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샤갈전이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1917년 샤갈의 가족사진, 아내 벨라와 딸 이다(아래)
 샤갈전이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1917년 샤갈의 가족사진, 아내 벨라와 딸 이다(아래)
ⓒ Archives Marc et Ida Chagall, Paris

관련사진보기


러시아 태생 유대계 프랑스 화가이자 여러 요소를 혼합하여 독특한 색채와 화풍을 구가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대규모 회고전이 한국일보 주최로 서울시립미술관서 내년 3월 27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에 선보인 164점이 전 세계 30여 공공미술관에서 왔고 개인소장품은 소장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단다. 이번에 참가한 미술관은 러시아 푸슈킨, 국립트레티아코프, 상트페테르부르크미술관, 영국 테이트미술관,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프랑스 샤갈재단, 스페인 티센보르네미자미술관, 벨기에 왕립미술관 등이다.

샤갈의 작품은 시기 별로 러시아(1910-1922), 파리(1923-1941), 미국망명(1941-1948), 프랑스정착(1948-1985)기로 나뉜다. 이번 전은 '나와 마을, 성서이야기, 사랑과 연인, 유대인극장 장식화, 서커스, 종이작품' 등 6개의 주제로 잡았다. 이번 전의 대표작인 '산책'과 '도시 위에서'는 보험평가액만 해도 각각 500억 원이 넘는단다.

시적 상상력과 환상적 색채로 일군 독자적 화풍

'서커스에서(Au Cirque)' 캔버스에 유화 100×81cm 1968-1971. <개인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서커스에서(Au Cirque)' 캔버스에 유화 100×81cm 1968-1971. <개인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샤갈은 20세기 수많은 미술 사조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만의 독자적 화풍을 일궈냈다. 색채의 마술사답게 '서커스에서' 보듯 그의 색채는 찬란하고 우아하고 화려하다. 시정(詩情)이 넘치는 그의 몽환적 분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나래를 펴게 한다.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연인들도 이번에 서울에서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도무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둥그스레한 선묘와 자유자재로 그려나간 스케치는 현실의 이면과 표면을 다 담고 있어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일 것 같으나 놀랍게도 그 결과는 정반대로 현실감이 더 절박하게 느껴진다.

러시아 국립트레티아코프미술관 관장은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샤갈은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그의 작품은 어떤 예술사조로도 분류할 수 없고, 다른 화가와 비교할 수 없죠. 그래서 세계적으로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것 같다"라고 평했다.

샤갈의 그림하면 떠오르는 것들

'도시 위에서(Au-dessus de la ville)' 캔버스에 유화 139×197cm 1914-1918. <트레티아코프미술관소장> '산책(La Promenade)' 캔버스에 유화 175×168cm 1917-1918(아래). <상트페테르부르크미술관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도시 위에서(Au-dessus de la ville)' 캔버스에 유화 139×197cm 1914-1918. <트레티아코프미술관소장> '산책(La Promenade)' 캔버스에 유화 175×168cm 1917-1918(아래). <상트페테르부르크미술관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샤갈의 그림하면 떠오르는 것은 새와 천사가 구름처럼 흐르는 푸른 하늘, 면사포를 쓰고 꽃다발에 파묻힌 우아한 신부와 신랑이 손잡은 모습, 누드가 있는 풍경, 하늘을 나는 행복한 연인들, 물고나무 선 어릿광대, 지붕 위의 바이올린연주자, 유대랍비와 성서의 예언자들, 우화에 나올 것 같은 염소와 당나귀, 평화롭고 소박한 마을 등이다.

이런 여러 것 중에서 역시 우리의 눈길을 잡는 것은 손을 잡고 서로 다정히 보듬은 연인들이 하늘을 훨훨 나는 '도시 위에서'나 '산책'이 아닌가 싶다. 이런 작품을 보면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던 천상병시인이 생각난다. 그의 그림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꿈의 나래를 펴게 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샤갈창작의 시원지인 비테프스크마을

'비테프스크 위에서(Au-dessus de Vitebsk)' 캔버스에 유화 67×93cm 1915-1920. <뉴욕현대미술관소장> '음악' (La Musique) 캔버스에 템페라와 과슈 212×103cm 1915-1920(아래). <트레티아코프미술관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비테프스크 위에서(Au-dessus de Vitebsk)' 캔버스에 유화 67×93cm 1915-1920. <뉴욕현대미술관소장> '음악' (La Musique) 캔버스에 템페라와 과슈 212×103cm 1915-1920(아래). <트레티아코프미술관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샤갈은 1887년 유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러시아의 변방 비테프스크(Vitebsk)에서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동네미술학교를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고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천국을 경험한다. 그는 평생 이곳을 그렸고 파리를 그릴 때도 한쪽 구석에 끼어 넣었다. "내 그림 중 비테프스크에서 영감을 받지 않은 작품은 없다"는 그의 말은 진실이다.

비테프스크을 배경으로 위 작품에서 샤갈의 고향모습이 보인다. 그는 거기서 1910년에 10대의 벨라를 처음 만나 애틋한 첫사랑을 나눈다. 가난한 샤갈은 부잣집 딸인 벨라와 결혼하기까지 고비도 많았으리라. 그는 궁핍함에도 마음은 부자였고 자기고향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가지고 이를 바탕으로 그만의 예술세계를 펼친다.

유대인 예술극장의 장식화 기적적으로 소생

'유대인 예술극장 소개(Introduction au Theatre d'art juif)' 캔버스에 템페라, 과슈 284×787cm 1920. <트레티아코프미술관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유대인 예술극장 소개(Introduction au Theatre d'art juif)' 캔버스에 템페라, 과슈 284×787cm 1920. <트레티아코프미술관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위 작품은 1920년 모스크바의 유대인 극장 내부 장식화로 유대인 예술극장은 스탈린집권 때 폐쇄되었다. 그런 와중에 샤갈의 한 애호가가 이 작품을 50년간 보관해 오다가 세상에 공개되었고 1987년에는 스위스재단의 도움을 받아 5년 끝에 기적적으로 복원된다.

이 작품은 규모로 보나 예술사적 가치로 보나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비견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는 당시 러시아의 절대주의를 주창한 말레비치와 창작방식에서 갈등을 보였는데 그런 사연을 그림 한 켠에 남겼다. 그런 권력싸움에 능통하지 못한 그는 결국 1920년 고향을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거쳐 1922년부터는 파리에 정착한다.

축제의 일상화로 지상천국 확장하기

'서커스를 위한 대형스케치(Grande esquisse pour cirque)' 캔버스에 유화 65×101cm 1957. <개인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서커스를 위한 대형스케치(Grande esquisse pour cirque)' 캔버스에 유화 65×101cm 1957. <개인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미국의 종교비평가 하비 콕스(1929~)가 <바보제>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불행은 축제를 상실한데 있다고 말했는데 축제란 황량한 일상에서도 지상의 천국을 잠시나마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삶에 에너지를 재충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축제가 없는 삶이란 우리 일상에 생명의 기운과 통로가 막혀버렸다는 뜻이다. 삶의 즐거움이 당장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나 길게 보면 그것은 사회의 윤활유역할을 한다. 샤갈은 이런 점을 너무나 잘 아는 축제주의자였기에 사람을 즐겁게 하고 삶에 열락을 주는 어릿광대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이런 관점이 그의 '서커스연작'에 잘 담겨 있다.

그의 사랑에는 연애, 혁명, 삶의 예술, 누드도 다 포함

'파란 풍경 속의 부부(Couple dans le paysage bleu)' 캔버스에 유화 112×108cm 1969-1971. '필레타스의 가르침(La Lecon de Philetas)' 석판화 52×38cm 1961(아래)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파란 풍경 속의 부부(Couple dans le paysage bleu)' 캔버스에 유화 112×108cm 1969-1971. '필레타스의 가르침(La Lecon de Philetas)' 석판화 52×38cm 1961(아래)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샤갈은 무엇보다 사랑의 화가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그 범위가 넓고 깊다. 여기엔 개인적 연애도 사회적 혁명도 삶의 예술도 평화의 상징하는 누드도 다 포함된다. 그의 뮤즈인 벨라만이 아니라 촛불, 물고기, 괘종시계 등 동물, 사물, 자연도 다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는 거의 한 세기를 살면서 러시아혁명, 나치학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으나 작품 속에 한 줌 어둠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사랑의 위대함에 대한 신뢰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누드를 그리 많이 그린 것도 결국 사랑의 화가임의 반증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누드만큼 사랑과 평화를 많이 담긴 것이 또 있을까. 남녀가 무장해제 해야 사랑을 하지 않던가. 여기에 편협한 이념이나 사상, 근본주의적 종교나 철학이 들어갈 틈은 전혀 없다.   

유대인 전통 담긴 성서이야기 그림에 옮기다

'다윗성채(La Tour de David)' 캔버스에 유화 117×90cm 1968-1971. <니스샤갈미술관소장> '회개한 탕자(Le Fils prodigue)' 162×122cm 1975-1976(아래)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다윗성채(La Tour de David)' 캔버스에 유화 117×90cm 1968-1971. <니스샤갈미술관소장> '회개한 탕자(Le Fils prodigue)' 162×122cm 1975-1976(아래)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그는 유대인답게 아담과 이브가 나오고 무지개 등장하는 '창세기'와 이집트노예에서 해방되는 '출애굽기', 유대인의 수난을 슬기롭게 이겨낸 '시편과 민담', 다윗이 나오는 '역사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선각자들의 기록인 '예언서', 연시형식을 띤 '아가서' 그리고 탕자의 비유가 나오는 '복음서' 등 성서이야기를 화폭에 고스란히 옮긴다.

그렇다고 성서이야기만 그린 건 아니라 그에게 감동과 영감을 준 이야기들 예컨대 '아라비안나이트의 네 가지 이야기', '라퐁텐 우화', 2-3세기 그리스 연애담을 소설화한 '다프니스와 클로에' 등도 판화형식에 담아 에로틱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제2의 조국 프랑스에서 융합의 미 꽃피우다

'파리 위에 신부(La Mariee au dessus de Paris)' 유화 130×96cm 1977. <개인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파리 위에 신부(La Mariee au dessus de Paris)' 유화 130×96cm 1977. <개인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20세기는 입체파, 추상파, 야수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미술사조가 다양했으나 그는 어느 흐름에도 속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융합하여 '파리 위에 신부'에서 보는 것 같은 몽상가적인 자기만의 미 세계를 잉태시켰다.

피카소도 야수파의 창시자 마티스가 죽자, 이제 색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작업을 하는 작가는 샤갈뿐이라며 그를 극찬했다. 그런 와중에 샤갈은 그에게 우호적이고 친밀감을 주었던 프랑스문화와 예술혼에 이끌려 47세에 프랑스에 귀화한다.

격변의 20세기 예술로 승화시키는 최고의 작가

'마을축제(Le village en fete)' 캔버스에 유화 130×195cm 1981. <개인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마을축제(Le village en fete)' 캔버스에 유화 130×195cm 1981. <개인소장> ⓒ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R)

우여곡절이 많은 20세기 격변기 한가운데서 비극적 역사를 온몸으로 겪었기에 샤갈은 누구보다 사랑과 평화, 행복과 축제에 대한 염원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절망과 좌절을 오히려 예술로 승화시켜 금세기 최고의 작가가 되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면 그가 가지고 있는 마르지 않는 여성숭배사상이다. 대문호 괴테도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고 했지만 샤갈은 이를 작품으로 구현한다. 20세기에 남자전쟁광들이 이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동안 샤갈은 말년까지도 여성을 인류를 구원하는 여신으로 부각시키며 이 지상에서 평화와 사랑을 이루는 축제를 꿈꾸었다.

덧붙이는 글 |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 홈페이지 http://www.chagallseoul.com/
서울시립미술관 2층3층 문의 1577-8968 전시기간 2010.12.03-2010.03.27 작품 160여점



태그:#샤갈, #벨라, #비테프스트, #색채의 마술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