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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목)


오늘 드디어 부산으로 진입한다. 여행을 떠난 지 58일만이다. 언제 그날이 올까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날이 오고 말았다. 고흥반도나 거제도를 달리고 있을 때만 해도 그곳을 벗어나는 일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자전거는 하루하루 계속해서 굴러가고 있었던 거다.

마산에서 좀 더 분명해진 일이지만, 부산이 가까워지면서 이 여행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 게 더욱더 확실해지고 있다. 거제도가 고비였다. 그때는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거제도를 벗어난 이후로는 다시 여행이 희망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뜻밖이다. 해남의 땅끝마을에 도착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땅끝마을을 돌아 남해 바닷가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마음이 상당히 무거웠다. 남해의 잔뜩 주름 잡힌 해안선과 그 해안선에 알토란처럼 매달려 있는 섬들은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언제 남해를 다 돌아 동해로 접어들 수 있을까 막막했다. 남해안의 서쪽 끝에서 봤을 때, 동쪽 끝에 있는 부산이 마치 피안의 세계처럼 보였다.

영원히 가닿을 수 없을 것 같이, 멀고 먼 세계가 부산이었다. 그랬던 부산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다.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 부산을 지나서 동해로 올라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서해나 남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곧은 해안선'이 나온다. 자전거를 타고 해안선을 지나간 흔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거리를 단축하고 있는 걸 확연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거제도 같이 크고, 해안선이 복잡한 섬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거제도 같이 언덕이 많은 해안선 역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강원도에서 '삼척'을 지나가는 구간이 비교적 언덕이 많은 편이어서 힘들 수는 있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줘야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여행을 하면서 주름 잡힌 해안선과 높은 언덕 때문에 압박을 받을 일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장복터널
 장복터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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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가 돌진해온다, 장복터널

마산항을 떠나 약 10㎞ 정도 가면 바로 창원시 진해구다. 진해로 들어서서 제일 먼저 장복터널과 마주친다. 터널 길이가 무려 800m가 넘는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기에는 조금 긴 터널이다. 하지만 우회로를 찾아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를 달려왔다. 이 터널은 그나마 지나가는 차량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후미등을 켜고는 터널 안으로 들어선다.

우리나라 터널 안이 대체로 그렇듯이 장복터널 역시 갓길 같은 게 따로 없다. 그래서 도로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달려야 한다. 그리고 대범해야 한다. 이런 터널 안에서는 승용차가 덤프트럭처럼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덤프트럭 같은 대형차들은 탱크가 돌진해오는 것 같이 위협적이다. '탱크'가 지나갈 때마다 몸이 흔들린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위험한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진해 시내다. 진해는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 가운데 하나다. 진해항 바닷가를 따라 자전거도로가 곧게 깔려 있다. 일부 구간, 해안에 자리 잡은 군사시설 때문에 해안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길에도 역시 자전거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진해의 자전거도로가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이곳의 자전거도로는 대부분 인도 겸용인 데다, 중간 중간 길이 끊어지는 곳이 많아 꽤 불편한 편이다. 폭이 좁거나 노면이 고르지 못해 불편한 점도 있다. 따라서 진해에서는 경우에 따라 도로 위를 달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도로에 차량이 많은 편이 아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부터 언덕을 오르내리는 길이 나타난다. 올봄 미니벨로를 타고 처음 이 길을 달릴 때는 숨이 턱에 차게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때와 다르게 몸이 상당히 가볍다. 언덕도 그렇게 가팔라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체력이 좋아진 것도 아닌데, 몸이 이렇게 가벼운 건 순전히 심리적인 요인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편하다.

삼포.
 삼포.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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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노래하는 '삼포로 가는 길'

진해해양공원 앞을 지나 조금 길고 높은 언덕을 하나 넘으면 '삼포로 가는 길' 노래비가 나온다. 그 노래비 앞에 서서 '삼포로 가는 길' 노래를 연이어 듣는다. 들을수록 마음이 푸근해지는 노래다. 노랫말에서 '걷다 보면'을 '달리다 보면'으로 바꾸면, 바로 내 이야기가 돼 버려 묘한 느낌을 준다. 이 노랫말을 짓던 당시 작사가의 마음이 내 심정과 같았던 게 분명하다.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굽이굽이 산길 걷다 보면 한발 두발 한숨만 나오네 아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삼포로 가는 길, 1절)'

노래비가 서 있는 산비탈 아래 마을이 바로 삼포다. 노랫말을 잘 들어보면 그 옛날 삼포는 산길을 걸어서 다녀야 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조용한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삼포는 노랫말과는 영 다른 분위기다. 포구를 앞에 두고 횟집이 즐비하다. 마을 뒤로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가는 마당에, 그 마을의 포구가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리가 없다.

삼포를 떠나 흰돌메공원이 있는 언덕을 넘어가면 사도 해안도로다. 자전거도로가 바닷가에 바짝 붙어 있다. 그 도로 위로 바닷가를 따라 달리는 기분이 쾌적하다. 경치도 아름답다. 하지만 이곳의 자전거도로 역시 노면이 너무 거친 게 흠이다.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보다도 더 거칠어진 느낌이다.

안골포를 돌아 나와 부산신항만으로 넘어가는 언덕을 오른다. 이 언덕만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내가 그렇게 애달아 하던 부산이다. 충분히 감동에 젖을 만하다. 하지만 지금은 감격에 북받치기에는 조금 이르다. 부산신항만을 지나서, 그 앞에 바로 가덕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덕도는 비록 땅은 작지만, 그 위용은 여느 섬 못지않다. 가덕도는 이미 섬이 아니다. 섬과 육지 사이 바다를 매립해 육지화하고 있는 중이다.

굴구이로 유명한 안골포. 바닷가에 생굴을 까서 파는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굴구이로 유명한 안골포. 바닷가에 생굴을 까서 파는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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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 굴강. 조선시대 군선이 정박하던 곳. 문화재 발굴 예정 알림판이 서 있다.
 안골포 굴강. 조선시대 군선이 정박하던 곳. 문화재 발굴 예정 알림판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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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에서부터 애먹이는 섬, 가덕도

가덕도를 여행하려면,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타고 450여m 높이의 산을 넘어다녀야 한다. 결코 만만한 섬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섬이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애를 먹인다. 길이 매우 복잡하다. 가덕도 방향 도로 표지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그 길을 부산 신항만 컨테이너터미널을 드나드는 트레일러들과 함께 달린다.

게다가 이곳은 현재 가덕도와 거제도를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느라 공사 차량이 뻔질나게 드나든다. 부산 신항만에서부터 미로와도 같은 도로를 지나, 도로 주변 공사장을 지나가야 하는데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공사장인지 구분 가지 않는 곳도 있다. 대형차들이 지나다니느라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길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가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안쓰러운 광경이다.

이곳은 도로 공사뿐만이 아니라 부두를 확장하는 공사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가덕도와 육지 사이의 바다를 메워 대규모 부두를 건설하고 있다. 이곳에서 매립지가 걸쭉한 늪으로 변해가는 광경을 구경하는데, 그 느낌이 사뭇 섬뜩하다. 매립지 앞에, '이곳에 빠지면 다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경고판이 여러 개 서 있다.

가덕도 장항고개에서 내려다 본 매립지.
 가덕도 장항고개에서 내려다 본 매립지.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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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해안도로로 들어서는 얼마 안 가 산줄기를 타넘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 언덕에 '장항고개'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 고개를 웬만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전거를 타고 넘을 생각이었는데, 겨우 30m를 가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런 길은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 것도 쉽지 않다. 가덕도는 섬 전체가 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에서 열이 나면서 안경에 김이 서리는데, 중간 중간 그냥 되돌아 내려갈까 고민하게 만든다. 이 고개를 넘어갔다 다시 되돌아 넘어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걸어 오른다(!).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니까 어느 정도 버틸 만하다. 그런데 언덕을 이렇게 천천히 걸어서 오르다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시간이 더 문제다. 어느새 시간이 오후 4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고개를 넘어가는 사이 하늘에 먹구름이 덮인다. 날씨가 급변하는 게 조짐이 좋지 않다. 이런 날은 평소보다 더 빨리 어두워질 수 있다. 이런 상태로는 해가 지기 전에, 섬을 빠져나가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부산신항만 컨테이너 터미널 부근 도로
 부산신항만 컨테이너 터미널 부근 도로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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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 돌풍에 비까지 내리다

가덕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섬이다. 가덕도는 섬 전역이 공사 중이다. 거제도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섬 곳곳을 개조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가는 곳마다 땅이 파헤쳐져 있고, 공사 차량이 줄을 지어 지나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섬에 도로는 좁고, 갓길은 없다. 그리고 경사가 가파른 지역이 많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다는 게 상당히 무모한 일이다.

그 길을 덤프트럭과 함께 지나다니는데 살이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길을 이렇게 무리해가며 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공사 때문에 그나마 자전거로 돌아다닐 수 있는 구간이 제한적이다. 갈 길이 바쁜 데다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나 있는 나로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결국 거가대교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바닷가 공사장을 앞에 두고 자전거를 되돌려 나온다.

가덕도를 나와서는 명지오션시티까지, 녹산국가산업단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달린다. 명지오션시티에 도착할 무렵, 해가 떨어진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 을숙도를 넘어 바로 부산 시내로 진입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명지오션시티 외곽으로 아스콘을 덮은 자전거도로가 깔려 있다. 가로등까지 켜 있다. 이때만 해도, 이 길을 따라가면 날이 어두워져도 을숙도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명지오션시티를 벗어나 을숙도를 향해 달려가는 길에 갑자기 돌풍이 불기 시작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바람이 앞을 막아 더 이상 달리기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때맞춰 비까지 흩뿌린다. 결국 을숙도를 넘어가지 못하고 을숙도가 건너다보이는 낙동강가에서 오늘 하루 여행을 마무리한다.

해질 무렵, 명지오션시티에서 바라본 신호대교.
 해질 무렵, 명지오션시티에서 바라본 신호대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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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구니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안장에 눌린 상태로 58일을 버텼으니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도중에 할 수 없이 안장코를 조금 낮췄다. 그 결과 사타구니 통증은 조금 줄어든 대신에 엉덩이 통증이 좀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사타구니를 누르던 힘이 엉덩이에 집중된 탓일 게다.

앞바퀴 뒷바퀴 모두 계속해서 바람이 새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앞바퀴는 어제 수리를 했는데도 계속 바람이 새고 있다. 수리를 잘못한 게 분명하다. 바람이 새는 양이 적어 자전거를 타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지만, 때때로 공기를 주입해야 하는 게 여간 성가시지 않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93㎞, 총누적거리는 3953㎞다.


태그:#진해, #가덕도, #장복터널, #부산, #거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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