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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상식이다"

 

간밤(11월 6일)에 한 방송국의 시사 프로그램 "안 내는가 못 내는가"를 시청했다. 요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납한 1672억 원에 대해, 국가가 이를 적극으로 추징치 못한 내용을 다뤘다. 지난 10월 1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동문회로부터 받은 강연료 300만 원을 낸 것은 1672억 원 미납 추징금 강제집행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등, 29만 원밖에 없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3남1녀 자녀와 손자손녀들은 수백억대의 자산가로 재산이 은닉되었을 개연성이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이 방송을 보면서 "법은 상식이다"라는 말과 이제는 고인이 된 권중희씨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법을 전공한 법률가는 아니지만 법은 보통 사람들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또는 분쟁이 있을 때 옳고 그름을 판단케 하는 잣대일 것이다.

 

그 잣대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상의 건전한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고, 또 그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법은 상식이다"라고 말하는가 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주로 특권층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법원 판결로 전두환 대통령 재임시절 기업 등으로 받은 9500억 원의 비자금 가운데 밝혀진 돈을 제외한 2205억 원을 추징금으로 내라는 판결이 났지만, 정부는 24퍼센트에 불과한 533억 원만 추징했을 뿐, 나머지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납된 상태라고 한다.

 

이러고도 전씨는 요란한 행차에다 현직 못지않은 삼엄한 경호를 받고 지내는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이를 본 어린 세대들이 무엇을 느꼈을지 몹시 걱정스럽다. "법은 만인 앞에 공평하다"라는 법치의 근본을 흔드는 이 작태에 이즈음 '공정사회'를 부르짖는 정부의 구호는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암살자가 활개 쳤던 세상

 

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30분 무렵, 서대문 네거리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에서 "탕! 탕! 탕! 탕!"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총탄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지도자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했다.

 

범인은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 그는 달려드는 비서들과 경비순경들에게 여유 있는 태도로 "선생은 내가 죽였다"며 권총을 든 채 손을 들었다. 잠시 뒤 안두희는 헌병대로 연행됐다.

 

암살범 안두희는 줄곧 단독 우발 범행을 주장했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6월 28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권중희, 1936년 경북 안동 태생으로 안동 경덕중학교 재학시절 <백범일지>를 수차례 읽고 김구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어른들로부터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는데, 정작 그 범인은 활개치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 의분이 하늘에 치솟았다.

 

서울로 와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생활을 하던 중, 안두희가 몰래 미국으로 이민가려 한다는 언론보도를 보았다. 

 

권씨는 그때부터 생업도 팽개치고 백범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히고 그를 응징하고자 추적 길에 나섰다.

 

권중희씨는 마침내 1987년 3월 27일 서울 마포구청 앞 대로에서 '정의봉'이라는 몽둥이로 안두희를 응징하다가 폭행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35일 만에 출소)을 받았다.

 

1991년 그리고 1992년 9월 23일 안두희를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에 강압적으로 데려가 범행 일부를 자백 받았다.

 

권중희씨는 이 일로 다시 폭력행위 위반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6개월 처벌을 받고 70일 만에 풀려났다.

 

어느 협객의 못다 이룬 꿈

 

나는 시민기자로 그분을 2003년 10월 20일에 인터뷰하여 10월 27일부터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여덟 차례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일이 있었다.

 

그 보도 결과, 일천여 누리꾼들이 모아준 4300여만 원의 성금으로 이듬해인 2004년 1월 31일부터 3월 17일까지 40여 일 미국에 머물면서 동포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백범 암살단서가 될 만한 문서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곳 아키비스트(Archivist, 문헌관리사)의 말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9.11 테러사건 후 미국 국익을 해치는 중요문서는 CIA나 국무성에서 이미 대부분 파기(Destroyed)하거나 수거해 갔다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한 달 넘게 결정적인 단서는 찾지 못하고 북데기만 뒤지다가 허망하게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권중희씨는 나에게 누리꾼들에게 면목이 없다면서 태평양 에 뛰어내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극구 만류하면서 역사의 진실은 세월이 지나면 밝혀지기 마련이라면서 후배 가운데 누군가는 이 일에 앞장 설 것이라고, 우리 임무는 그런 일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라고 위로해 드렸다.

 

그러자 권씨는 나에게 제의했다. 당신이 서울에 돌아가면 폭탄이나 수류탄 두 발을 은밀히 마련해서 단군 이래 제일 제이 가는 남의 돈을 가로채 먹고는 "내 배 째라"고 하는 연희동 두 전직 대통령 집에 가서 폭발물로 그들을 위협하여(정히 구하지 못하면 안두희를 찔렀던 대침을 덥쩍 다리에 꽂고는) 숨겨둔 돈을 모두 찾아 노숙자나 가난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도울 테니, 나는 그 전 과정을 현장 취재하여 역사의 기록에 남겨 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 청을 완곡히 사양하고는 서울로 돌아온 뒤 곧장 강원산골로 내려왔다. 그런 가운데 재작년 권씨의 운명 소식을 전해 듣고 빈소로 갔다. 아마 그분은 죽음 직전까지도 연희동 전직 대통령을 응징하는 꿈을 꿨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법은 "거미줄 법"이라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힘 있는 자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법이요, 힘이 없는 자들만 걸려드는 법이라면, 누가 법을 제대로 지키려 하겠는가. 법이 상식을 벗어날 때 사회는 무질서가 판 치고 협객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정부는 두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을 제대로 받은 뒤 '공정사회'를 부르짖어라. 그래야 법의 권위도 되살아나고, 백성들이 비로소 '공정사회'가 시작되나 보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태그:#전두환,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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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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