에서도 일제의 만행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붉은 수수쌀밥을 먹고 살았다며 술을 빚어 팔았던 어머니를 졸랑졸랑 따라다니면서 탁주를 얻어 마셨던 얘기도 해주었다. 어렵게 살면서도 남들과 나눠 먹기를 좋아했던 어머니는 "내 배부르게 먹을라카믄 남 줄게 어딘나?"라며 손님에게 잘했는데 자신도 그렇게 살아왔다며 웃었다.

 

아버지 고향이 황해도라고 했더니, 백 할머니도 병원에 근무하던 1960년 5·1절을 맞아 평양에 다녀왔다고 했다. 아버지 고향(경북 영천)에는 못 가도 북한에라도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으로 갔었다고. 당시엔 중국이 곤란했고, 북한은 잘 살 때여서 가져간 인화지와 바늘을 팔아서 냉면도 사 먹고 선물도 사는 등 용돈으로 썼다고 했다.

 

백 할머니는 대지주들의 농지와 곡식을 몰수하여 빈농에게 나눠 주었던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과 1947년 중국 연변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웠던 당시를 설명하면서도 남한에 대해서는 "독도가 어드르케 된 섬입네까?"라고 물을 정도로 소식이 어두웠다.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 김좌진 장군에 대해 아시는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다. 한국전쟁(6·25)도 미국에서 쳐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 살았으니 그렇게 아는 게 당연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8세 때 담배공장에서 오라고 했는데 오빠가 결혼을 권했고, 시집식구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얘기도 해주었다. 자동차 수리공을 하다 15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남편) 얘기를 할 때는 하얀 구름이 떠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시 중국에서 자동차 수리공은 인기가 좋은 직업이었다고.

 

백 할머니는 여덟 살 위인 언니와 해방되던 1945년에 헤어져 50년 넘게 모르고 지내다가 일흔이 되어가던 10년 전(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에서 산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 끝에 극적으로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언니가 딸 부자(8명)이고 잘살고 있어서 무척 놀랐다고 했다.

 

지금도 사평에서 외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는 백 할머니는 이번 한국행은 3년 만이라고 했다. 그는 돈을 모아두었다가 언니와 딸이 보고 싶으면 한국에 나간다며 빙그레 웃었는데 이마에 그어지는 주름은 한도 많고 굴곡도 많은 세월의 강줄기처럼 보였다.

 

백 할머니가 살아온 얘기들은 어렸을 때 이불 속에서 듣던 옛날이야기처럼 고소하고, 슬프고, 아슬아슬하면서도 재미가 있었다. 얘기에 흠뻑 빠져 있는데 10분쯤 후에 목적지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남한 소식에 어둡고, 언니와도 반세기가 넘게 헤어져 살았다는 백 할머니도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남북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온 우리의 누님이요 어머니라는 생각에 측은지심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비행기는 인천공항 주위를 순회비행 하는 것 같더니 활주로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백 할머니와 함께 검사대를 거쳐 밖으로 함께 걸어나오면서 즐겁게 잘 다녀가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두만강 이북지역 간도(間島)는 독립투사들의 활동무대 외에 100여 년 전 이주해간 동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 탈북자들이 체류하는 지역, 한참 북쪽 지방으로 한국보다 춥고 땅이 척박한 지역이라는 이미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만주기행을 통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남한 면적의 8배 가까운 만주(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에 산재해 있는 항일 유적지들을 1주일에 걸쳐 돌아보았으니 '봉사 문고리 잡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문고리라도 잡았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박영희 시인과 함께 하는 만주기행'을 다녀와서>를 끝가지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편집부에도..


태그:#만주기행, #조선족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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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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