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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도 해변가
▲ 자전거 보헤미안 나로도 해변가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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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대체복무를 신청했다. 일명 공중보건의라는 건데, 의료시설이 열악한 시골로 주로 배치를 받는다. 어쩌다보니, 이름도 처음 들어본 '나로도'에 배치를 받았다.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이 섬에는 나로우주센터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게 섬 이름을 땄다는 걸 잘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사하는 날, 가도 가도 끝없는 굽잇길에 진저리가 났다. 전기, 수도는 들어오지만 오지 같았다. 심심해서 섬 안을 자주 돌아다녔다. 화수분처럼 매력이 솟아났다. 고즈넉한 섬이 좋아졌지만 모두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었다. 관광버스가 수시로 드나들지만 우주센터만 관광하고 갔다. 섬을 느껴보고 싶어서 오는 배낭족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지난 여름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를 본 건. 그래도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듯한 모습 때문에 남들과 달라 보였으니까. 나로도의 한 마트 앞에서 그가 옆에 있었다.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자전거 라이더'라고 부르는 사람들과는 뭔가 달랐다. 흔하디 흔한 자전거 두건은 커녕 생뚱맞게 밀짚모자를 쓴 농부 같은 모습. 물건 배달할 때 쓰는 짐칸 달린 자전거도 주인을 쏙 빼닮았다. 자전거에 기어 변속장치도 없었다. 

'어, 여기 사람이 아닌데.' 이런 생각과 함께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그리고 무던한 일상 속에 묻혀버리는 줄 알았다. 어느덧 하루 진료가 다 끝났다. 항상 진료가 끝나면 운동을 하긴 하지만 그날따라 섬 둘레를 조깅하고 싶었다.

'스트레칭을 먼저 하고 달리기를 할까. 아니면 바닷가까지 달려가서 스트레칭을 할까.' 나는 뒤를 택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마침 해변가에 텐트를 친 그 사람이 바닷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행 오셨나 봐요?"
"예, 서울에서 왔습니다. 여기 사시나 보네요?"
"오, 멀리서 오셨네요. 저는 여기 근무하고 있거든요. 우주 센터쪽도 갔다 오셨나요?"
"아, 거기 죽음이던데요. 제 자전거로 가면서 중간에 포기할 뻔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그의 여행이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곽동운 입니다."

그의 이름을 적었다. 대화 도중에 그가 전해준 에피소드 하나는 곽동운씨에 대한 느낌이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는 나로도로 내려오는 길에 어느 대학교 캠퍼스를 지나갔다. 간밤에 빈 강의실에서 자느라 떡진 머리에 까칠한 수염, 그리고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남루한 옷차림. 게다가 낡은 자전거. 요즘처럼 자전거 좀 탄다고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헬멧에 두건에 자전거 수트로 패셔너블하게 치장한 사람들만 있는 상황에서 그의 행색은 지나가는 대학생들 눈에 띄었다. 한 무리의 여대생들이 지나가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우와, 멋있어요. 자전거 여행 하시나 봐요."

꾸밈없이 진정으로 자기를 칭찬해주는 그녀들 앞에서 수줍었다는 그. 자전거에 부여된 '자유로움'이라는 분위기에만 너무 신경쓴 나머지 자기가 자전거를 타는 이미지에만 신경쓰는 사람들. 복장이나 자전거가 비싸보일 수록. 그리고 전국 일주를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했느냐로 자전거 라이더의 레벨을 결정짓는 분위기.

나 또한 자전거 타고 나갈 때 왠지 장갑 정도는 껴 줘야 되고, 두건 정도는 차 줘야 라이더로 사람들이 봐주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외모에 신경쓰면서부터 '자전거 타기'도 자유로움이 아니라 하나의 속박이 되어 버렸다. 뭔가 그럴듯 하게 차려입고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다른 라이더들에게 꿀릴 것 같다는 느낌.

얘기하다가 시선을 돌려보니, 학창시절 내내 책을 넣어가지고 다녔을 헌 책가방이 자전거 뒷칸에 매여 있었다. 내게는 그 어떤 자전거 배낭보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날 저녁 나는 그에게 다시 들렀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던 '생맥산'을 몇포 건네주었다. '생맥산'은 더운 여름날 갈증나고 진이 빠질 때 몸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약이다. 한 명의 보헤미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문자 하나가 왔다.

"일찍 출발해야 돼서 인사도 못 드리고 갔네요. 주신 약 감사합니다. 힘이 나네요."


태그:#공중보건의, #나로도, #닥터맨, #자전거,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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