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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프원의 이웃에 필지를 가지고 계신 김성규선생님은 아직 집을 짓지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문화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의 사정이 당장 집을 지어 헤이리의 이웃이 되고 싶은 마음을 미루게 합니다.

 

김 선생님은 집을 지어 하루라도 빨리 이사 오고 싶은 마음을 그 땅에 채마와 꽃을 가꾸면서 달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일주일에 두어 번씩 꼭 오셔서 돌을 골라내어 골과 두둑을 만들고 씨를 뿌려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계절에 따라 무나 배추를 심기도 하고, 도라지와 해바라기 같은 꽃이 피는 식물을 심기도 했습니다. 올해는 박을 심어 사방으로 뻗은 넝쿨이 지난여름 내내 흰 꽃을 피웠고, 분홍빛 꽃으로 늦여름을 풍성하게 했던 분꽃무리들은 그 꽃이 달렸던 자리에 환약(丸藥)같은 검은 씨앗을 하나씩 달고 있습니다.

 

지난 봄, 전신영선생님께서 주신 상추를 정원 귀퉁이에 심어두었습니다. 김성규선생님이 오실 때마다 그 상추 포기마다에 유기질 비료를 주곤해서 저의 사랑대신 김선생님의 사랑으로 자란 상추 덕에 지난여름 내내 풍성한 푸성귀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김선생님은 어디서 구하셨는지 이미 새어서 못 먹게 되어버린 봄에 심은 상추대신 또다시 다섯 포기의 상추를 동그랗게 심어주시고 한 달쯤은 더 상추를 즐길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퇴비는 뿌리가 좀 더 내린 뒤에 해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올 때 퇴비를 주겠습니다."

 

저는 이 다섯 포기의 상추가 큰 밭뙈기의 상추를 모개로 얻은 것보다 더 큰 정성과 정으로 느껴졌습니다.

 

 

열무를 수확하실 때는 싱싱할 때 드시라며 열무를 한 아름 두고 가시고, 깻잎이 풍성할 때는 연한 잎일 때 따 드시라며 일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실 때마다 제게 당부 같은 다짐을 받곤 하십니다.

 

지난 더운 여름 날에는 막걸리 한 통을 따로 담아오셨습니다.

 

"제가 간혹 들리는 식당에서 담아온 것입니다. 직접 담근 것이라 맛이 다릅니다."

 

페트병 속의 그 막걸리는 마시면서 저는 이 하나밖에 없는 그 맛뿐만 아니라 김선생님의 정성을 음미하며 마셨습니다.

 

 

두둑을 만들면서 나온 돌들은 한곳에 모았다가 탑을 쌓으셨습니다. 그 돌들을 두둑 가에 방치하는 것보다 이웃들이 좀 더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게 마음을 쓴 것입니다. 그 돌을 모아 쌓는데 김선생님은 꼬박 하루를 소일 하셨습니다.

 

 

김선생님이 오실 때마다 모티프원의 집으로 들어와 땀을 식히라고 말씀하셔도 늘 한사코 그 말을 물립니다.

'옷에 흙이 묻어서…….', '땀 냄새 때문에…….' 그때마다 갖은 이유를 말씀하시곤 하지만 혹 제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될까보아 하시는 배려임이 분명합니다.

 

지난봄에 딱 한번 제 말을 수용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마침 더운밥을 했으니 함께 점심을 드시지요?"

 

그때 김선생님은 처음으로 집으로 들어오셔서 냉장고를 모두 뒤져도 세 가지밖에 되지 않는 찬을 두고 맛있게 함께 점심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고향이 강릉인줄도, 일찍 서울로 나오셔서 이제 고향이 오히려 낯선 곳이 된 연유로 헤이리에 정착할 생각을 하셨다는 저와 같은 처지의 사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가위 연휴가 막 시작되는 지난 18일, 김선생님께서 도라지를 한아름 앉고 나타나셨습니다.

 

"3년 전에 심은 것입니다. 그 일부를 캤습니다. 싱싱할 때 잡수세요."

 

 

석양이 조강너머로 막 모습을 감추었을 때 김선생님이 강릉에 다녀오시겠다며 떠나시면서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를 박이 넝쿨을 뻗은 곳으로 데려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줄기에 어린 박이 두 개 달렸습니다. 이번 추석에 이것을 따다가 해 잡수세요."

"아니, 박이 익도록 그냥 두시지요. 보기도 좋고……."

 

"늦게 달린 이 박은 이제 익기에는 늦었습니다. 좀 더 지나면 세어버려서 먹기에도 적당치 않습니다. 박은 임금님께 조리를 해서 바칠 만큼 건강한 식재료예요. 토란국처럼 끓여 드셔도 됩니다. 며칠 내로 따세요. 바가지를 만들 수 있는 박은 지금 저렇게 여러 개 남아 있습니다. 저것은 선생님 것이고 그 뒤의 것은 이 앞집 댁의 것이고 그 옆의 것은 이 옆집 것입니다."

 

김선생님은 이미 각 이웃집에 나누어줄 박들을 점찍어 두신 것입니다.

 

 

 

김선생님이 주신 도라지는 마침 저를 돕기 위해 온 첫쨋딸 나리가 묻혀서 그 날 저녁 식탁에 올렸습니다. 김선생님이 주신 도라지 향만으로도 저녁식사가 향긋했습니다. 덕분에 딸아이의 묻침 솜씨도 덤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요.

 

헤이리는 그동안 살아온 배경이 모두 다른 낯선 사람들이 모여 새롭게 이웃이 되어가는 신생마을입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사정으로 새롭게 내 집 옆에 살게 된 이웃은 남새밭의 채마를 가꾸듯, 화단의 화초가 탐스러운 꽃을 피우게 돌보듯 정성스럽게 가꾸고 돌보아야할 관계입니다.

 

 

저는 김성규선생님이 하루빨리 저의 옆집으로 이사 오실 날을 기꺼운 마음으로 손꼽습니다. 그리고 함께 삶의 애환을 나누는 일상의 행복을 더 키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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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이웃, #김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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