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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박용만의 매력은 그가 '칼을 찬 시인'이라는 것이다. 네브래스카 주의 소년병 학교에서나 하와이의 대조선 독립군단을 훈련 지휘할 때 군복을 단정하게 입고 허리 왼쪽에 긴 훈련도를 찬 모습은 늠름한 무인(武人)의 기상이 넘친다.

 

그러나 그의 능력이나 소양은 거기에만 한정되거나 쏠려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상식을 어쩌면 그처럼 뒤집을 수 있는 건지 그의 글 솜씨 역시 찬탄을 자아낸다.

 

군사학과 함께 정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는 해외 동포들의 독립투쟁 방향을 제시하고 운동역량을 조직해 내는데 기관차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신한민보>와 <국민보>의 주필이 돼 동포들을 계몽하는데도 그 공적이 컸다. 그런 굵직한 자취 말고도 산골물처럼 투명한 문학적인 정서와 조선말에 대한 깊은 애정도 보여주고 있으니 경탄스러울 뿐이다.

 

 

1911년 6월 7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그의 시조 '상무혼(尙武魂)'

 

 보던 책 덮어놓고 칼 빼어 높이 들고

 닫는 말에 뛰어 올라 앞으로 나아가니

 어 좋다 견양 총소리 사나이 몸을

 

 

 1913년 8월 13일 <국민보>에 실린 시조

 

 천지가 적다 말라 나의 한을 능히 용납

 천지가 크다 말라 나의 몸을 둘 곳 어디

 그러면 천지 만물을 내 홀로 용납하리라

 

 1913년 9월 20일 <국민보>에 실린 시조

 

 십년을 갈아 둔 칼 집을 벗겨 손에 드니

 한 줄기 흰 무지개 태평양을 끊을세라

 보아라 삼도 청산이 모두 가음 

 

때로 그는 유랑자의 감회를 한시(漢詩)로 표현하기도 했다.

 

  別金門諸友                 샌프란시스코 친구들과 이별

 

 西來三月又東流      서쪽으로 삼월에 찾는데 다시 동쪽으로 흘러 간다    

 萬事此身不係舟      모든 일을 맡은 이 몸은 매지 않은 배와 같다  

 金門佳會將何日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회람을 어느 날 잊을 거냐

 望裏雲山一点愁      수심 속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하와이에 이어 미주 본토에서 독립운동이 처음 싹튼 곳이다. 박용만이 미국에 도착해서 처음 머물렀던 곳이고, 그 이후에도 <신한민보> 주필을 맡거나 국민회에 관련된 업무 때문에 자주 드나들었다.  

 

1905년 2월 19일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그는 9월 말경까지 머물면서 미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폈다. 9월 초 그곳에서 미국 북감리교 연회가 열렸고 박용만은 안정수와 함께 한인 전도사로 임명됐다. 하지만 일본인 목사나 전도사와 더불어 일본인들과 몇 안 되는 한인들을 상대로 전도한다는 건 구미에 맞지 않았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 '손'으로 써서 등사한 신문 <공립신보>

 

며칠 후 숙부인 박희병이 한국으로부터 도착했다. 선교사로부터 얻은 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의 추천서를 지니고서다. 그 철도회사가 있는 네브래스카 주로 둘은 서둘러 떠났다.

 

샌프란시스코는 하와이에 정식으로 이민이 시작되기 이전에 적은 숫자지만 한인들이 발을 디딘 곳이다. 안창호가 부인과 함께 도착한 것은 1902년 10월. 헌데 그들 보다 먼저 도착한 한인들이 있었다. 바로 인삼장수들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그들은 인삼을 팔았다. 팔러 다니는 인삼이 진짜 고려인삼이라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 부러 상투를 틀고 짚신을 신었다. 평북 의주 출신들이 많았고, 중국여권으로 중국인 노동자들 틈에 섞여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1905년 4월 5일 도산 안창호를 회장으로 샌프란시스코에 '공립협회'가 조직됐다. 그해 11월 퍼시픽 가에 3층 건물을 사 회관을 마련하고 1주일 후부터 '공립신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활자가 없어 손으로 써서 등사한 신문이었다.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3000명 이상이 죽고 인구의 절반인 22만 명이 집을 잃은 대참사였다. 4월 25일자 '공립신보'는 대지진의 참상을 이렇게 보도했다.

 

 

"상항의 한인공립관은 4월 18일 오전 5시 15분에 지동할 때에는 손해를 면했으나 종시 화재를 면치 못하고 전수히 소화가 되었더라. 지동할 때에 공립관에 있던 한인은 무사하나 한인 미순과 미국 집에 있는 한인들이 어찌 됐는지 몰라 김관유, 서정우, 리교담, 리원길 4씨로 하여금 각처에 탐지하고 각처에 있는 한인들도 회관으로 와서 안부를 물으니 상항에 있는 한인은 다 무고하더라.

 

그러나 각 찬관(식당)이 전폐되고 각 식물가게에는 식물이 절종돼 면보떡 한 치에 오십전으로 일원까지 하나 살 수 없고 또한 불피우는 것을 금하는고로 여간한 쌀과 물은 있었으나 밥도 지어먹을 수 없고 찾으러 다니다 못해 겨우 조그만 과자 40개를 사다가 한 갰기 먹고 그 날 밤을 지날 때 청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이 불을 피해 공립관으로 찾아와서 같이 지냈더라."

 

한국 정부, 일본영사관으로 4000원 송금... 구제금 받은 이는 없어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대한매일'은 지진 피해로 한인 24명 사망, 부상 80명이라는 기사를 냈다. 또한 한국 정부가 4000원을 구제금으로 일본영사관에 송금했다고 보도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므로 그렇게 조치한 것이다. 그러나 공립협회가 조사해 보니 일본영사관으로부터 구제금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 영사관은 일화 500원, 쌀 13포대, 간장 3통을 한인들에게 나눠달라고 전도사 문경호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중간에서 떼먹었는지 아니면 동포들이 달가워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는지 전달하지 않았다. 그는 친일자이자 협잡꾼이라는 낙인을 받고 동포사회에서 축출됐다.      

 

레이크 타호(Lake Tahoe)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멀지 않은 명승지다.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 경계선 상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산의 천지처럼 산 위에 있는 호수다. 깊이 500미터나 되는 이 담수호는 사계절 관광의 대상이다. 호수를 보려면 해발고도 1897m나 되는 고지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구불구불 비탈길을 올라채자면 자동차의 엔진도 가쁜 숨을 토해낸다.

 

 

박용만은 레이크 타호를 보고 그 감회를 한시로 남겼다. 지금처럼 관광이 쉽지도 않았을 테고 또 자동차를 구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높은 산등성이를 올라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遊太湖(其三)            레이크 타호에서    

 

 太湖之水太澄淸      타호의 물 하도 맑기도 하여라

 俗陋不會染此汀      속인이야 언제 물든 적이 있으랴

 白鷗爾若能容我      갈매기여 나를 행여 벗 삼아 주려무나

 斬敵頭來一洗兵      그제사 적의 머리랑 베어들고 개선하리라

 

타호의 맑은 물처럼 독립운동에 뜻을 둔 지사의 마음은 한결 같아야 하리라. 물 위를 자유롭게 나는 갈매기들을 보고 그 역시 현실의 묶임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다면 뛰쳐나가 적과 맞서고 싶은 심사를 드러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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