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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옥상전망공간에서 바라 본 모습
▲ 국립4.19민주묘지 전경 기념관 옥상전망공간에서 바라 본 모습
ⓒ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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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초 서울 성북구 수유동에 있는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았다. 4월 혁명 50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그간 국가가 혁명을 어떻게 기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었다. 묘역이 삼각산 자락에 위치하여 만경봉과 인수봉, 백운대가 조망되는 경관은 가히 일품이었다.

수유동에 4·19묘지가 들어선 사연은 무엇일까? 장소의 선정에는 쿠데타 정권 치하라는 시대적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 수유동(당시 수유리)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의 외곽에 위치해 있다. 박정희 정권은 묘지가 도심에 조성될 경우 반정부적 집단행동을 촉발시키는 저항의 집결지가 될 것을 우려하였다. 반란군은 4·19를 의거라 부르고 5·16을 혁명이라 불렀다. 묘역의 조성에는 4월 혁명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자신들의 정변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묘지 조성 과정도 석연치 않았다. 묘지 설계와 조형물 제작의 책임자는 조각가로 유명한 김경승(金景承, 1915~92)이었다. 그는 형 김인승(金仁承, 1910~2001)과 함께 일제의 전쟁 수행과 조선 통치에 적극 협력한 미술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다.

그는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정권기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국가의 기념사업에 참여하였다. 서울 남산공원의 김유신 장군상, 안중근 의사상, 김구 선생상, 덕수궁의 세종대왕상, 인천의 맥아더 동상 등이 그의 대표 작품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4․19 당시 철거된 이승만 동상을 제작했던 그가 묘지 내의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수호자상도 조각했다는 사실이다. 묘지 조성 과정에서의 결핍된 역사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4.19 50주년에 맞춰 재개관한 기념관

남산에 위치하던 것으로 김경승의 작품이다.
▲ 4월 혁명 당시 끌려내려가는 이승만 동상 남산에 위치하던 것으로 김경승의 작품이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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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공간으로서 4·19묘지는 김영삼 정부시절을 거치면서 또 다시 변모하게 된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묘지를 성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993년 정화작업을 착수하여 공사는 4월 혁명 35주년에 맞춰 완성되었으며,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성역화 작업을 통해 묘역은 3만5310㎡(1만700평)에서 9만6837㎡(2만9345평)으로 확장되어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또 4·19는 혁명으로 호칭되었다. 국가에 의해 4·19 운동의 민주주의와 혁명성이 공식적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역화 사업에는 한국사회의 민주화라는 배경과 동시에 또 다른 사정도 있었다. 김영삼 정부가 등장한 시기는 5월 광주의 복권이 한창 활발히 논의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광주의 복권은 피해갈 수 없는 과제였으나, 김영삼에게 광주 복권은 김대중과 호남을 높이는 것으로 보였다.

김영삼 정부는 광주가 민주화 운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4·19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김영삼의 정치적 근거였던 마산은 4·19의 도화선이 된 3·15항쟁이 발생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망월동 묘지가 국립묘지로 지정될 때, 4·19묘지와 3·15묘지도 같이 국립묘지로 지정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기념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묘역 내 위치한 4․19혁명기념관을 통해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기념관은 4․19 50주년에 맞춰 지난 4월 1일 재개관한 것이다. 크게 1층의 기념전시공간과 2층의 교육문화공간, 3층의 옥상전망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기념전시공간에서는 4월 혁명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2월 28일에서 4월, 그리고 그 이후까지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혁명을 4․19에만 한정하지 않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 여러 지역에서의 현황을 보여주어 4월 혁명이 전국적인 민주주의 운동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함께 당시 영상물이나 사진, 경험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관람객들은 한결 쉽게 4․19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4.19 정신과 '정권교체'가 무슨 상관이람

김경승의 작품. 묘역 내 기념탑과 수호자상도 그의 작품이다.
▲ 4월학생혁명기념탑 부조 김경승의 작품. 묘역 내 기념탑과 수호자상도 그의 작품이다.
ⓒ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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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밀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부자연스러운 게 눈에 들어왔다. 먼저 방문할 당시 전시관 내에 6․25전쟁 60주년기념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2층에서 당시 참전국들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의미로 'Thank-you액자'를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웬 황당한 일인가. 4․19기념관에 6․25를 기념하고자 하는 발상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전쟁기념관 등 다른 곳이 있음에도 굳이 이곳에서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오히려 4․19 50주년을 특별히 기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전시관을 떠나는 내내 머릿속에서 느낌표와 물음표가 떠나지 않았다.

같은 2층에는 명사방명록이 한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여러 인사들의 방명록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남긴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4․19정신 이어받어 정권교체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민주국가, 잘사는 대한민국 만들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남긴 방명록.
▲ 이명박 후보의 명사방명록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남긴 방명록.
ⓒ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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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은 대통령이나 정부의 국정 홍보 전단지가 아니다.
▲ 4.19 묘지 안내 팸플릿 속의 이명박 대통령 안내문은 대통령이나 정부의 국정 홍보 전단지가 아니다.
ⓒ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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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정신과 정권교체는 도대체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4․19정신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인지, 4․19에서 정권 교체의 의미만 따온 것인지 의문이다. 또 묘지 안내 팸플릿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도하는 사진이 거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안내문은 대통령이나 정부의 국정 홍보 전단지가 아니다. 4․19에 대한 기념을 한 명의 정치 지도자에게 전유시키려는 욕망, 오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묘역 내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거북함은 각 정부에서 4월 혁명을 바라봤던 시선과 거기에 내재된 정치적 의도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누구나가 반독재 민주주의운동으로 인정하는 4․19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거기에 편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올려놓는다고, 덮어 넣고 뭉친다고, 통합, 화합하자고 민주화가 진전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위 당시에 대부분의 학생들, 일반 시민들이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고자 운동에 참여하고,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한 번쯤 떠올려볼 일이다.

끝으로 묘역을 나오면서 든 감상이지만 거대한 혁명탑의 위압감과 좌우 대칭형의 획일화, 계단 위에 높게 위치해 있는 유영봉안소의 위계감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낱말과는 다소 멀어보였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일반 사람에게, 다양성과 풀뿌리 속에 살아 있을 수 있음을 되새겨 본다. 4․19묘역이 진정한 민주와 평화의 공간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면서.

덧붙이는 글 | 역사학을 통해 소통과 통합을 모색하는 전국역사학전공대학원생 모임 '통통통(通統筒)'의 회원입니다.

'통통통(通統筒)'은 역사학을 통해 소통(疏通)과 통합(統合)을 모색하는 공간(筒)이 되기를 희망하는 전국역사학전공대학원생 모임입니다. '통통통'은 향후 1년 동안 한국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소개하면서, 여러분들이 역사나무에 접속할 수 있는 안내자가 되고자 합니다. '2010년, 역사를 기억하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한일병합 100년, 한국전쟁 60년, 4·19혁명 50년, 그리고 5·18항쟁 30년을 다시 기억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집단지성의 참여와 더불어 역사나무를 더 풍성히 키워갈 수 있는 새로운 성찰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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