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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족과 함께 삿포로(札幌) 시내의 오오도리공원(大通公園)을 지나 삿포로역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눈앞에는 일본 북방의 계획도시답게 정연하게 정리된 블록 위에 빌딩들이 둘러 서 있었다. 빌딩 숲속에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빨간 지붕의 건물이 보였다. 바로 삿포로의 상징이자 관광명소인 도케이다이(時計台)이다. 도케이다이는 내가 과거에 보았던 모습에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한 건물의 모습은 여전했다.

 

이 시계대 건물은 1878년에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업고등전문학교의 연무장 건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의 시계탑은 현재 일본의 시계탑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71년에 국가 중요문화재에 지정된 이 건물은 현재 시계탑의 역사와 함께 삿포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관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나는 시계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9년 전에 나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홀로 홋카이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당시 수많은 답사로 지친 다리를 끌고 이 건물의 특별전을 둘러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시계대 입구에서는 고령의 할아버지가 시계대 특별전을 홍보하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의 표정에서는 이 시계대를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던 모습이 묻어나왔다.

 

그의 자랑스러움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 할아버지를 보면서 작은 일이지만 정성을 다하는 일본인들에게서 문화적 충격을 느꼈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특별전에 전시된 전시물들은 큰 시계 모형 외에 생각나는 것이 없지만 그 할아버지의 표정만이 이상하리만큼 뇌리에 크게 남아 있다.

 

나는 그때 그 특별전의 방명록에 '한국에서 온 노시경'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기록을 남기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성향으로 볼 때 나의 방명록도 이 시계대 관련시설의 어디엔가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19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1층 안으로 들어서자 기억의 조각을 맞추듯이 나의 머리 속에는 과거의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배낭여행 당시 지친 몸으로 이곳을 둘러보던 나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2층인 이 건축물은 미국 중서부 지방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인 1874년에 개척사를 통해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일본을 개국시킨 미국의 서부 개척 과정을 모델로 삼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 스타일의 홋카이도 농학교를 세우고 미국에서 교육자를 초빙하게 된다.

 

이 시계대 건물은 당시에 연무장으로 불리었다. 즉 군사훈련장 건물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 대학교 내의 ROTC 본부 같은 건물로서 군대교육 장소였다. 그 이름 유명한 탑시계는 이 농학교 개교 3년 후인 1881년에 건물 전면에 설치되고, 그해 8월 12일에 시계가 작동을 시작했다.

 

도쿄의 제국대학이 개교한 해가 1877년이었으므로 1876년에 개교한 홋카이도 농학교는  당시 일본에서는 선진적인 고등 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홋카이도 농학교는 일본 최초로 군사교육을 실시한 곳이었다. 지금은 실내체육관처럼 보이는 이곳이 일본 최초의 근대 군사교육을 실시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 선진학교에 연무장을 만들고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홋카이도 농학교는 홋카이도 개척의 지도자를 기르는 곳이었지만 당시 홋카이도에는 러시아가 사할린을 점령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있었다. 그래서 홋카이도 농학교 학생들은 4년 교육 이수 후에도 개척사에서 5년 동안 의무 복무를 해야만 했다.

 

사할린보다는 삿포로를 중심으로 한 광활한 홋카이도 개척에 힘을 기울였던 개척사는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 홋카이도 농학교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했던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군복을 입고 기마훈련을 할 정도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삿포로의 농학교는 학교의 규모가 커지면서 홋카이도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의 홋카이도 대학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자연히 연무장인 시계대 건물도 이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삿포로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면서 사랑을 받아온 건물을 보존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원래의 위치에 자리를 보존하게 된 시계대는 1906년에 북2조 거리가 삿포로 시내에 새로 뚫리게 됨에 따라 옛날 위치에서 남쪽으로 130m 옮겨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다.

 

단순해 보이는 이 시계대가 삿포로에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시계대가 삿포로 시내에 남은 개척사(開拓使) 시대의 아름다운 서양식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오랜 문화적 유산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오랜 세월 소중히 간직하려는 일본인들의 열망이 이 건물의 보존에도 담겨 있다.

 

역사적 유물이 많지 않은 홋카이도에서 개척사에 의해 만들어진 120년이 넘은 이 건축물은 그들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120년 이상 된 건축물은 많이 있지만 화재에 약한 목조건물이 120년의 역사를 이어왔으니 충분히 보존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삿포로 시민들에게서 그렇게 사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지?"

"이 시계대는 일본인들이 즐겨하는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어. 이 시계대의 시계는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계의 시간도 정확할 뿐 아니라 조금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종소리를 삿포로 시내에 울리고 있지. 메이지 시대에 삿포로 시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아름다운 추억이 아직도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깊게 남아 있어. 아마도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메이지시대의 종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기를 기원하고 있을 거야."

 

나는 당시 시계대를 둘러싼 풍광을 머리 속에 상상하면서 농업학교 학생들을 위한 강의실 및 표본전시실로 사용되었던 1층을 둘러보았다. 삿포로 역사관에는 약 4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현재 건물 1층에는 삿포로 개척 당시의 역사와 삿포로 농학교 관련자료, 시계탑 관련 사진, 그림, 책자 등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자료관에서는 시계대의 목조 모형, 시계의 내부구조, 시계대 수리공사 당시의 기록, 문학과 노래에 반영된 시계대, 시계대의 건축구조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시계대에 관련된 에피소드 외에 미국의 뉴저지에서 기증되었다는 파란 눈의 패니 피오(Fanny Pio) 인형까지 전시 중이다.

 

몇 년 전에 시계탑의 외관을 전면 수리하면서 당시에 교체된 목재들까지 전시하고 있고 수리 당시의 영상도 상영 중이다. 이때 시계탑 아래를 장식하고 있던 삿포로의 상징 북극성, 즉 빨간 별도 교체되었는데, 교체된 붉은 별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작은 유물하나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끝까지 보존하려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이 여기에서도 느껴진다.

 

1층 전시물 중에서 가장 눈길을 잡아당기는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에서는 시계대 건물이 화재로 인해 전소될 뻔한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 불붙은 건물의 지붕 위에 올라간 학생들이 옷을 벗어 열심히 불길을 내리치고 있었다. 농학교 학생들의 굳은 헌신으로 이 시계탑이 지켜져 내려왔음을 강하게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자료를 유심히 보다 보니 건물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벽면은 올리브색이라고도 불리는 녹갈색이 칠해져 있었다. 시계대 건물 외벽은 무결점에 가까운 흰색이었는데 건물 내부에는 곳곳에 올리브색이 칠해져 있었다. 건물을 새로 도색하게 되었을 때에 건물 전체를 올리브색으로 칠했다가 무슨 이유로 다시 흰색으로 바꾼 것 같다. 아마도 흰색이 원형이라고 생각한 삿포로 시민들의 강한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내부 벽면 곳곳에 건물 밖을 향한 창문들이 있었다. 창문은 요즘 흔하지 않은 과거의 창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건물의 창문은 위 아래로 올려서 열게 되어 있는 나무창문이었다. 별거 아닌 과거의 창문이지만 나 어릴 적의 추억을 아스라이 떠올리게 한다. 내가 어릴 때 유리창을 닦던 초등학교 교실의 유리창이 이렇게 생겼었던 것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은 일제 때 지어져서 같은 양식의 건물들을 일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이 시계대의 창문도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2층으로 올라서자 홀과 같이 생긴 넓은 대강당이 나온다. 요사이에는 음악회 등 수백회의 공연이 진행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대강당 무대 정면의 벽면에는 연무장(演武場)이라는 큰 편액이 걸려 있다. 이름대로 하면 무예를 연마하던 장소라는 뜻인데 농학교 시절의 이곳에서는 체육수업과 병영 훈련이 이루어졌었다. 1층의 전시장 미니어처에서도 보면 건물 앞에 운동장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이 대강당에서 학생들이 몸을 단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 넓은 훈련장을 보니 많은 학생들이 유도복을 입고 유도를 단체로 훈련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연무장'이라는 이름은 일본강점기를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편치 않은 이름이다. 이 연무장 안에서는 20세기 초까지 홋카이도의 학생들이 무예를 닦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예는 주변 국가들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무예를 닦은 학생들 중 일부는 한일 합방과 일본강점기의 역사에서 우리 선조들에게 많은 고통을 준 학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본강점기에 이곳 홋카이도에 끌려온 많은 조선인 징용자들을 강제노역 시킨 지도자들도 아마 이곳에서 교육받았을 것이다.

 

2층 대강당의 대로변 쪽에는 내부를 분해한 시계탑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시계탑 시계의 작동원리를 관광객들이 관찰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시계는 홋카이도 농학교의 2대 교장이었던 윌리엄 호일러(William Hoiler)가 미국의 하워드(Howard) 시계회사에 주문하여 만든 탑시계이다.

 

이 탑시계 분해품의 앞쪽을 보니 바로 이 시계대 건물의 시계가 있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종을 달기 위해서 종루를 만들었던 곳이었는데 삿포로 시민들에게 표준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정밀한 시계를 주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계는 1879년에 요코하마를 거쳐 삿포로에 도착했는데 이 시계가 도착하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어찌 생각하면 참 웃기는 이야기인데, 이 시계를 건물 상부의 종루에 넣으려다가 시계가 너무 커서 종루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삿포로 본청은 대책을 고심하였으나 결국 비싼 시계를 걸기 위해 개척사를 설득하고 시계를 걸 종루를 크게 개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새로운 땅에서의 행정에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지어진 이 시계대는 삿포로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시계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시계대 입구의 오른편에는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게 만든 포토 존이 있었다. 아내가 신영이 어깨에 손을 얹고 사진을 찍었다. 건물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사진 중앙에 들어가고 건물 상부의 시계탑도 사진 위편에 자리를 잘 잡는 구도였다. 건물 전체를 다 나오게 사진을 찍으려면 아무래도 맞은편 건물 2층의 외부 난간으로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나는 건물을 아래에서 유심히 올려보았다. 시계탑 지붕의 평면은 자세히 보니 말쑥한 별모양이었다. 지금은 주변의 대형 건물들이 이 시계대를 짓누르듯이 자리 잡고 있지만 처음 시계대가 들어섰을 당시에는 상당히 아름다웠을 것 같다. 시계대는 삿포로 대도시의 도심보다는 미국의 한적한 시골에 있을 것 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밑에서 본 시계대는 더 깔끔하고 안정적으로 보였다.

 

시계탑 건물 밖으로 걸어가는데 뭔가가 허전했다. 뭔가 핵심을 빠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하다는 교회 시계대의 종소리를 직접 듣지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맑고 곱다는 종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나는 그냥 평범한 종소리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종소리는 작은 것에도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심미안을 즐기는 일본인들의 호사스러움의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굳이 매시 정각에 울린다는 종소리를 기다려서 들으려 하지는 않았다. 나는 삿포로에서도 앞으로 갈 길이 너무나 많은 한국 여행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오오도리 공원을 더 둘러보고 몇 시간 후에 시계대 앞을 다시 지나게 되었다. 야경을 밝힌 시계대가 빌딩 숲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미국 영화 속의 한적한 시골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미국 주택같이 보였다. 마치 이곳은 일본의 풍경이 아닌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종소리가 울렸다. 그 종소리는 삿포로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종소리였다. 일본인들의 스토리텔링이 얽힌 역사를 열심히 배제하고 들어도, 그 종소리는 아름다웠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60편이 있습니다.


태그:#홋카이도, #삿포로, #삿포로 농학교, #시계대, #도케이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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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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