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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갯벌 건너 편으로 보이는 변산반도
 고창 갯벌 건너 편으로 보이는 변산반도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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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화)

하늘에 구름이 많이 덮여 있다. 그렇지만 비가 올 날씨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날씨가 자전거 타기에는 딱 좋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태양빛에 화상을 입을 우려가 없고 땀조차 잘 흐르지 않는 날씨가 자전거 타는 데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산뜻한 출발이다.

곰소 젓갈단지를 빠져 나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인다.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해안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30번 국도이고, 하나는 해안에 가까운 비포장도로다. 지금까지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가 고생을 한 적이 여러 차례라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이번에 나타난 비포장도로는 상당 구간 바다를 볼 수 없다. 그럴 바에 차라리 국도를 선택하는 게 낫다.

그렇게 해서 줄포리 해안까지는 30번 국도를 이용하고, 줄포리에서 부안자연생태공원까지는 바닷가 제방 위를 달린다. 부안자연생태공원에 다다랐을 무렵, 느닷없이 가랑비가 내린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하늘이 어느새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다. 이러다 또 폭우가 쏟아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마침 공원 안에 정자가 있어 잠시 몸을 피한다.

종잡기 어려운 게 요즘 날씨다. 일기예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날씨가 예보했던 것과 달리 급변하는 게 기상청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니 기상청을 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상청 일기예보만 믿고 여행을 다녀야 하는 처지에서는 참 곤란한 지경에 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은 다행히 가랑비에서 그칠 모양이다. 빗방울이 더 이상 굵어지지 않는다. 이런 정도의 비라면, 빗방울이 옷을 적실 정도는 아니다. 몸에서 발생하는 열기와 자전거를 타는 데서 생기는 바람 때문에 빗방울이 옷에 떨어지기 무섭게 말라 버린다. 더 이상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부안자연생태공원은 갈대숲이 무성하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마침 공원 내 스피커에서 40대 정서에 맞는 옛날 가요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늘은 흐리고 갈대숲은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별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마음이 쓸쓸해진다. 가는 비가 내리는 날, 애잔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배추밭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고창의 배추밭. 밭과 논이 어우러진 풍경
 고창의 배추밭. 밭과 논이 어우러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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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자연생태공원을 지나면 바로 고창군이다. 고창군으로 들어선 이후로는 한동안 낮고 완만한 구릉을 쉼 없이 타고 남는다. 후포리까지는 줄곧 밭 아니면 논 사이를 지나간다. 그런데 이 밭과 논들이 구릉 위로 넓게 펼쳐져 있는 풍경이 의외로 아름답다. 요즘 한창 품귀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배추밭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길가의 밭들이 기하학적 문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구릉 위로 밭고랑들이 물결을 치듯이 흘러간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닌데도, 다분히 예술적이다. 더 이상 인위적인 장식을 더할 필요가 없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예술성 역시 자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한동안 아름다운 풍경이 줄줄이 이어진다.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대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화폭을 감상하는 데 적잖이 시간을 빼앗긴다.

고창. 해안가 제방.
 고창. 해안가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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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의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는 바닷가 풍경 역시 대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바다 건너 변산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뚝 선 산 능선이 길게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고창에서는 칠면초로 뒤덮인 붉은 갯벌과 더불어 변산반도의 웅장한 산세를 볼 수 있어서 좋다.

변산반도는 첩첩산중이다. 그곳의 해안도로를 달릴 때는 미처 몰랐는데, 변산반도는 산과 산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땅이다. 바다 건너 첩첩이 쌓인 산들이 거리에 따라 조금씩 농담을 달리 하고 있다. 거리가 멀수록 더 옅은 빛깔을 띠고 있어 입체감이 살아난다. 수묵화가 따로 없다.

고창군은 바닷가 해안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비록 시멘트로 만든 1차선 도로이기는 하지만 평소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 자전거를 타는 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중간 중간 길이 끊어지기도 하고, 일부 구간 자갈을 깐 거친 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자전거를 타는 데 큰 무리가 없다.

해안도로 주변으로 양식장이 수도 없이 많다. 대부분 장어 양식장이다. '풍천장어'가 바로 이곳 고창의 양식장에서 생산된다. '풍천'은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민물을 뜻한다. 그러니까 풍천장어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히는 장어를 말하는, 이 지방 고유의 용어라고 보면 된다.

자연산 풍천장어는 한때 선운사 부근을 지나는 하천에서 잡혔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씨가 말랐다'고 한다. 그 이후론 양식장어가 풍천장어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에는, 장어 요리집 또한 양식장만큼이나 많다. 손님이 직접 구워 먹는 방식의 '셀프' 집이 자주 눈에 띈다.

갯벌과 바다를 감상하기 좋은 길은?

고창 갯벌
 고창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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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해안도로는 갯벌과 바다를 감상하기 좋은 길이다. 갯벌 가까운 곳에서 왜가리나 백로들이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한가롭게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갯벌에는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게들이 바글바글하다. '농말게'란다. 그놈들,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가까이 다가갈라치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모두 개구멍 아닌 게구멍을 하나씩 갖고 있어 그곳으로 재빨리 몸을 숨긴다.

갯벌 풀숲에 들어가 농말게를 잡고 있던 아주머니 말이 놈들을 '빠숴서' 젓갈을 담가 먹으면 엄청 맛있단다. 그런데 잡기가 쉽지 않다. 먹을거리가 눈앞에서 바글거리는데 잡을 수가 없다니 조금 안타까운 심정이다. 아주머니는 주로 풀섶에 숨어 있는 걸 잡는다고 한다. 그게 좀더 손쉽다. 전문가들은 게구멍을 직접 파헤친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자루에 농말게가 그득하다. 바지는 온통 펄 투성이다. 게를 잡으려고 고생깨나 한 흔적이 역력하다. 농말게를 '빠숴서' 젓갈을 담그는 과정을 직접 보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하전리 가는 농로
 하전리 가는 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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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해안도로를 잇는 길을 찾지 못하고 지방도로로 올라선다. 그 길에 하전어촌체험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 국내 최고의 바지락생산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갯벌에 바지락이 얼마나 많이 있기에 '최고'라는 타이틀을 붙였을까 궁금해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마침 밀물 때라, 눈에 보이는 게 그저 찰랑거리는 바닷물뿐이다. 그 바다 위로 생뚱맞게 축구 골대가 솟아 있다. 갯벌에서 조개만 캐는 것이 아니고, 축구도 함께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갯벌에서 차는 축구공, 색다른 맛일 게다.

만돌리 가는 길.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만돌리 가는 길.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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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돌리해변
 만돌리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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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전리에서 조금 더 가면, 만돌리 바닷가가 나온다. 바닷가 언덕 위에,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바닷가 송림 사이로 길게 산책로가 놓여 있다. 그 앞에 '서해안 바람공원'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서 있다.

정자 위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소죽도와 대죽도 같은 작은 섬이 보이고, 푸른 바다 너머로는 여전히 미련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듯 변산반도가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과 바다와 산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송림 사이를 천천히 걸어본다. 서해안 바람공원은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곳이다.

명사십리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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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에 두 군데 해수욕장이 있다. 하나는 동호해수욕장이고, 또 하나는 구시포해수욕장이다. 모두 해수욕장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고창군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은 아마도 '명사십리'가 아닐까 싶다. 직선에 가까운 해변이 광승리에서 장호리까지 6km, '십리'가 넘게 펼쳐져 있다. 끝에서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널찍하고 긴 해변에 자동차들이 속도를 내서 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해변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해변 모래사장이 발자국조차 잘 찍히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그 엄청난 크기에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해변이다. 이곳은 대부분 군사 지역으로 묶여 있다. 작년까지 해변에 철조망을 설치했다가, 올해 초 철거한 상태다. 해가 떨어진 뒤에는 해변에 들어갈 수 없다.

명사십리 끝에 구시포항이 있고, 항구 너머에 구시포해수욕장이 있다. 평범하지만, 근처에 명사십리가 있어서 그런지 쾌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구시포해수욕장을 벗어나서 얼마 안가, 전라북도 경계선을 넘는다. 고창군을 지나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충청남도를 벗어나는 데 10일이 걸린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전라북도는 그만큼 해안선이 단조롭다는 걸 뜻한다. 그 단조로움에 새만금방조제가 한 몫을 했다.

또 하나의 경계선 넘어 전남 입성... 다시 바다와 마주치다

전라남도 영광군에 들어서서는 홍농읍 칠곡리까지 줄곧 내륙을 달린다. 별다른 특징을 찾아보기 힘든 길이라 있는 힘껏 속도를 낸다. 그러다 칠곡리 끝에서 다시 바다와 마주친다. 그 막다른 길에서 우회전을 하면 계마항과 가마미해수욕장이 나오고, 좌회전을 하면 영광 법성포로 이어진다.

가마미해수욕장
 가마미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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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로 가기 전에 가마미해수욕장을 먼저 찾는다. 그곳에서 영광 원전이 빼꼼히 들여다 보이는 백사장이 있다. 가마미해수욕장까지는 해안가 산허리를 타고 넘어야 한다. 당연히 도로의 굴곡이 심하고 언덕이 높은 탓에 고생을 좀 해야 한다. 바닷가 쪽은 절벽이기 때문에, 특히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마미해수욕장은 한때 호남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여름이 오면 피서객들로 흥겨운 몸살을 앓던 곳이다. 그랬던 곳이 원전이 들어서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사람들이 원전이 들어서 있는 해수욕장을 꺼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마미해수욕장은 규모는 작지만 모래가 곱고, 바닷가 풍경이 어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해수욕장 뒤로 산그늘 깊은 금장산이 둘러쳐져 있어 꽤 아늑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호남 제일의 명성을 얻을 만하다.

그 해변에서 바다 쪽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원형 지붕을 덮은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을 볼 수 있다. 원전이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계곡 안쪽에 살짝 몸을 숨기고 있다. 원전이 가마미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름 한 철 휴가를 나온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원전이 들어선 후로도 가마미해수욕장은 여전히 호남 3대 해수욕장 중에 하나로 꼽힌다. 원전이 결정적인 흠이 되고 있지는 않다는 얘기다. 원전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깊은 매력이 있는 해수욕장이다.

영광 법성포 굴비
 영광 법성포 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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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마항을 잠시 들른 후 바로 법성포로 향한다. 해가 질 때가 다가오고 있다. 가능하면 밤길은 달리고 싶지 않다. 다행히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법성포로 들어서는 높은 언덕을 넘는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법성포에서 맨 먼저 마주친 물건이 상점 앞에 내걸린 '굴비'들이다. 법성포로 들어서는 길 초입에서부터 굴비를 보기 시작해 숙소를 찾아가는 길 내내 굴비가 눈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도시가 온통 '굴비' 투성이다. 상점 간판에도 모두 굴비 엮듯이 줄줄이 굴비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법성포는 굴비 없이는 못 사는 그런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숙소를 정하고 나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식당의 주 메뉴 역시 굴비다. 굴비정식 말고 식사로 먹을 만한 게 달리 눈에 띄질 않는다.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할 일이 없어 좋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혼자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혼자서 가면 상을 잘 차려주지 않는다. 어쨌거나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니 온몸에 피곤이 몰려온다. 오늘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렸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가 107km, 총 누적거리는 1450km다.


태그:#부안자연생태공원, #고창, #법성포, #명사십리,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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