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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가 조금 지나서 우리가 탄 도난(道南) 버스는 홋카이도의 노보리베쓰(登別)에 도착했다. 노보리베쓰는 깔끔하고 한적한 일본 온천관광지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마을을 거슬러 올라온 버스는 우리 가족을 다이이치타키모토칸(第一滝本館)에 내려주고 갔다.

료칸의 전통을 이어받은 종업원들이 매우 친절하다.
▲ 온천호텔의 종업원. 료칸의 전통을 이어받은 종업원들이 매우 친절하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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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여직원들이 우리에게 머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의 공손한 인사!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일본 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장면이다. 나는 이 직원들을 보면서 내가 일본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온천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단순한 인사이지만 과거 대형 료칸(りょかん, 旅館)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강렬한 전통이 느껴진다.

호텔의 체크인 시간은 오후 2시였다. 다다미방에 여행가방을 얼른 풀어놓고 몸을 잠시 쉬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나라 호텔 중에서는 조금 융통성을 발휘해서 방에 짐을 풀게 해 주는 곳도 있었지만 원리 원칙에서 벗어나기를 힘들어하는 일본에서 체크인 시간 전의 입실은 무리였다. 우리는 여행 짐을 호텔 카운터에 맡겨두고 호텔을 잠시 둘러보았다.

다이이치타키모토칸은 일본 3대 온천지 중의 하나인 노보리베쓰에 가장 먼저 들어섰던 온천 료칸이었다. 1858년에 개장을 했으니 1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은 30개의 온천탕으로 유명한 큰 호텔로 변신을 했다. 그러나 무늬만 호텔이고 내부는 다행히 과거의 대형 료칸 모습을 그대로 살리고 있었다. 잠을 청하는 방들은 일본식인 다다미 방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마치 온천 리조트같이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흑백사진 속의 목재 료칸이 운치가 있다.
▲ 과거의 다이이치타키모토칸. 흑백사진 속의 목재 료칸이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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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온천탕 입구를 둘러보던 나는 적어도 일제 패망 이전에 찍혔을 것 같은 과거 다이이치타키모토칸의 사진 앞에서 발을 멈춰 섰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당시에 나무로 지어진 4층 기와집의 료칸이 담겨 있었다. 온통 나무로 지어진 수십 년 전의 건물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운치가 있고 포근했다. 나는 이 사진 속의 대형 목조건물이 지금 호텔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과거 온천마을의 정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가족을 방까지 안내할 호텔의 여종업원은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일본 아가씨였다. 남자인 내가 짐을 들고 가도 되는데 젊은 종업원 아가씨는 굳이 우리의 짐을 끌고 앞장서서 방까지 안내를 한다. 한국 사람이라서 이러한 일본 종업원들의 과도한 친절이 조금은 어색하다. 하지만 종업원 아가씨는 자신의 직장에서 배운 대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친절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어린 일본 아가씨는 유카타 입는 법, 차 달여 먹는 법 등을 완벽한 일본어로 너무나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나는 일본어가 서툴지만 그녀의 설명하는 행동을 보니 어떤 내용인지 알아들을 만했다. 아마도 이 아가씨는 자신의 업무 매뉴얼에 나와 있는 대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 아가씨는 온천에서 사용할 수건도 전달하고 방을 나갔다.

대형 호텔 건물 내부는 전통 료칸의 다다미 방이다.
▲ 현재의 다이이치타키모토칸. 대형 호텔 건물 내부는 전통 료칸의 다다미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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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다다미방에 담배 냄새가 배어 있지는 않았다. 묘한 냄새가 나는 다다미방이 포근했고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화식(和式, 일본식) 방은 우리 가족 3명이 생활하기에 작지 않은 크기였다. 벽장 안에는 두껍고 포근한 이불이 가득 들어 있었고 방 가운데의 작은 탁자 앞에는 등받이만 있는 의자가 탁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양갱이 있어서 순식간에 먹어 버렸다. 미끼상품인 양갱이 맛있기는 했지만 기념품 가게에서는 사지 않기로 마음을 다스렸다.

우리는 방에 마련된 유카타를 입고 온천용 수건을 든 채로 방을 나섰다. 나막신을 신은 채 온천으로 향했다. 유카타는 생각보다 품새가 넉넉해서 편했지만 옷 안쪽의 끈을 잘못 묶어서인지 가슴팍 부분의 옷이 자꾸 벌어지려고 한다.

이 호텔 온천탕의 공식이름은 온천천국 대욕장(溫泉天國 大浴場)이다. 나는 아내, 딸과 온천 입구에서 헤어지고 남탕으로 들어섰다. 온천탕 내부 모습은 우리나라 온천탕과 비슷하지만 그 규모는 생각보다 매우 넓었다. 순간, 우리나라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내 눈 안으로 들어왔다.

카운터를 지키는 종업원이 여성, 아줌마다.
▲ 온천천국 대욕장 남탕. 카운터를 지키는 종업원이 여성, 아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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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것은 남탕의 카운터를 지키는 사람이 남성이 아닌 여성, 아줌마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이 이국적 상황을 관찰해 보기로 했다. 과연 저 아줌마는 벌거벗은 남성들이 옆을 걸어 다니는데 아무런 성적인 느낌이 없을까?

일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욕탕에서 수건으로 성기를 가리고 다니지만 지금 보니 일본의 젊은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바쁠 일 없는 나는 잠시 그 아주머니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일본 아줌마는 모든 남자들을 쳐다보지는 않지만 성기를 내고 돌아다니는 젊은 남자들을 자연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문화적 충격이라고 할 것이다.

이 일본 아주머니는 마치 우리나라 남자 화장실에서 일하시는 청소부 아줌마들 같이 자연스럽다. 많은 부분이 비슷한 듯한 일본이지만 이럴 때 일본은 우리나라와 너무나 다른 나라이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살아온 나는 이 아줌마 앞에서 괜히 손으로 거시기를 가리게 된다.

온천천국 대욕장 2층에 자리한 남탕은 생각보다 매우 넓고 깨끗했다. 남탕 안에는 효능과 온도가 다양한 탕이 있다. 노보리베쓰에서 가장 크다는 욕탕, 걷기용 족탕, 누울 수 있는 탕, 창밖이 보이는 탕, 족욕탕, 물대포탕, 폭포수탕. 내가 경험한 일본의 온천탕 중에서도 다이이치타키모토칸 온천탕이 가장 컸다.

일본인 가족 몇 명을 제외하고는 사람도 별로 없이 한적하다. 나는 탕에 들어간 후 일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수건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온천에 짙게 퍼진 유황 냄새가 나의 코 속으로 스멀스멀 들어왔다. 처음엔 불쾌한 냄새였지만 유황 냄새도 자꾸 맡으니 적응이 되고 있었다. 부드러운 온천수 속에서 여행의 피로는 금세 잊어 버렸다.

노천탕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고요한 밤하늘 아래의 노천탕은 정말이지 환상적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밤의 화산계곡도 너무나 신비하다. 지옥계곡 숲 속에서 서늘한 밤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의 향기와 활화산의 유황냄새가 섞여 있었다. 다리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천수의 느낌과 머리에 닿는 밤하늘의 차가운 느낌이 섞이고 있었다.

남탕의 노천탕은 지옥계곡을 향하여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지옥계곡에서 망원경으로 보거나 다이이치타키모토칸 바로 앞까지 온다면 남탕의 벌거벗은 남자들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노천탕은 남탕만 보일 것이다.

욕탕 내부의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니 실내수영장이 있다. 수영복을 입고 온천수 안에서 수영하는 곳이니 수영복만 입으면 남녀 가족이 같이 만날 수 있다. 나는 신영이가 오기 전에 수영장의 기다란 미끄럼틀을 타고 온천수 속으로 수차례 몸을 던졌다.

나의 사랑스러운 딸, 신영이가 들어왔다. 수영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전보다 많이 큰 게 보였다. 신영이는 미끄럼틀을 타고 놀다가 수영도 하다가 수영장에서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보고 있었다. 실내수영장 밖, 기포가 생기는 욕탕인 자쿠지. 나는 신영이와 따뜻한 노천 자쿠지 안에서 한참 동안 몸을 쉬었다. 이렇게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딸도 몇 년이 지나 성인이 되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다. 딸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행복하면서도 괜히 아쉬웠다.

싱싱한 해산물 요리가 가득하다.
▲ 다이이치타키모토칸 식당. 싱싱한 해산물 요리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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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나는 다이이치타키모토칸이 자랑하는 저녁식사 중 어떤 식사를 할 것인지 잠시 갈등에 빠졌다. 방에서 일본식 만찬코스를 즐기는 카이세키(會席) 요리는 결국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일본의 단아하고 미학적인 저녁상을 받을 수 있지만 배불리 먹지는 못할 것이고 입맛에 맞지 않는 요리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홋카이도의 다양한 해산물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바이킹' 뷔페를 즐기기 위하여 호텔 식당으로 갔다.

싱싱한 대게를 먹고 싶은 만큼 양껏 먹을 수 있다.
▲ 홋카이도 대게. 싱싱한 대게를 먹고 싶은 만큼 양껏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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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음식들은 계절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해산물들이 풍부했다. 게다가 음식에 대한 일본인들 특유의 식단 세팅이 깔끔했다. 대게, 킹크랩, 가리비구이, 고동, 소라, 참치회, 알 덮밥 등 내가 좋아하는 해산물이 줄을 서 있다. 속살이 투명하게 내비치는 싱싱한 생새우와 오징어는 나뭇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식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홋카이도의 유명한 게요리이다. 홋카이도 특산 대게의 커다란 게다리가 접시 위에 잔뜩 쌓여 있었다. 해물과 어묵이 들어간 탕, 밥과 된장국, 야채절임인 쯔께모노(つけもの). 음식의 성찬에 과식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 끼의 성찬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온천 관광지답게 관광객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호텔의 북 공연. 온천 관광지답게 관광객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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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리베쓰 마을 구경을 나가려다 보니 호텔 로비에 도깨비들이 출몰해서 춤을 추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었다. 유럽의 시계탑 인형들처럼 빙글빙글 돌던 도깨비들이 방망이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홋카이도의 전통 북 연주를 보여주는 전통공연이 시작된다. 나는 마치 온천을 주제로 한 작은 테마파크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밤에는 노보리베쓰 마을 구경을 나갔다.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서 식당과 기념품 가게 안은 한적했다. 기념품 가게에는 노보리베쓰를 상징하는 도깨비와 곰들이 온통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 붐비지 않는 온천마을은 조용했고 그래서 오히려 더 여행자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었다.

이불이 푹신하고 두꺼워서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다.
▲ 다다미 방과 이불. 이불이 푹신하고 두꺼워서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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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숙소로 들어오니 다다미방 안에 요와 이불이 가지런히 펴져 있었다. 호텔의 이불 프로가 와서 깔아놓고 간 것이다. 호텔 종업원이 자신의 업무를 하고 간 것이지만 고객을 정성스럽게 접대한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요는 마치 침대의 매트리스처럼 푹신하고 이불도 어릴 적 덮어 보았던 아주 두꺼운 이불이다.

여행으로 피곤했던 몸이 따뜻한 온천욕 후에 서서히 녹고 있었다. 붕 떠 있는 듯한 몸이 두꺼운 이불에 들어가 있었다. 오늘 하루는 온천을 하며 온전히 쉬겠다는 계획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온천도 너무 열심히 하고 마을구경도 해서인지 몸은 역시 피곤했다. 여행지에서 밤마다 이렇게 몸은 피곤하지만 매번 여행을 떠나는 나의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모든 세계 여행기가 담겨 있습니다.



태그:#일본온천, #홋카이도, #노보리베쓰, #다이이치타키모토칸, #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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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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