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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커피, 정전, 꽃

 

조제와 나는 블루베리 에이드와 모카 자바를 각자 앞에 두고 멍하니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카에 두 번 째로 다녀 온 뒤로 다시 몇 시간이 흘러서 오전의 햇살이 창가에 내리고 있었고, 정신없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공간을 이동하다보니 이젠 여기가 우리가 활동하는 세상이 분명한지 조차도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여기까지 우리가 화면으로 본 거였지?"

 

나는 일기장을 슬며시 내 앞으로 밀면서 스트로우로 블루베리 에이드를 한모금 빨아마셨다. 벽면에는 햇살 좋은 봄날 꽃이 막 필 무렵 동산에 올라서 손에 잡히는대로 꽃을 뜯어 입에 문 채 지난 시절을 회상 하는 것만 같은 소녀의 그림이 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커피란 게 기억을 불러오는 음료 아니겠어? 마시다 보면 그 향기에 취해서 잊고 있던 생각도 막 떠오르고 뭐...그것처럼 말이지...살다가 문득 어떤 어떤 계기가 되는 것들이 사람의 머릿속을 막 뒤집어 털어내는 경우가 있단 말이야."

 

조제가 무심한 듯이 내뱉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제 그 애도 점점 생각의 방향이 전과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기장 하나를 집어들어선 나란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1999년 8월 20일

 

부모님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미국에는 한번 씩 통화와 편지만 할 뿐 반 년이 다 되도록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어쩌면 우리 둘만의 결혼식인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는데 그냥 덜 떨어진 밥풀이 옷에 붙어있는 걸 발견한 순간

가벼이 떨궈내는 기분으로 인생에서의 첫 시작점을 그렇게 어설프게 출발해 버렸다.

 

앞으로도 그와는 서류상으론 남남이겠지만 우리끼린 해변에서 촛불을 켜놓고 간단한 예식도 올렸다. 그저께 저녁 무렵 노을이 내리기 시작하는 해안도로를 달려서 백화점에서 마직으로 된 하얗고 풍성한 고급 원피스를 사서 그 앞에서 입었을때 제법 비싼 부띠끄의 옷임에도 그는 과감히 지불을 하고 자신이 입을 만한 제법 고급 재질의 브랜드 양복을 샀다.

 

그리고 좀전, 노을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 해안의 암벽 위에서 파도에 휩쓸리듯 결혼식이 자행되어 버렸다. 먼 미래, 혹은 당장 오늘이라도 후회감이 밀려들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곪아터진 이 상처가 더 이상 사방으로 그 염증을 튀어나오게만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의 첫걸음은 안정되게 출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 알뿌리 식물에 의미를 두지 않아도 말이다.

 

피픽....

"그때 화면이 갑자기 중단되면서 전원이 꺼졌잖아."

조제는 일가장에 눈을 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맞장구 치며 거들었다.

"그래, 클럽 멘도사 안의 불도 일시에 꺼져 버렸었지."

 

그 순간, 보카에서 가장 격앙됐던 사람은 멜레나와 교환원이었다.

"뭐야, 이건? 불을 켜요, 불을! 이제 겨우 알뿌리 얘기가 나왔는데 뭐하는 거냔 말야!"

 

멜레나는 예의 그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꼬맹이가 멜레나 곁에 매달려서 칭얼대며 치맛자락을 붙드는 모습이 검은 실루엣으로 보였었다.

 

클럽 멘도사 내에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누군가가 실수로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렸는지 모르지만 와인병인 듯한 것이 와장창하고 깨지는 소리도 들렸었고, 더운 공기 속에서 짙은 포도의 향이 진동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작은 불빛이 무대 쪽에서 가늘게 떨리며 흔들리더니 사람의 형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에 선 사람이 '흰갈래기'란 걸 우리는 모두 알게 되었다. 그는 화분 하나를 손에 들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뭐야! 비켜요! 왜 거기 서있는 거요?"

 

여기저기서 야유소리가 날아들었고 심지어는 숟가락이며 음식을 집어던지는 이도 있었다.

 

"알뿌리 식물에서 꽃이 피었어요."

흰갈매기는 아랑곳 없이 화분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모두에게 보였다. 마치 탱고의 첫 모션을 시작하는 분위기 같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어딘가에서 애수에 섞인 반도네온 소리가 울리더니 흰갈매기는 그 음악에 맞추어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 물론 상대는 없는 상태에서 마치 화분이 그 역할을 맡기라도 한 것 같은 춤이었다.

 

"당신 춤을 감상하자고 여기 있는 게 아니란 말예욧! 나는 오늘 저녁 야근도 취소한 채 숙직실에서 이 꿈 속을 헤매고 있는데 이제 곧 깨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요! 빨리 불을 켜요!"

 

다음에는 안내원이 단호하지만 빠른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의 앞내용을 보시려면 화면 우측 상단의 '이 기자의 다른기사'를 클릭하세요.


태그:#판타지 소설, #중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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