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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아버지가 새것으로 하나 사주기로 했으니까 아무말 하지 말어.'

탈수가 안 된 빨래를 손으로 짜서 빨랫대에 널었다며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나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한 것은 장인이 사주는 것이니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술 한 잔 걸치고 늦게 귀가한 탓에 피곤하기도 해서 시시비비는 아침에 따져볼 참이었다. 집에 들른 장인이 세탁기의 상태를 보고는 교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과 최근에 꽃배달 운전을 보름 정도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전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탈수 과정에서 몇번씩 멈추는 세탁기. UE 는 세탁물이 한쪽으로 몰렸을때
동작을 멈춘다고 한다.
 탈수 과정에서 몇번씩 멈추는 세탁기. UE 는 세탁물이 한쪽으로 몰렸을때 동작을 멈춘다고 한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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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혼수품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세탁기(14년사용)는 낡고 오작동을 하기는 했지만 세탁기로서의 기능은 문제가 없던 터라 멈추는 날까지는 사용하려고 했었다. 또한 오작동의 원인은 세탁기가 아니라 수평이 맞지 않은 세면장 바닥 때문이라서 고무판으로 수평을 잡아주기는 해도 탈수시에 심한 진동으로 수평이 틀어져서 멈추는 것이라는 것을 아내에게 몇 차례나 알려줬지만 자주 멈추는 바람에 짜증이 난 것이다.

다음날, 아내의 꽃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장인에게 세탁기를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기로 했다. 무조건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듯 해서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있다면 그나마 유용하게 사용할 수는 있을 것 같은 김치냉장고를 생각해냈고, 세탁기 보다는 가격이 배나 높을 것 같아서 비용은 반반씩 부담하자고 했다.

장인은 그래도 세탁기가 불편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불편한대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했다. 아내는 심술이 단단히 났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고 세탁기는 바꿀 수 없으니 김치냉장고로 하던지 없던 걸로 하자고 맞섰다.

'세탁기는 내가 돌리는데 당신이 불편해 할 필요 없잖아? 너무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말자.'

올해 김장은 넉넉히 해도 걱정은 없겠지만 마음은 편하지가 않네.
 올해 김장은 넉넉히 해도 걱정은 없겠지만 마음은 편하지가 않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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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대 서랍장을 빼내고 그 자리에 김치냉장고가 들어왔다. 올해 김장은 넉넉히 해도 보관 걱정은 없게 되었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계속적인 소비를 강요하는 물질과잉 세상에 맞서서 살아보겠다는 내 삶의 방식을 가족들에게 강요하는것도 부당하다는 생각에 이번 일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세탁기는 여전히 탈수과정에서 서너 번씩 멈췄고, 익숙해진 감각으로 수평을 맞춘 후에야 세탁을 끝냈다. 밥을 먹다가도 '띵동 띵동...' 하는 소리가 나면 세탁기로 달려갔고, 책을 읽을 때도 달려가는 내게 아내가 말한다.

'몇 번씩 탈수를 해서 그런가 빨래는 더 깨끗한 것 같더라.'


태그:#세탁기, #김치냉장고, #물질과잉, #결혼혼수,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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