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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스캔들>이 지난 2일 막을 내렸다. <동이>와 <자이언트> 사이에 껴서 시청률 한 자리 수를 달리던 드라마에 나는 초반부터 확 꽂혀버렸다. 고백하건데 1회에서 4회까지 방송을 한 번에 보고 난 후 정주행, 역주행을 합해 족히 열 번은 더 봤던 것 같다.

그렇게 애정 담뿍 바친 드라마에 대한 열정이 순식간에 사그라진 것은 윤희가 '여자'가 되고부터였다. 이것은 언젠가 한 번 느꼈던 야속하기도 한 식상함이다. 그것은 문근영의 열연이 돋보였던 <바람의 화원>.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한 폭의 회화로 담아낼 줄 아는 '시선'을 가진 예인 신윤복이 너무나 빤~하게 김홍도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의 정체성 성분 표시 부분에 '예인 함량'이 떨어지고 '연애 함량'이 치솟게 되었을 때, 성분 분포표에 민감한 자는 극에 대한 몰입도가 뚜욱, 떨어져 버린다는 얘기다. 이와 유사하게 문장에 대한 이해력만큼이나 사회에 대한 통찰력도 날카로웠던 윤희가 차츰 '여자'로 읽혀지는 맥락이 커지면서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의 줄임말)의 의무감은 사라져버렸다.

말하자면 윤희는 꿈 꿀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여자였다. 처음에 그녀는 여차저차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성균관에 들어오긴 했지만 출사길이 막힌 몰락한 남인 집안 출신이자 존재 자체가 위법(!)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대충 버티다가 나갈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코페르니쿠스의 대전환 같은 인식체계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는데, 계기는 정약용 박사의 논어 강의였다.

논어 강의 첫 시간에 정약용은 커다란 흰 도자기를 들고 와서는 성적에 적극 반영하겠다며 노골적으로 촌지를 걷는다. 이어 그는 누군가에게는 요강이나 그릇으로 보이는 이 항아리가 자신에게는 화수분으로 보인다면서 항아리 안에서 비단을 꺼내고 불꽃이 튀게 하는 등 묘기를 보인다. 이에 원칙주의자 선준은 어찌 논어제 시간에 서역의 잡기로 상유들의 귀한 시간을 탕진하느냐, 실학을 중시해서 경학과 고전은 필요없다 여기느냐며 항의한다. 이때 정약용 박사께오서 항아리를 높이 들어 깨트리며 가라사대,

논어 위정 편, '군자불기(君子不器)'에 대해 강했네. 군자는 한정된 그릇이 아니라, 진리를 탐하는 군자라면 갇혀있는 그릇처럼 편견에 치우쳐선 안된다 강했네. 서역의 잡기에선 배울 게 없다는 건 무슨 고약한 편견이며 정약용이란 놈이 실학을 좀 했다 해서 고전을 싫어할 거란 무지몽매함은, 참-, 용감하기도 하군. 논어 학이 편 '학즉불고(學卽不告)'에 대해 강했네. 지식이 협소한 사람은 자칫 자신의 좁은 생각에 사로잡혀 완고한 사람이 되기 쉬우니 학문을 갈고 닦아 유연한 머리로 진리를 배우라 강했네. 왜. 너희는 더 이상 4부 학당의 신동도, 사랑채 책벌레도 아닌 국록을 받는 성균관 유생들이다. 백성의 고혈로 얻어낸 학문의 기회다. 부지런히 배워서 갚아라. 있다! 백성들의 더 나은 내일!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건 제군들의 의무다! 우리 제발 밥값들은 좀 하면서 살자.

그러니까 정약용은, 가문이나 재물을 내세워 사회의 기득권을 독식하고 있는 세력에 맞설 것을, 그들이 정해놓은 패러다임을 깨트릴 것을, 그래서 백성들을 위한 새 판을 짤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던 것이다.

윤희는, 얼마나 떨렸을까. 세상이 그어놓은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만큼, 윤희는 그 한계에 저항하거나 뛰어넘겠다는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난! 조선이 그렇게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 안 해!" 라며 미래에 대해 냉소로 일관해왔던 그녀에게 정약용은, 패러다임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 거다.

'신분위계가 바뀔 수 있는 거라면, 성별위계라고 바뀔 수 없는 건 아니잖아'. 가능성이라는 상상력이 무서운 힘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힘이 어디까지 뻗어가게 될지는 가능성을 준 사람도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윤희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성균관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위해 욕망한다. 야망은, 크게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희망이다. 백성들의 고혈로 얻은 배움의 기회, 그것으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를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 가는 길. 바로 그것을 윤희는 꿈꾸기 시작한다. 그런 윤희에게 정약용은 남다른 애정에서 진심으로 염려하는 말을 한다. 그녀는 총명한 제자이기도 하지만 자기 스승의 딸이기도 했으니까.  그녀는 그런 정약용에게 지금껏 그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얘기로 대신 답한다.

- 계집인 네가 성균관 유생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질서란 그렇게도 무서운 것이다. 네가 아무리 소원하고 노력한다 해도 넌 안된다.
- 안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키실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 날부터 지금껏 전 단 한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내가 본 윤희는, 필요하다면 천체의 궤도도 틀어버릴 만큼 한계를 모르는 야망 가득한 여자였다. 더욱이 <성균관 스캔들>의 원작 소설에서도 윤희가 잘금 4인방 중 가장 야망 가득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진정한 선비의 도를 추구했던 이선준보다도, 역시 명문가의 자손이며 뛰어난 문장가였던 문재신보다도, 대부호의 아들로 참모형 인간이었던 구용하보다도, 윤희는 자신이 그려낸 '큰 그림'을 널리 실현시킬 수 있는 '자리'에 대한 야망으로 절절 끓어오르는 인물이었다. 처음부터 주어져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거나 재물의 반대급부로 쉽게 가질 수 있는 그들과 달리 윤희에게 '미래'라는 건 사력을 다한다 해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극의 마지막에서는 선준과 부부의 연을 맺고 성균관 박사로 재직한다. 분명 해피엔딩으로 끝난 드라마를 보고 울적해진 것은 윤희의 인생에 다시금 새겨진 한계 때문이다. 노론 영수의 아들인 선준에게 성균관 박사 자리는 본격적인 출사 전에 잠시 지나가는 곳이 되겠지만 윤희에게 그곳은 생의 종착역이지 않을까. 왜 윤희는 더 높은 자리에 가지 못하느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결말은, 패러다임을 바꾸는 상상력에 대한 배움이 있는 여자, 크고 멀리 볼 줄 아는 시선과 언어를 가진 그런 여자에게, '그.렇.다.해.도.절.대.못.바.꾸.는.건.있.는.거.란.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가 아닌 현재의 한국사회는 어떨까. 여자라서 대학에 못가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 현재라면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는 어떤가. 그러니까 소위, '배운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지난 5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는 <대학사회와 성평등> 이라는 주제 아래 '여성교수 임용목표제 성과와 과제'에 대한 포럼이 있었다. OECD 국가들의 여교수 채용 비율을 살펴 보자면 일본 24.3(2004년), 프랑스 27.7%(2007~2008년), 독일 25.6%(2005년)인 데에 비해 한국은 17.7%(2008년)에 불과하다.¹ 또한 한국 여성인력 경제활동참가율은 2008년 기준 OECD국가 중 최하위이다. 미국 65.5%, 독일 64.3%, 프랑스 60.1%, 스웨덴 74.4% 등으로 북유럽 국가들의 여성경제 활동 참가율은 대체로 70%이상이지만 우리나라는 53.2%를 기록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10대 기업의 간부 중 여성의 비율은 1.3%이다.²

사회 지도층이자 지식인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대학사회에서 여성교수의 비율은 왜 이토록 낮을까? 게다가 한국의 여성 경제 인구는 또 어떤가? 그보다 53.2%의 여성들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은 어떤 직종인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비정규직들 아닌가? 어째서 기업 고위 간부 여성 비율은 이토록 처참할까?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왜 이렇게 한국 사회는 교육받은 여성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데 있어 지나치게 게으르거나 무관심한 걸까?

자원이 없는 계층일수록 여타의 변수가 작용하지 않고 오직 시험으로만 승부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여학생들이 내신관리에 사력을 다하고 교대 진학을 선호하는 것은 교육받은 여성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두지 않았던, 않고 있는, 않을 것 같은 한국사회의 악의적인 무관심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 아닐까.

한국사회는 여성 지식인에게 끊임없이 '여자'가 될 것 즉, 법적 테두리 내에서의 혼인관계를 맺고 출산과 양육을 담당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배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한 무한한 가능성의 범위가 한순간에 극히 좁혀지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여자'가 되는 요구를 둘 다 수용할 수 있는 위치는 교육자 혹은 공무원 정도이다. '여자 직업으로는 선생님이 최고지'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큰 정치적 함의를 담은 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이백년 전 조선시대에 살던 윤희의 생애경험(비록 허구적 드라마의 세계에서지만)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20대 여성들의 자살률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³ 요즘 같은 '성 평등'한 사회에서는 여자라서 못할 일이란 건 없으며 맘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배우는데 정작 사회에 나가서 마주하는 현실은 꽤 야속하다. 그렇기에 '나만 잘하면 돼'라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하고 '천체의 궤도라도 틀어버릴' 각오로 패러다임을 바꿔보려는 노력을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모색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희는 새로운 조선을 열기 위해, '배움이 향하는 곳, 나라의 시작'이 무엇인지 찾아 헤맸다. 결국 그녀는 그 곳이 선대왕의 위폐를 모셔놓은 종묘도 아니고, 엘리트 지식인 집단인 성균관도 아닌, 바로 조선에서 가장 천하다 멸시받는 반촌(泮村, 주로 성균관 노비 및 천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성균관은 전국에서 100등 안에 들어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 상유들은 초 엘리트 지식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궁궐을 향한 세속적 출세를 지향한다면 성균관은 본연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자기 학문이 지향하는 바가 반촌을 향해 있음을 확실히 알고, 글을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아이디어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현실화 시킬 것. 이것은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책임이자 의무였지만 지금 이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사명과도 다르지 않다.

내게 여성학을 처음 가르쳐주신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 정희진 선생님께서는 "페미니즘이란 '약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Girls, be a ambitious!) 현재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되 그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페미니즘이 어떤 이름을 입든 그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정치학인지 잊지 말고 내가 무엇을 위해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치열한 판단을 해서 그 의욕하는 바를 성취하자. 페미니즘이 향하는 곳, 페미니즘의 시작. 그 곳이 어딘지, 또 뭘 의미하는지…. 늘 깨어 있기를.

* 각주

1) 대학사회와 성평등 -여성교수 임용목표제 성과와 과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자료집 81쪽
2) [10대 기업 여성간부 1.3%.] 동아일보, 2010년 10월 13일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450&articleid=2010101303000077410
3) [제 명에 못죽는 20대 여성들…왜?] 한계레, 2009년 8월 20일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newspickup_section/372285.html


태그:#성균관 스캔들, #여자의 야망, #여성교수 임용목표제, #반촌, #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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