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국민군단 본부 건물들과 파인애플 농장
 국민군단 본부 건물들과 파인애플 농장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낮에는 농장에서 노동하고 저녁에는 군가를 부르며 목총을 메고 행진했던 국민군단은 처음 103명의 단원이 나중 311명으로 늘어났다. 당시로는 해외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미국의 헌법은 자국 내에서 외국인의 군사 활동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와이 군사령부가 한인의 특별한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묵인해주었다.

앉아쏴 자세를 취하는 국민군단원들
 앉아쏴 자세를 취하는 국민군단원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훈련에는 소총과 탄약이 허용되지 않아 목총과 권총, 그리고 지휘도를 사용했다. 당시 군단에서 구비하고 있던 장비를 보면 목총 350정, 45식 단총 39정, 군도 10개, 나팔 12개, 북 6개 그리고 영문과 일문으로 된 군사서적 28종이 있었다.

군복으로는 장교복이 황금색이고 병사복은 흑색이었다. 군복 단추는 호랑이 머리를 돋을새김한 것이었다. 사관의 모표에는 성벽이 있고 그 좌우편에서 호랑이가 발을 뻗어 서 있으며, 그것을 밑에서 사람 손으로 받들고 후광이 빛나며 성문 밖에서는 밭을 가는 농부를 집어넣어 '둔전병'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군단원들이 소지했던 군인수첩들. 중요하거나 암기할 사항들을 적어두었다.
 군단원들이 소지했던 군인수첩들. 중요하거나 암기할 사항들을 적어두었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군기는 엄정했다. 망국의 수치 때문에 사기는 강고했다. 야외에서는 전투훈련을 하고 막사 안에서는 군사학을 학습했다. 행진할 때는 군가를 불렀다. 구한말 시절 광무 군인들은 '대한군인 애국가'를  지어 불렀다. 군인들의 애국심을 드높이기 위해 자체로 만든 애국가였다. 국민군단에서도 박용만이 작사한 '됴선 국가'를 불렀다.

<됴션 국가>
(1)
어엿으고 아름답다 산 놉고 물 고흔 우리나라
산마다 독립긔샹 물마다 쟈유사샹
자유독립 거룩한 흙 오 나의 사랑

(2)
보아라 아희들 큰 나라 빗 영광을 볼지어다
단군긔쟈 신셩 덕화 신라 고려 문명개화
어나 셰게 어 나라 다시 잇나

(3)
동반도 대됴션 그 일흠 억만 년 변티 마라
땅덩이 다 달도록 햇빗히 다 늙도록
해동반도 됴션국 그 일흠 항샹

(4)
직혀라 아희들 두 번 없 그를 직힐지어다
동녁 셤 맑은 물 북녘 들 풀은 풀
너희 말 몯 먹이거던 자디 말라

높이 솟은 코올라우 산봉우리들은 호놀룰루에서도 잘 보인다. 군단의 병영에서는 더 가까이 보인다. 코올라우 산줄기는 높이가 일정한 거대한 톱날처럼 들쭉날쭉하고 언제나 푸르스럼한 색깔의 신비를 내뿜으며 장엄하게 달린다.

마치 그 산줄기의 기백을 닮기라도 한듯 매일 새벽 6시면 군단의 생도들은 박용만이 작사한 <됴선 국가>나 <국민군가>를 부르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국민군단원들의 휴일. 나비넥타이를 하거나 군복을 입은 채 차를 타고 있다.
 국민군단원들의 휴일. 나비넥타이를 하거나 군복을 입은 채 차를 타고 있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국민군단은 군단과 사관학교로 구성되는데 사관학교를 '병학교'라고 칭했으며, 군단 사령부 단장과 병학교 단장은 박용만이었다. 그 외의 조직으로는 군단 경리부, 피복창, 훈련대, 별동대가 있었다.

1916년 12월 상해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하와이로 건너온 노백린 장군은 국민군단에 합류해서 별동대 주임을 맡았다. 노백린은 황해도 출신으로 1895년 20세 때 국비로 일본유학을 갔다. 1899년 일본육사를 졸업, 귀국한 후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한일합방 이후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제1차 개각에서 그를 군무총장으로, 박용만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했다. 

구한말 장교 시절의 노백린장군(1875-1926)
 구한말 장교 시절의 노백린장군(1875-1926)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불행히도 국민군단의 생명은 길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문을 닫게 될 운명에 처해졌다. 망국민의 설움을 톡톡히 치루게 된 것이다. 1915년 군단학교는 카훌루에서 북쪽으로 약 20 Km 떨어진 카후쿠 지역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됐다. 그 다음 해 10월 군단학교는 불행히도 폐교되고 만다.

사열식에 도열해 있는 국민군단원들
 사열식에 도열해 있는 국민군단원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무엇보다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였다. 1915년 여름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은 미 국무부에 항의했다. 한인들의 군사훈련을 허용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의 표시라는 거였다.

국무부는 내무부에 통고했다. 내무부 장관 로버트 랜싱은 핑크햄 하와이 주지사에게 조치를 취하라고 했고 그 결과 국민군단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런저런 외부 여건들도 나빴다. 파인애플 농장의 불경기와 흉작으로 수입이 크게 준 것도 군단 유지에 어려움이 됐다. 1915년 초부터 벌어진 이승만 추종자들에 의한 동포사회의 분열은 국민군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점점 갉아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국민회 하와이 총회 대의원이었던 29세의 정두옥씨는 후에 쓴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實記)'에 이렇게 적었다.

"국민군 사관학교도 시기에 피해가 되어서 더 진보할 수 없이 되었다. 당시에 학도들이 헤어질 때에 서로 붙들고 대성통곡으로 이산되었다. 그러고도 남아 있는 학생이 수십 명이라 정두옥씨의 교섭으로 외이엘루아 사탕농장에 옮겨 두었다가 다시 태병선씨가 카후쿠 농장에 교섭하여 그곳으로 가서 있다가 차차 파산되고 말았다."

1916년 박용만은 그들 중 상당수를 하와이 군사령부와 교섭하여 미군의 각종 사업에 취역시켰다. 그 동안 파인애플 경작과 특연으로 얻은 재정수입은 78,642 달러나 됐다. 2년 동안의 군단경비로 지출한 금액은 5만 8442달러, 잔금은 2만 200달러였다. 이 잔금은 만주와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으로 적립했다.   

국민군단이 폐쇄된 다음에도 노백린은 박용만과 행동을 같이 했다. 무엇보다 둘 다 '무력항쟁'이라는 노선이 같았기 때문이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3월 3일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했다. 350명이 단원으로 참가했다. 기관지로 <태평양시사> 주간지를 발간했다. 이 신문은 박용만의 주도로 3개월 전부터 발간되고 있었으며 노백린이 사장과 주필을 맡았다.
 
1919년 9월 상해임시 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 노백린을 군무총장, 박용만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하자 노백린은 당시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 가 있는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으로 떠난다.

뒷줄 오른쪽 노백린, 그 옆 이승만, 그 앞은 정한경(1920년 초 워싱턴)
 뒷줄 오른쪽 노백린, 그 옆 이승만, 그 앞은 정한경(1920년 초 워싱턴)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다음 해 2월 20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노백린은 윌로우스에 설립된 '한인비행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약 1년 정도 교장으로 있다가 군무총장에 취임하기 위해 상해로 간 것은 1921년 2월 2일.

박용만은 한 해 전인 1920년 3월 29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무력항쟁에 더 관심이 많아 북경으로 가 머물렀다. 1921년 북경에서 보합단(普合團)을 조직했다. 중국의 동북 3성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을 재편성해 민족정통 항일세력들을 총집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단장은 박용만, 군임장은 노백린, 내임장은 신채호, 재임장은 김창숙, 사령관은 김좌진으로 모두 무력항쟁파였다. 중국에 와서도 노백린은 자기보다 6살 어린 박용만을 뒤에서 밀어주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