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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풍 곤파스에 쓰러졌습니다
▲ 24년 동안이나 친숙했습니다. 그런데 강풍 곤파스에 쓰러졌습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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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나무는 삼백 년을 산다고 합니다. 삼백 년, 언뜻 생각을 해도 하얗게 먼 아득한 수령입니다. 백합나무의 말은 천하일품 또는 만사형통이라고 합니다. 생장이 다른 나무들에 비해서 무척 빠르고 수형 또한 크기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땅속 깊이 뻗지 않고 옆으로만 퍼져서 지난 번 강풍 곤파스에 우리동네 백합나무들이 많이 쓰러졌습니다. 

이정표 같았던 그리고 친숙했던 그 아름드리 백합나무도 쓰러졌습니다. 허이연 뿌리들을 훌렁 드러낸채로 그야말로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그 아름드리 백합나무를 나는 매일 가보았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 우람한 위용에 못지않게 흙을 털고 나온 흰 뿌리들 역시 어찌나 많고 또 탐스럽던지 처음 보는 순간, 경이로움에 그만 등골이 다 오싹해 졌습니다. 

저 뿌리들, 처참합니다
▲ 울타리 길에 백합나무도 쓰러졌습니다 저 뿌리들, 처참합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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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봉숭아꽃물 같은 노을이 피어오르는 저녁무렵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마치 벌목장에 그것들처럼 기둥토막들만이 아무렇게나 다른 백합나무토막들과 함께 방치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매일 그 백합나무를 가 보았던 것은 이상하게도 가 보지않으면 안될것만 같았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도 가 보았습니다. 우산을 받쳐들고 서서 잠깐이라도 바라보고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비바람이 스쳐가던 날 나는 처음으로 그 백합나무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가 먼 바다에서 이는 물결소리처럼 들려왔습니다. 푸르디 푸른 무성한 이파리들이 일구어 내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 백합나무가 쓰러지던 날 아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입이 얼어붙기라도 한 듯이 말이 없었습니다. 구경거리로 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쁜 출근길이라는 것도 잊고, 등굣길이라는 것도 잊고 바라보다가는 조용히 돌아서서 가고는 했는데 내 마음이 그래서일까 그들에게서는 조문을 끝내고 가는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새벽 수영을 하고 돌아오던 중년남자가 한참을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수영을 갈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그 사이에 이리되다니.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이 맞네----" 

나는 그 백합나무를 이십사 년 전에 만났습니다. 그때 이 아파트단지로 우리 가족이 이사를 온 것입니다. 아파트단지 안에는 키가 큰 백합나무들이 많았습니다. 대단지라서 낙엽송, 은행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목련 등에 수종들이 숲을 이루고 많이 있습니다.

그 백합나무는 철제울타리에 조그맣게 나 있는 문을 마주보고 서 있었습니다. 한 사람만이 겨우 통과 할 수 있는 그 조그맣게 난 문을 나서면 바로 잠실역 6번 출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러 갈 때도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도 친구들 모임에 갈때도 나는 정문으로 나가지 않고 조그맣게 난 문으로 나가곤 합니다. 그 백합나무 앞에서 몸을 왼쪽으로 돌려서는 몇 발자국을 걸어가 그 조그마한 문을 나서는 것입니다. 그 백합나무는 이정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이사를 오던 해인 그때도 그 백합나무는 굵고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이십사 년이 흐른 지금은 아름드리로 자라올라 가지들이 어찌나 울창하던지 올려다 보면 하늘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한여름에는 짙은 그늘이 길섶까지 덮고는 해서 나는 가끔 무거운 장바구니를 그 시원한 그늘에 내려놓고 푸른 이파리 바람에 땀을 식히고는 했습니다. 그때마다 뭐라고 표현을 할 수 없는, 마치 깊은 숲 속에서 삼림욕을 할 때와 같은 그런 상쾌함이 나를 감싸고 돌았습니다. 

튤립 모양의 연노랑색꽃이 가지마다 피면 백합나무는 아름다운 그림처럼 화사해졌습니다. 장바구니를 내려놓은 나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화사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서있노라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드는 가을에는 내가 좋아하는 황금색으로 단풍이 들었습니다. 하나 둘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황금빛 이파리들은 어찌나 고운지를 모릅니다. 이파리 하나를 주워들고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걸어가다가 보면 소녀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즐겁고 행복해지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 백합나무는 이십사 년 전에 젊은 내 모습만이 아니라 뚜벅뚜벅 출퇴근을 하던 남편의 젊은 모습도 지금은 어른이 된 자식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던 예쁘고 싱그러운 모습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날에야 그 백합나무와 헤어지게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우리동네에 재건축 바람이 확실하게 불어 이사를 가게되면 그때서야 헤어지게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땔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기둥토막들로 변한 백합나무들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땔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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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 기둥토막들은 어디로 가나. 혹여 땔감이 되면 어쩌나. 백합나무는 경제수종이라는데 그말대로 가구재나 펄프 목공제품같은 것으로 쓰이게 되면 좋겠는데.

돌아서서 몇 발자국인가를 걸어가는데 자꾸 뒤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새 거기에도 봉숭아꽃물 같은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 간절한 바램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백합나무 기둥토막들이 아까와는 다르게 아주 근사해 보입니다. 그야말로 천하일품입니다. 나는 입가에 웃음을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던 한 줌에 재로 남는 땔감거리는 되지않을 거라는 확신이 슬며시 들었던 것입니다.  


태그:#백합나무, #경제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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