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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달은 100% <성균관 스캔들>이었다. <동방신기>라는 아이돌 그룹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고, 그 중 믹키유천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는 있었지만, 얼굴은 몰랐다. 다만, 최강, 영웅 등 한자 투의 호(號)(?)를 쓰는 다른 이들과 달리 믹키라는 영어 이름을, 그것도 미키가 아닌 믹키라고 썼기에 맘에 들지 않는다는 느낌만 스쳤을 뿐이었다. 외래어 표기법 오류는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유천이라는 인물을 처음 '발견'한 것은 드라마 안에서였다. 그랬기에 그룹 동방신기에서 '깨방정' 담당(?)이라는 그의, 단정한 선비 연기를 아무런 편견없이 지켜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박유천이 연기한 이선준의 모습은 내게 희망을 주었고, 올곧은 선비(?)가 되어야겠다는 삶의 목표까지 제시해 주었다. 드라마 캐릭터 하나 따위에 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하겠지만 결코 농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박유천이 보여준 이선준은 품격 있고 단아하면서도 남성적 매력까지 갖춘 선비였다. 게다가 원칙을 지키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설득력 있게 연기해 냈다.

 

원칙과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 이선준의 모습에서 단 한 번도 세상이 정한 틀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리 살았기에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세상이 참 재미없을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이선준의 단정하고 강직한 모습은 타인에게 신뢰를 주었고, 만인이 본으로 삼는 기준이 되었다. 결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없는 내게, 많이 노력해야 하겠지만, 원칙대로 살아도 저토록 멋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불혹을 앞둔 나이, 아이돌에 빠지다

 

나와는 드라마 보는 코드가 참 다른 이십년 지기가 있다. 세상을 재미없게 산다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도록 드라마도 분석해 가며 보는 나와 달리, 친구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머리 식히는 휴식용으로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항상 좋아하는 드라마가 달랐는데, 이번에는 친구가 <성균관 스캔들>에 더 흠뻑 빠져들었다. 나보다 자유로운 영혼인 내 친구는 물론 '걸오 사형(유아인 분)'에 빠졌지만 말이다.

 

그 친구가 목욕재계까지 하고, 빛의 속도로, 아니면 미친 듯 클릭한 덕분에 우리는 11월 27일 오후 7시에 하는 그룹 JYJ의 공연을 좋은 자리로 예매할 수 있었다. 그룹 JYJ는 믹키유천, 시아준수, 영웅재중(한글 자모 순 배열임) 세 명이 만든 그룹이다. 김재중과 김준수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내게는 '박유천'을 보러 가는 공연이었다. 그런데, 공연까지 쫓아가는 이모 팬이 우리 뿐만은 아니었다. 사촌 언니 한 명, 언니의 동료 한 명도 같은 공연을 예매했다!

 

십대 시절, 인기 가수 콘서트 한 번 가 본 적 없었고,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이해해 본 적도 없었다. 아이돌 가수란, 대형 기획사에서 붕어빵 찍어내듯 만들어내는 상품, 가창력 있는 가수들의 설 자리를 잃게 하는 존재,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경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존재, 이게 내가 가진 아이돌에 대한 편견이었다. 발레, 뮤지컬, 오페라, 창극은 가장 좋은 자리에서 감상해 본 경험이 있지만, 그보다 더 비싼 비용을 아이돌의 콘서트에 쏟아 붓는다는 사실이 왠지 난감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영문학 교과서에 실리기 위해 작품을 썼던가? 철저하게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희곡 대본, 연극 무대에 올리기 위한 통속극 대본을 썼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작업 속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주옥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다른 예술 장르에도 이런 예는 흔하다. 현재는 싸구려 대중문화에 불과했지만, 미래에는 불멸의 고전이 된 예는 많은 나라의 역사 속에 무수히 많다.

 

아이돌 스타와 그들에 대한 팬덤은 1990년 대 즈음에 시작된 사회 현상 중 하나다. 먼 훗날 한국사는 20C 말~21C 초 문화 현상으로 "대형 기획사가 만들어 낸 아이돌 그룹의 융성"이라는 내용을 기록하지 않을까? 그런 '역사적 현상'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위해서 콘서트 현장을 직접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내 편견과 달리 요즘 아이돌은 외모와 가창력을 두루 갖춘 경우도 많다고 하지 않는가.

 

이 추운 날 저리 헐벗고....감기 걸리면 어쩌지?

 

드디어 11월 27일 토요일, 콘서트의 날이 왔다. 장소가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이라서 거의 1시간 전에 현장으로 갔다. 홀로서기 이후 첫 콘서트이기에 능력 있는 기획사를 섭외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미숙한 현장 진행으로 공연 예정 시각, 오후 7시 보다도 한참 후에야 예약한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촌 언니의 조언으로 준비해 간 무릎담요를 좌석에 깔고 따뜻하게 앉아서 공연을 기다렸다. 공연은 1시간이나 지연된 8시에야 시작되었다.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친구는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잠실주경기장에서 엘튼 존 공연을 본 적이 있어. 그때는 저 멀리 있는 스탠드 석이라 앞에 매달리며 봤는데도, 면봉 만하게 보이더라. 엘튼 존이 어디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는 거야. 오늘은 좋은 자리니까 최소한 얘들이 나무젓가락 만하게는 보일 거야."

 

태어나서 처음 아이돌의 공연을 보았다. 현대 디지털 문명의 총합을 눈앞에 펼쳐 놓은 듯 했다. 무대 곳곳에 배치된 스크린은 적절하게 이동하면서, 때로는 공연에 어울리는 배경을, 때로는 이들의 공연 모습을 비춰주었다. 고운 자태의 꽃미남들이 만들어내는 꿈 속 같은 세상,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팬들이 아이돌에게 열광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까?

 

댄스 가수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날 부른 곡 중 몇몇은 부드러운 발라드였다. 박유천이 추위에 떨며 전람회의 '취중진담'을 피아노와 기타 반주에 맞추어 불렀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김준수가 직접 작곡하고 세 명이 함께 부른 '낙엽'이라는 곡도 감미로웠다. <성균관 스캔들>의 OST 곡을 부를 때는 관현악단의 현악 반주가 곁들여져 신선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날 들려준 곡 중 가장 의미심장했던 것은 'Pierrot(피에로)'라는 신곡이었다. 이건 누가 들어도 JYJ가 SM기획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노래였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고,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고,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다고, 안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본 적도 없고, 세 명이 탈퇴하던 당시의 기사를 관심 있게 읽은 적도 없어서,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예인들의 노예 계약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고, 대형 기획사들의 불공정 계약 문제로 떠들썩했던 적도 있었기에 일반인의 눈에는 가수들이 약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분쟁은 끝나지 않은 듯한데, 이들은 더욱 확실한 결별 선언을 노래에 담고 있었다. 대형 기획사와 이들의 갈등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마무리 될지 궁금해졌다.

 

기본 비주얼부터 멋진 이들이기에, 이들의 춤도 이들이 만들어가는 무대도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남성 아이돌의 음악과 상품을 소비하는 이들 절대 다수가 여성이라서인지, 이 추운 날씨에 헐벗은(?) 차림으로 오랫동안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저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나, 이 추운 날씨에 노래 부르다 목을 상하면 어쩌나, 이들도 인권을 가진 존재들이고 따뜻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근무할 권리가 있는데…. 그래도 마지막 곡을 부를 때, 온몸을 감싼 흰 트레이닝복을 입고 무대에 나오니 그나마 덜 추울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놓이기까지 했다. 앙코르 곡이 없었던 것은 서운했지만, 얘들도 추울 텐데 빨리 들어가서 쉬어야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새로운 아이돌 JYJ, 살아남기를...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사촌 언니와 통화를 했다. 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준수가 I Can Soar 부를 때 마음이 아프더라. 아이돌은 수명 자체가 짧잖아. 큰 인기를 끌었던 아이돌 그룹도 다 사라진 걸 보면. 얘들에겐 소속사와 결별하고 새 그룹을 만든 지금이, HOT나 젝스키스처럼 사라지느냐, 아니면 살아남느냐 하는 기로에 선 상황이겠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절절하게 그 노래를 불렀을 거야."

 

김준수가 I Can Soar를 부르고 나서 자신들의 소망을 담았다고 말한 기억이 났다. soar란 단어의 의미처럼 새로운 그룹과 함께 다시 비상하고 싶다는 의미였는가 보다. 아이돌 그룹 JYJ는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기호를 정확히 파악해서 계속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로 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기획사가 키워낸 아이돌 그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른 버림받은 아이돌의 단명한 후속 그룹처럼 사라져갈지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아이돌 문화가 1990년대에 시작되었으니 벌써 20년 세월이 쌓였다. 그만큼 아이돌 가수들도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 깊이가 없고, 선정적이며, 예술성도 없다고 평가받던 아이돌 그룹에서도 이제는, 셰익스피어처럼, 과거의 많은 대중문화처럼, 예술성과 작품성을 인정받는 이들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룹 JYJ가 미래에도 인정받는 대중문화의 고전이 될 수 있을지, 더 오랜 시간 후의 다른 아이돌 그룹을 기다려 봐야 할지, 이들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태그:#JYJ,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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