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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 한 달여를 남겨두고 있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2010 남아공 월드컵,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국제 스포츠 대회가 세 차례 열렸다. 또 2010 G20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렸고, 오랜만에 남과 북의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졌으며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이 한국 내 영토를 포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덧 2010년의 끝자락에 와 있는 이 시점에서 2010년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와 의의를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일종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안중근을 보다>(해피스토리 펴냄)를 펼쳐들게 했다.

 

"나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쏜 것이므로 나에게 적용할 법은(중략) 육전(陸戰) 포로에 관한 국제법이오. 왜 나를 일본법으로 처리하는 것이오?"(20쪽)

 

2010년 올해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라는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자,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0주기가 되는 해다. 안 의사는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그 이듬해인 1910년 중국 뤼순 감옥에서 서른두 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2010년, 다시 안중근을 읽어야 하는 이유

 

안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는 군인 신분으로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기에 국제법에 따라 전쟁 포로로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일반 형사범으로 처리하고 살인죄를 적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안중근 의사가 한 나라의 장군이라는 군인 신분을 무시하는 행위였고, 대한제국을 독립국이 아닌 일본의 속국으로 간주하는 행위였다. 또 안 의사가 행했던 거사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단지 살인자, 혹은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기 위한 행위였다.

 

"이 날의 재판 광경을 취재한 영국의 <더 그래픽>에서는 그날의 풍경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30세 젊은 청년 안중근이 그 시대 제국주의의 가장 실세인 이토 히로부미를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시키고, 청년 안중근은 재판의 승리자가 되어 월계관을 쓰고 당당히 법정을 나섰다."(60쪽)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장군의 신분으로서 전쟁 포로로 재판을 받든, 살인자의 신분으로서 일반 형사범으로 재판을 받든 결국 그에게 선고되는 형벌은 사형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군인 신분으로 총살형을 당하느냐, 살인자의 신분으로 교수형을 당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렇다면 대체 안중근 의사는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그 자리에서 순순히 체포된 것일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대한제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일제로부터 핍박 받는 백성들을 위함이고, 둘째는 동양평화에 대한 그의 신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저해 및 방해하는 세력의 수장이었고, 이러한 그를 저격한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큰 일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당대에만 효용했던 것이 아닌, 100년 후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을 만큼 미래지향적입니다. 우리가 안중근을 의사를 넘어선 진보적인 사상가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49쪽)

 

<안중근을 보다>를 통해 알게 된 안중근 의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양평화론이라는 그의 사상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중요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였던 뤼순 지역을 영세중립지로 만들어 동양평화회의를 조직되길 바랐다. 이어 중국·일본·대한제국 세 나라의 청년들로 구성된 평화군을 양성하여 각기 독립국가로서 주권을 가지고 서로 협력해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처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공동 은행 설립, 공동 화폐의 발행 등을 주장했는데 이는 마치 오늘날 유럽연합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이러한 사상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그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사형일을 미루어 달라고 요청했을 만큼 동양평화론 완성을 위한 집념이 컸지만 안중근 의사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양평화론은 서술 정도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일본에 의해 철저히 묻혀 있다가 70년이 지나 발견되었다. 만약 그때 동양평화론이 완성되었다면 어땠을까. 유수의 사상들이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석학들에 의해 연구되어 더욱 견고해지지 않았을까? 또 오늘날 동북아시아 아니 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화합을 위한 해법의 단초로 동양평화론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사라진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한반도에 돌아온다면?

 

"증조할아버지의 유해가 남과 북의 경계선에 묻히면 남한과 북한 모두 안중근 의사에게 절을 하게 될 거고, 그러면 남과 북이 서로 마음을 맞춰 맞절을 하는 게 되겠죠. 그건 아마도 하늘에 계신 증조할아버지가 간절히 바라는 일일 거예요." (172쪽)

 

안 의사의 증손자 안도용씨의 말이다. 안중근 의사는 죽기 전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대한제국이 독립했을 때, 유해를 이장해 조국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일본은 안중근 묘역이 독립운동의 중심과 성역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가족들의 요구에 불응해 유해를 건네지 않았다.

 

결국 발굴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한 상태이며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안중근을 보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름 아닌 안중근을 통한 남과 북의 이해와 화합에 관한 성찰일 것이다.

 

김일성을 신성시하는 북한에서조차 안중근 의사만큼은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김일성 관련 문서들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조선혁명박물관 한쪽 공간에 안중근 의사의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북한 사람들 역시 안중근 의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08년 남과 북은 안중근 의사 공동유해발굴조사단을 발족하여 뤼순에 파견했다. 안중근 의사의 증손자 안도용씨의 말처럼 증조 할아버지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와 남과 북의 경계선에 묻히게 되는 날, 남한과 북한 모두 서로 마음을 맞춰 같을 곳을 향해 맞절을 하게 되지 않을가?

 

안 의사는 살아서는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점점 그 골이 깊어지는 남과 북의 이해관계와 이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위해, 남과 북의 화합을 위해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끝끝내 내 의지와 신념을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나의 뜻을 굳건히 믿었기 때문이며, 내 스스로가 나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사형장 앞에 나아갈 수 있었소. 나를 살리고 나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임을 명심하시오. 그대들 스스로 자신의 뜻을 세우고 이를 확고하게 믿으며 나아가시오. 그대들에게, 그대들의 길이 열릴 것이오." (70쪽)


안중근을 보다 - 100년 만에 드러난 새 얼굴

황병훈 지음, 해피스토리(2010)


태그:#안중근, #안중근을 보다, #황병훈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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