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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곧 얼굴을 내밀 준비를 하며 하늘부터 물들이고 있습니다.
 해가 곧 얼굴을 내밀 준비를 하며 하늘부터 물들이고 있습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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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전 5시 20분 알람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약속한 대로 호미곶의 일출을 보여드려야지요. 잠을 잔 찜질방에서 나와 '상생의 손'을 향해 걷는데 하늘엔 이미 밤의 장막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곧 얼굴을 내밀 태양빛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엄한 풍경 안에 홀로 있으니 마치 신의 오묘한 작업을 엿보는 듯했습니다.

밤새 바닷물에 씻기운 말간 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냅니다.
 밤새 바닷물에 씻기운 말간 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냅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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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 지 10여 분. 마침내 상생의 손 좌측 5도 방향에서 해가 떠올랐습니다. 바닷물 속에서 밤새 씻긴 해는 시인 박두진의 표현처럼 참으로 말갛습니다. 바라보고 있으니 심장을 도는 피마저 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태양의 강렬한 기운이 '상생의 손'을 향해 번집니다.
 태양의 강렬한 기운이 '상생의 손'을 향해 번집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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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했던 대기가 태양의 기운을 받아 금세 따뜻해졌습니다. 상생의 손이 해를 움켜쥐려면 겨울이 와야 합니다. 이곳에서 남은 가을, 겨울을 지내며 나날이 해뜨고 지는 모습을 본다면 어쩜 훌륭한 시 한 편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하늘 보는 일마저 뜸해진 무감각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잠시 마음만 내면 자연은 언제고 투명하고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 안에 사람사는 이치가 있음은 철이 든 다음에 알았습니다.

전날밤 보고 아침에 다시 만난 모녀.
 전날밤 보고 아침에 다시 만난 모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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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을 보고 돌아오는데 지난밤 만난 모녀를 다시 봤습니다. 그렇잖아도 사진을 찍어드리고 싶었는데 반가웠습니다. 소싯적 어머니도 딸도 국내외 이곳저곳 여행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는데 어느덧 둘은 각기 여든과 예순을 넘겼습니다. 아침의 장관 속에 이제는 세월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 모녀가 다정하게 섰습니다. 사진 속 인연을 다시금 들여다보니 목이 메입니다.

사진 보내드릴 주소를 받아 적었는데 그 사이 딸 되시는 아주머니가 2천 원을 건넸습니다. 됐다고 했지만 여행 나오면 다 돈인데 마음이 고맙다며 기어이 쥐여 줬습니다. 그리고 사는 집이 춘천이라며 기회가 되면 꼭 찾아오라 했습니다.

여행을 시작하고 이런 만남이 적지 않습니다. 지난 8월에 거제도에서 만난 농군 부부에게도 얼마전 사진을 보내 드렸는데 그 덕에 다시 볼 땐 공짜로 재워주겠다 했습니다. 꼭 무얼 줘서가 아니라 그저 정다워 좋습니다.

호미곶의 '삼형제' 등대
 호미곶의 '삼형제' 등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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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질방까지 걸어오는데 사위가 완전히 훤해졌습니다. 지난밤부터 새벽까지도 보지 못했던 '삼형제' 등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상이 사나운 날 먼 바다에서 보는 등대 불빛은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 것일까요.

언제나 그런 불빛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근심이 더 큽니다. 하루는 눈 서너 번 깜짝할 사이 지고 마는데 예전에 몰랐던 건 지금도 모르겠고, 마음의 성장은 더디기만 하니 종종 불안하고 무섭습니다.

바다를 점령한 갈매기 군단
 바다를 점령한 갈매기 군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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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들도 태양의 정기를 받으며 새 날을 맞고 있었습니다. 이들과 저의 한평생이 같을 수야 없겠지만 때때로 큰 시련이 닥치면 나름의 지혜와 인내로 극복하고 청춘을 즐기고 피할 수 없는 늙음을 맞이하는 건 같지 않겠습니까.

어쨌거나 같이 숨쉬는 생명들은 모두 평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고 살아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구룡포 일본가옥거리 홍보전시관
 구룡포 일본가옥거리 홍보전시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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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에서 버스를 타고 나와 구룡포에 왔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포항에서 가장 큰 사찰인 부경사로 가야지 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정오 무렵 구룡포에 도착했는데 괜스레발걸음이 무겁고 마음의 갈피를 못 잡겠는 것이 여정 잇기가 머뭇거려졌습니다.

그래서 근처 관광안내 입간판을 보고 버스정류장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있는 일본가옥거리를 걸었습니다. 딱히 볼 거나 있겠나 싶었는데 막상 골목길을 걷다보니 어디선가 익숙한 속삭임이 들렸습니다.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듯한  계단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듯한 계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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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은 예감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막연한 '필(feel)'이 적중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머물고 싶은 곳들이 있는데요, 그런 곳에선 여지없이 특별한 추억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사나흘 이곳 주민이 되어 살아보기로. 숙소는 일본가옥거리 초입에, 생긴 지 30년 된 여관입니다. 후덕한 인상의 할머니께서 본인이 더는 깎기 민망할 가격으로 방을 내주셨습니다.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요. 궁금하시죠? 저도 궁금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지에서 전하겠습니다. 당신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가을이 오니 오랫동안 연락 못한 지인들 사는 소식도 궁금해집니다.

호미곶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찜질방.
 호미곶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찜질방.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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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정보] 호미곶 상생의 손에서 걸어서 5분여 거리에 있는 '호미곶 해수탕 찜질방'입니다. 계절을 타는 곳이라 원래는 주말만 열던 곳인데 얼마 전부터 1년 365일 상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용료는 7천 원. 주인 내외가 친절하고 점잖아서 믿음이 가는 곳입니다. 아침엔 아주머니가 바다에서 직접 딴 삶은 고동도 주셨습니다. 손님 많은 성수기 말고 지금처럼 한가할 때 가심 혹시 또 모르지요. 더 맛있는 거 거저 주실지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와 다음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태그:#국내여행, #공정여행, #착한여행, #호미곶, #일본가옥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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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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