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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더미 속에서 부러진 이를 찾는 노인

 

지난 9월 16일, 서울대학교의과대학 부검실 유골보관실 106-1호, 부위별 유골이 정리된 선반의 치아 더미 속에서 서병규할아버지께서 그 이빨들을 샅샅이 들추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 이빨더미 속에 함께 두었는데 어디로 갔을까?"

혼잣말 속에 울음이 섞여있었습니다.

 

-어떤 이빨인데요?

"제 셋째형의 반쯤 부러진 앞니예요. 저 형님의 두개골에서 빠진 그 이빨을 지난해 이곳에 두었는데 찾지를 못하겠어요."

 

-이렇게 많은 머리뼈들 중에 저 두개골이 셋째형님 것인 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셋째형님은 제가 어릴 때 저를 엎어주곤 했어요. 그날도 저를 엎고 집을 나섰다가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져서 앞니가 부러졌어요. 그래서 유해를 발굴하면서 저는 앞이빨이 부러진 두개골을 찾으면 그분이 저의 형님일 거라 여기고 흙더미 속에서 유해가 나올 때마다 이빨에 주목했어요.

 

그래서 발굴되는 유골마다 이빨의 흙을 쓸면서 두개골을 정리했지요. 앞니가 부러진 이 두개골을 찾고 저는 셋째형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15년째 매년 이곳을 방문하면 이 형님의 머리를 안고 60년째 구천을 떠돌도록 하는 저의 무능을 질책하곤 합니다. 그런데 유골이 오래되니 벼가 상해서 이태 전에 이빨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 이빨더미 속에 함께 두었는데 찾지를 못하겠네요."

 

서병규(77세)씨는 고양 금정굴 학살 희생자 가족의 일원입니다. 서씨는 아버지와 첫째형님, 그리고 이 유골의 당사자로 확신하고 있는 셋째형을 금정굴에서 잃었습니다.

 

금정굴사건이란 한국전쟁 당시 9․28서울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고양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고양지역과 파주 일부지역에서 거주하던 153명 이상의 주민들이 부역혐의자 및 부역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에 의해 금정굴에서 불법적으로 집단총살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의 유족들은 1995년 9월부터 10월까지 자체발굴로 수천 점의 유해와 유품들을 발굴했으나 관계기관의 외면으로 이 서울대병원에 임시로 15년째 유해와 유품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산소가 없으므로 한가위를 앞두고 이 유골보관실로 성묘를 온 것입니다. 유족들은 설과 한가위, 일 년에 두 차례 이곳에서 성묘를 합니다.

 

유족들은 가지런히 정리된 유골 선반 앞에 제수祭需를 놓고 절을 했습니다. 유족들은 유골 앞에 술을 뿌리고 유품들을 다시 꺼내보며 60년 가슴속에 간직한 통한의 응어리들을 쏟아냈습니다.

 

유골들은 두개골, 쇄골, 견갑골, 늑골, 대퇴골, 경골 등 부위별로 정리되어있고 비녀가 박힌 머리카락타래와 댕기머리, 회중시계 같은 유품 및 희생자들을 묶었던 비비선(유선전화선)과 총살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M1, 칼빈 탄피, 한성상업중학교 교복단추, 도장 등의 유품들이 종이박스에 담겨져서 세월에 부식되고 있었습니다.

 

발굴당시 유골조사를 도와주고 '고양시 금정굴 양민학살사건 감정결과 중간보고서'를 낸 서울대병원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의 도움으로 유골들이 임시본관 되어있는 건물도 내년에 헐리고 신축될 예정이므로 이 유해들이 다시 어디로 옮겨져야 할지가 막연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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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

 

9월 18일, 유족들과 함께 금정굴 현장을 찾았습니다. 행정주소로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208-10번지로 황룡산이 고봉산으로 이어지는 해발 74m 야산입니다. 고양과 파주 경계지점인 고봉산삼거리대로에서 불과 100여m지점입니다. 그 야산은 주변마을 사람들이 고봉산삼거리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질러 다니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아파트가 밀집한 중산마을주민들이 운동 삼아 걷는 산책길이기도 합니다.

 

그 산책길의 마루 지점에 비닐로 덮인 문제의 금정굴이 있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덮어둔 비닐을 들추자 수많은 양민을 삼킨 검은 목구멍, 수직폐광굴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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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금정굴은 일제 강점기에 금을 캐기 위해 판 굴이었습니다. 당시 주위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이곳에 금이 나온다는 얘기를 금광 사업자에게 흘렸고 업자는 그들을 고용하여 일을 시켰답니다. 먼저 수직으로 파고 수직갱도 안에서 수평갱도를 파기도 했지만 금은 발굴되지 않았답니다."

 

부역혐의자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금정굴에서 희생된 고산돌(당시 46세)의 아들인 고준일(70세)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서울대의과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유골, 유품에 대해 '고양시 금정굴 양민학살사건 감정결과 중간보고서(1998)'는 "희생자 수가 최소한 153명 이상일 것으로 판단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2005년 5월에 공포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해 설립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의 보고서는 '본 사건과 관련한 전체희생자의 규모는 1995년 발굴된 유골감정의 결과를 근거로 할 경우 최소 153명 이상, 비비선의 수를 근거로 할 경우는 최소 160명 이상, 발굴된 탄피의 수를 근거로 할 경우는 최소 171명 이상으로서 판단되는데 이중 가장 포괄적인 결론은 유골감정의 결과인 최소 153명 이상이다'고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방치되었던 이 수직금광갱도는 한국전쟁 당시 잔혹한 양민 학살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진실화해위는 "국군의 고양․파주지역 수복 이후, 경찰은 지역주민 중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자와 부역혐의로 행불 또는 도피한 자의 가족을 연행하였다. 경찰은 이들을 관내 각 지서 및 치안대 사무실, 창고 등에 구금하였다가 고양경찰서로 이송한 다음, 3~7일간의 조사를 거쳐 10월 9일부터 한 번에 20~40여 명씩 금정굴로 끌고 가서 총살하고 암매장하였다. 이 과정에 고양경찰서 관내 경찰과 20여 명의 태극단․치안대 등 경찰보조 인력이 가담하였다. 금정굴 현장에서는 5인 1조의 경찰관 2개조가 희생자 5명씩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하여 살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고 왜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습니다."고 말하는 고준일할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의 유족도 있고 비료를 준다고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국군수복 후 국군환영대회에 나갔다가 가좌리 창고로 끌려갔다는 짐작 가는 이유을 유추하는 유족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북한군 점령 후 교사생활을 계속했다는 이유로,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사람이 일산치안대에 고발하여서, 집안의 먼 친척이 좌익을 했다는 이유로 금정굴 수직갱도 위에서 총살당해야했습니다.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점령지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글을 안다는 마을 사람들의 추천으로 인민위원장이되고 교사라는 이유로 여성위원장이 되기도 했답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었던 것이지요. 정작 인민군에 적극 가담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갔고 죄가 될 리 없다고 여긴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이 완장을 찬 사람들에게 잡혀갔습니다. 그중에서도 죄가 크다고 여겨져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사람은 살았고, 경찰서에 남았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작은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 시삼촌, 시숙 및 집안에서 일하던 일꾼까지 6명을 잃어야했던 마임순(64세)씨가 말했습니다.

 

대부분 경찰의 보조 인력으로 활동했던 태극단이나 치안대에 의해 연행된 사람들은 고양경찰서 유치장이나 임시유치창고에 감금되었습니다. 연행자들은 취조 명목의 고문을 당했습니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의 모습은 참혹할 지경이었습니다.

 

"감금된 주민들이 마실 것이 없어 자기 오줌을 먹는 모습과 경찰서 맞은편 유치창고에서 치안대가 잡혀 오는 사람을 총 개머리판이나 장작개비로 무조건 때리고 집어넣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유치장 담당 순경 정○○은 마실 물이 없어 오줌을 마시는 모습과 남녀 구별 없이 7~8명 들어가는 유치장에 20여 명을 넣어 여자들이 서서 소변을 보는 모습, 아침 점검 때 마다 고문으로 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진실화해위 보고서 )

 

물이나 음식을 전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행된 가족들이 도시락을 싸다 날랐습니다.

"10월 9일, 오전 9시경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지고 고양경찰서로 갔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도시락을 가져온 가족들이 수십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는 도시락을 받지 않고 창고 뒤로 가 있으라 했습니다. 그때 비비선에 손목을 뒤로 묶인 사람들이 경찰과 치안대, 태극단의 호위 하에 금정굴이 있는 봉일천 방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아버지와 큰형 그리고 셋째형이 이었습니다. 설마 죽이러 가는 줄은 모르고 조사받으로 가는 줄로 알았지요."

 

서병규 할아버지의 증언입니다.

 

이 죽음의 금정굴에서 살아나온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이병순(79세)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할 생각으로 작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과 밧줄과 사다리를 가지고 금정굴로 갔습니다. 두 사람이 굴 안으로 내려갔었는데 사람살려라고 외치는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경선씨입니다. 꺼내주자 마자 두려움으로 고봉산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지금까지 종적을 알 수 없습니다."

고준일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피해자가 내민 화해의 손을 뿌리치다

 

금정굴의 희생자가족들은 친인척을 잃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남은 부역혐의자들의 행방을 캐기 위한 유족들의 연행과 고문이 계속되었습니다. 재산을 약탈당하고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혀 계속되는 고통과 불이익을 감당해야했습니다.

 

"덕이리의 박헌수는 부친을 금정굴사건으로 잃은 후 모친이 치안대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치안대원의 후처가 되어야 했으며, 1년 뒤에 조모가 돌아가시자 7세 때부터 고아로 지내야

했다. 일산리의 박화송 역시 살기 위해 재가한 모친을 따라 가서 성조차 바꾸고 살았으며, 군에 입대할 즈음에서야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행주외리 이의모는 시집간 누이에게로 가서 아직도 마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일산리 서병규는 가해자들이 '빨갱이 가족'이라는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 바람에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이러한 사정은 대부분의 유족들이 지금까지 겪어 온 참혹한 고통의 한 단면이다. 살아남은 희생자 부인에 대한 성적 모욕 역시 유족들을 지역에서 떠나게 만든 요인이었다. 이산포 치안대 대장 김○○(金○○)은 희생자 노춘석의 처를 괴롭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희생자 최재옥의 처 이경순은 희생자의 처형 후 어느 날 새벽 4~5시에 본인도 송포지소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는데, 심문내용은 빨리 재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억울하여 말을 안 하고 있으니까 "왜 말 안하냐"며, "이 자식들 길러 원수 갚으려 하냐. 이 주 안에 팔자 고쳐"라고 하면서 몽둥이로 구타를 당하였다."고 진실화해위의 보고서는 적고 있습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통한의 세월을 인고해야했던 유족들은 1993년 고양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43년 만에 제1회 합동위령제를 올리며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였습니다.

 

1995년 유족회에서 금정굴 자체 발굴에 나서고 99년에는 경기도의회 '고양시 일산금정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서 금정굴사건을 경찰 책임하의 불법학살로 규정하였습니다.

 

2006년 4월 진실화해위의 고양금정굴사건 조사가 개시되고 2007년 6월 이 위원회는 금정굴 사건을 고양경찰서장 책임하의 불법 집단살해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경찰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최종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국가는 고양 금정굴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이 아무런 적법절차 없이 집단 희생되었으며, 그 유족들이 오랜 세월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온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우리 피해자들은 가해자 측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들은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화해는 그들이 지금까지 받아왔던 영웅대접에 위협일 수 있다고 여긴 거겠지요. 지난해 길거리에서 금정굴 사건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전단지를 돌기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어떤 분이 저희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빨갱이년들!'이라고 외쳤습니다."

마임순씨가 말했습니다.

 

"아직도 화해의 손을 외면하고 양심선언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더 문제입니다. 화해를 중재해야할 그들이 더 외면합니다. 표를 의식해서 일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새로운 시장이 당선되고 비서 한 사람과 금정굴에 성묘를 다녀갔습니다. 그리고 '조속한 해결'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피해자 유족들을 만나는 것조차 끄려했습니다. 그 후임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의원 때는 문제해결을 약속하지만 시장이 되고 나면 돌아서고 맙니다.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라'고 저희는 늘 버려진 배였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언급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맛있는 저녁이나 사달라고 하세요. 그 말씀은 마시고…….'입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우익으로 부터 시달림 때문이라는 것을……." 부역혐의로 시아버지를 잃은 이경숙(63)씨의 얘기입니다.

 

이렇듯 우리 안에서도 그 낡은 이데올로기ideology의 대립은 지금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서울의대 유골보관실로 성묘를 갈 때마다 선반위의 유골들이 저를 보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뭐하고 있니?'라고……. 이제 이 유해를 발굴했던 분들조차 속속 돌아가십니다. 정말 이제는 마무리해야할 시간입니다." 마임순씨가 말한 유족들의 하나같은 마음입니다.

 

 

진실화해위가 권고했습니다.

 

"정부는 현재 서울대병원 법의학교실에 임시 보관되어 부식되고 있는 유골․유해를 영구

봉안 할 수 있도록 시급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지역민과 국민들에게는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 위해 금정굴 지역에 평화공원을 설립하고, 적절한 위령시설을 설치할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진화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단 하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권고'는 '강제'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사실을 보고하고 그 조치를 권고하는 것으로는 현실은 여전히 원점이고 화해는 요원합니다. 진실화해위의 한계입니다.

 

공포와 슬픔에서 기억과 성찰로

 

금정굴의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도록 두고 우리가 어떻게 아무 일도 없는 듯 대명천지를 활보할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은폐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국가범죄의 해결과 화해를 예술적 기법으로 제안하고, 압박하고, 설득하며 강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무하고 반목과 비극의 장소를 화해와 상생의 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예술로 말하고자 함입니다. '2010 높빛평화예술제 - 평화를 상상해요'가 그것입니다.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성찰하고 극복하는 평화와 상생의 메시지를 담고자합니다.

 

"평화문제를 문화예술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한국전쟁전후 한반도 남단에서는 무려 100만여 명의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90%는 대한민국 국군ㆍ경찰ㆍ우익단체 그리고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적인 집단학살이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기지역 최대학살지인 금정굴의 비극을 포함한 이 중부권 제노사이드genocide 문제에 주목하고자합니다. 공포와 슬픔에서 기억과 성찰로 전환되어야지요. 정곡을 찌르면서도 부드러운 어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지 않습니까? "

 

2010 높빛평화예술제 전승일 기획위원의 얘기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 100년, 한국전쟁 60년, 4.19 50년, 전태일 분신 40년, 광주항쟁 30년…….불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세대에 해당되는 100여년의 역사를 잡시 뒤돌아보아도 굽이굽이 질곡의 사행천입니다. 그 세월을 살아야했던 우리 모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입 막고 귀 막는 것도 모자라 차꼬와 수갑을 차고 살아야했습니다.

 

외세에 의한 속박과 박해의 원통함에 더해 우리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혈육과 이웃을 잃어야했습니다. 비료 한포를 얻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그 명부에 오른 이유만으로 검속檢束과 즉결처분을 받아야했습니다. 무고誣告로 갇힌 형무소에서 학살되고, 유격대토벌대에게 토벌되고, 부역자로 낙인찍혀 수직갱도 앞에서 총살되었습니다.

 

뒤돌아보면 보이는 이 킬링필드의 역사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원혼들의 해원解冤을 위해서는 이 국가권력에 의한 제노사이드의 진실을 캐고 따져서 명백하게 사실을 밝히고 서로 화해의 손을 잡는 것일 것입니다. 

 

서울대병원 법의학교실에 15년째 임시 보관되어 문드러지고 있는 금정굴 사건 희생자 유골과 유해는 국가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미래로만 달리느냐? 사람이기를 포기했던 광기의 시대를 치유하는 것이 먼저지 않은가?"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원혼들의 신원伸冤과 진실을 묻어두고 있는 우리들 양심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2010 높빛평화예술제 - 평화를 상상해요

-전시개요

○ 초대일시 | 2010. 10. 1(금) 오후 6시

○ 기간 | 2010. 10. 1(금) ~ 2010. 10. 10(일)

○ 장소 | 고양아람누리 이벤트홀(갤러리 누리) www.artgy.or.kr

○ 주최 | 2010 높빛평화예술제 추진위원회(대표 : 박은태)

○ 후원 | 고양시, 고양문화재단, 고양금정굴유족회, 경기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외

○ 공식홈페이지 | www.peacegoyang.org

○ 문의 | 기획위원 전승일 011-267-7954 / ani8585@naver.com

 

-주요행사

○10월 2일(토)

-오전 11시 : 금정굴 위령제 현장제례  _ 금정굴 현장

-오후 1시 ~ 2시 : 상여행렬 및 노제 _ 주엽역-일산경찰서-일산동구청

-오후 3시 : 금정굴 위령제 본행사 _ 일산동구청 앞 광장

 

- 참여작가 (예정)

○김기호 김서경 김종도 김재석 김천일 나규환 박건웅 박영균 박은태 박흥식 서수경 송효섭 안만욱 이두표 이안수 이윤엽 이원석 이인철 이재환 이철재 전미영 전승일 전진경 천호석 최선영 외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금정굴, #제노사이드,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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